09 행복을 찾아서

답은 그 시도에 있는 거야

by 진하하하하

#1

종종 「세계 행복 보고서」를 인용하여 뉴스에서 한국의 행복지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낮다며 보도한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숨 쉬고 있다. 나는 내가 행복한지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풀리지 않는 문제처럼 계속 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그 문제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여전히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좀처럼 행복해지지 않는다.

작가를 그만두고 뭐라 내세울 것 없는 몸뚱이만 가지고 있었다. 태국으로 도망왔지만 별 볼 일 없는 건 변함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막막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막연할수록 행복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갔다. 행복, 행복, 행복. 뭘 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빌어먹을 자본주의에서 자꾸만 돈을 쓰게만 하고. 돈을 벌면서 행복해야 하는데 그런 게 있나. 그렇게 불행에 찌들어 사는 나날이 많아졌다. 빠이에서 머무는 날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빠이와 빠이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2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카페 「아트 인 차이」를 찾아갔다. 카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옛날 안락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평범한 동남아의 카페 같아졌다. 하지만 힙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한국인 남자애가 이 카페를 처음 소개해 주었다.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빠이에 있으면서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시외도 구경하고 이곳에서 차이도 마시기도 했다. 「아트 인 차이」의 방명록에 그린 그 남자아이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소용돌이가 강렬했다. 내가 그때 가지고 있었던 무지개 색연필로 그린 소용돌이는 크고 휘황찬란했다. 그것을 본떠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의 그림처럼 강렬하지 못했다. 혹시 카페에 아직도 그 그림이 있을까 하고 찾아갔지만 방명록을 찾기란 여간 어려웠다. 언제 그린 그림인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옛날의 흔적을 찾는 건 매력적인 일이었지만 수고로움이 꽤 컸다. 방명록을 찾는 일은 그만두고 그냥 차이나 마시기로 했다.


#3

그러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카페에서 공연이 있다는 포스터를 보았다. 고민되었다. 빠이와 빨리 빠이하고 싶은데 이걸 보자니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다. 버틸 자신이 있을까. 난 이미 불행이라는 감정에 노예가 되었는데 더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계속 나에게 되물었다. 이걸 볼 것이냐 말 것이냐. 치앙마이로 넘어가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서 할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빠이에서 할 게 있는 게 아니었다. 고민의 연속에 차이는 다 마셔갔다.

선택은 쉽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나에게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짤막하게 한마디 하셨다.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당시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당연하지. 난 어른이니까!”라고 했지만 갈수록 그 말에 무게가 내 몸을 짓눌렀다. 방송작가가 되기로 한 것도 선택이었고, 퇴직도 선택이었다. 하물며 이곳에 이틀 더 남을지도 선택이었다. 선택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옳은 선택이란 게 존재하긴 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빠이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전혀 없었다. 이렇게 외로운 기억만 가득한 도시에 또 오고 싶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재밌는 일도 있었지만 그건 극소수였다. 재밌었던 일이 나중엔 과장되어 슬펐던 일을 잊을지언정 지금 당장은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틀을 더 버티는 게 더 나은 선택 같았다. 카페 공연에 어떤 게 나올지 궁금했다. 대강 공연 포스터를 보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고 싶으면 카운터에 문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래, 이틀 더 기다리고 구경하자.


드디어 목요일이 되었다. 공연을 보기 위해서 저녁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나만 더디게 흐르는 건가 싶다. 그렇다고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춰서 가면 분위기가 어색할까 봐 30분 늦게 도착했다.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하나둘 자리에 앉아 공연을 구경하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러웠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공연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손이 심심했다. 공연을 구경하는 것도 슬슬 한계가 왔다. 환호하면서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적인 분위기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음미할 재량이 없었다. 그림이라도 그려서 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한 차례 공연이 끝나고 사회자가 나와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새로운 여자가 무대로 나왔다. 그녀가 들고 있었던 건 종이 몇 장이었다.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가 싶었는데 그녀의 자작시를 읽기 시작했다.

영어 듣기 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을 듣고 여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고르십시오. 띠링.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공연이라고 했는데 시낭송회라니 막막했다. 그녀의 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중간에 나가고 싶은 욕구가 컸지만 참았다.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데 갑자기 나가는 사람을 보면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나도 내 시를 낭송하는데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지상정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시낭송회라 하니 생각나는 과거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 시 창작 학회에 가입했었다. 과 생활을 잘 하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했던 과 생활이었다. 하지만 낭송회 때 내 시를 읽으면서 영혼의 부재를 느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시를 발표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시를 읊지 않고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를 읊었다. 자신의 시 하나하나 마음을 담아 강렬한 음성으로 낭송하였다.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짓과 말,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다. 아마 시의 내용까지 알았더라면 이 순간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시낭송이 끝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꼬마 두 명이서 무대에 나와 악기를 연주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다들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카페 행사의 조미료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장기자랑 시간이 끝나고 백발의 부부가 무대로 나갔다.

그들은 여행자다운 옷차림이었다. 남자는 어깨까지 오는 흰색 곱슬 머리카락을 가졌고, 나시를 입고 황토색 알라딘 바지를 입었다. 여자는 머리에 꽃핀을 꼽고, 얇은 남방을 입고 화려한 장치마를 입었다. 그들은 태국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한 쌍의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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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여자의 손에 들려 있는 책에 좋은 구절이 있어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 다만 독일어로 된 책이라 여자가 독일어로 말하면 남자가 영어로 번역해 주는 방식으로 책 내용을 말해주었다.

주 내용은 ‘행복이란?’이란 물음이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행복의 출발은 나부터 아는 건가. 수많은 물음이 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나는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나는 왜 있고,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나는...

질문에 대답하기엔 나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복잡한 인생을 어떻게 단어 몇 개로 명명할 수 있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받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고민하는 시간이 헛될 것 같았다.


“Who are you?”


너는 누구인가. 너, 너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이 질문을 받고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Before Sunrise』라는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로맨틱한 이야기로 가득한 영화였다. 두 남녀가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하루 동안 연애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서로 주고받은 말이 마음을 찡하게, 아련하게, 먹먹하게 할 때가 많았다. 그중 여주인공 셀린느가 했던 말이 여전히 내 맘을 후벼팠다.


“If there's any kind of magic in this world, it must be in the attempt of understanding someone, sharing something. I know, it‘s almost impossible to succeed, but...who cares, really? The answer must be in the attempt.”


만약 이 세상에 마법이 있다면, 그건 서로를 이해하고 공유하려는 시도에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성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그래도 누가 신경 쓰겠어? 답은 그 시도에 있는 거야.


시도라는 말에 매료되었다. 그래, 내가 누구이고, 너가 누구인지 이렇게 추측하려는 시도에 의미가 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너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 심지어 우리는 태어날 때 따로따로 태어나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똑같은 삶이란 있을 수 없고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래도! 우린 서로 이해하며 살려고 한다. 답은 그 시도에 있는 거다.

행복도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 웃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불행을 인정하고 불행도 안을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일 것이다. 그렇게 나와 당신은 행복을 찾아서 여행을 떠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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