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어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날, 친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나 21일에 출장 가]
21일까지 9박 정도 남았었다. 오늘 자고 나면 8박 남았다. 아직 나는 빠이에 있었다.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여행하려고 했었는데 차질이 생겼다. 아직 치앙마이, 치앙라이를 가지 못 했다. 그렇다고 도시 하나를 포기할 순 없었다. 특히 치앙라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고양이들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언니에게 알았다, 그때 맞춰서 방콕에 가겠다고 답장했다.
방콕에 돌아가면 다시 식모의 삶으로 돌아갈 테지. 식모의 삶이 나쁘진 않았지만 나만의 시간이 없었다. 아침에 바닥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고양이들과 놀아주면 금세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 문화생활은 즐겨줘야 하지 않는가)
저녁을 준비할 때면 전업주부가 얼마나 힘든지 체감한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면 진이 빠진다. 어느 날은 저녁으로 연어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기 위해 부랴부랴 근처 마트에 가서 연어를 사 왔다. 태국에서 연어는 의외로 저렴했다. 특히 지느러미만 모아놓은 부위가 유난히 저렴했다. 언니가 퇴근하기 30분 전에 집에 무사히 귀환했다. 그때부터 연어 지느러미로 요리를 시작했는데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연어만 굽는 게 아니라 당근, 감자, 양파 등 채소도 굽기 위해 씻어야 했다. 씻고 먹기 좋게 썰어야 하는데 시간 소모가 컸다. 언니가 도착했을 때는 감자를 썰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언니는 배고프다고 하고, 나는 잘 차려 먹고 싶고. 스테이크만 먹는 게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샐러드도 먹고 싶었다. 샐러드용 채소도 씻고 물기 털고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언니가 도착한 지 2시간 뒤에 연어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이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하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21일에는 다시 식모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은 여행 기간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알차게 보내기 위해 일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고민했다. 빠이 야시장을 구경하며 생각에 잠겼다. 치앙마이는 내일 떠날 거고, 치앙라이에 며칠 동안 머물지 결정해야 했다. 치앙라이는 야간 버스를 타고 20일에 도착하면 숙박비가 절감된다. 그래, 치앙마이는 5박, 치앙라이는 2박을 하면 된다. 치앙마이를 5박으로 정한 이유는 다른 이유 없었다. 단지 과거를 회상하며 걸었던 거리와 걷지 않았던 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마침 주말이 껴 있어서 토요 시장, 일요 시장 둘 다 구경할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칠쏘냐.
빠이에서 치앙마이에 가기 위해서 버스와 벤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벤은 버스보다 2배 정도 비쌌다. 나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버스는 예약하는 게 아니라 선착순이었다. 하루에 한 대만 다니는 거라 버스를 놓치면 하루를 버리게 된다. 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타고 싶었다. 하지만 버스가 도통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방광도 움찔움찔했다.
버스 정거장 근처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용료가 5바트나 되었다. 버스는 언제 올지 몰랐다. 그렇다고 화장실은 안 가면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위태로워졌다. 심즈의 심처럼 볼일 안 봐서 실수하면 당장 씻을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 시간만 창피하고 마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난 버스를 놓칠까 봐 신속하게 화장실에 가 방광을 비웠다. 미션 임파서블 영화를 찍는 것처럼 1분 1초가 아쉬웠다. 그렇게 급하게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심지어 난 볼일이 다 안 끝난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아침으로 국물 있는 음식을 먹질 말걸. 가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버스를 못 탈까 하는 걱정 때문에 방광도 민감해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때부터 화장실 가고 싶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며 마음을 다스렸다. 또 화장실을 가고 싶었지만 5바트를 또 주고, 볼일 보다가 버스를 놓칠까 봐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참고 참았다. 생각 외로 참을 만했다.
버스는 1시가 다 되어서 도착하였다. 원래는 12시에 도착이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너도나도 이 버스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난 일행이 없었기 때문에 내 몸 하나만 실으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함께 타야 하는 일행이 있어서 일행이 못 타면 내리는 상황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버스를 탔다. 휴. 쟁취란 언제나 달콤했다. 안타깝게도 타지 못한 사람들은 벤을 탔어야 했다. 그런데 왜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은 커플인가.
내 앞에 앉았던 커플의 애정행각이 심했다. 눈꼴 시렸다.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뽀뽀하고, 키스했다. 포옹하며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내가 정말 보수적인가 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대강 감은 왔다. 치앙마이 가는 길은 길었기에 나는 그들의 대화를 상상하며 애정행각을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천장에 선풍기가 돌아가는 동남아 스타일의 마을버스 안. 좌석은 이곳저곳 헤지고 먼지가 묻어 있다. 스포티한 머리 스타일에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 한 명과 긴 금발의 히피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남 : (여자의 목덜미를 손등으로 쓸어 만지며) 너의 목덜미에 키스하고 싶어.
여 : (살짝 치켜뜨며) 뭐라는 거야.
남 : (여자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지며) 너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
여 : 내 입술은 여기에 있어. 해 볼 테면 해 봐.(피식 웃는다)
남 : 진짜 할 거야? (맹수처럼) 어흥! (여자의 입술에 키스한다)
여 : (놀라며) 어머! 장난꾸러기!
남자는 창밖을 바라본다. 손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여자도 남자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본다.
남 : 치앙마이엔 언제쯤 도착하려나? 얼른 숙소에 가고 싶어.
여 : 조그만 참아. 출발한 지 5분밖에 안 되었잖아.
남 : (여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너랑 누워 있고 싶어.
여 :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도.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입을 맞춘다.
남 : (여자의 손등을 만지며) 이렇게 너와 함께라 정말 기뻐.
여 : (약간 높은 톤으로) 지금 프로포즈하는 거야?
남 : 엘리자베스, 나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여 : (볼이 살짝 빨개지며) 참.
남 : (씨익 웃으며) 사랑해.
여 : 나도.
또 남자와 여자는 입을 맞춘다.
기승전키스였다. 똑같은 레파토리에 지겨워 바깥을 보았다. 저렇게 연애를 하는 것도 재밌어 보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하는 게 부러웠다. 아직 연인과 함께 여행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 로망이었다. 싸울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그건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나도 저렇게 찐하게 연애해 보고 싶다. 정열적인 사랑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 영화 같은 영화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랬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 갑자기 현타가 온다. 글을 쓰다 보면 현타가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금이 이렇다.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자기 성찰하고 있다.
혼자 여행하면 더욱 현타가 잘 온다. 혼자 걸으면서 좋은 풍경을 보면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외국인 커플이 부러웠다. 그저 풍경을 보아도 함께이기에 더욱 감명 깊을 것이다. 그리고 「아트 인 차이」에서 본 노부부도 함께였다. 행복해 보였다. 그 당시엔 단순하게 부럽다는 감정이었다면 지금 와서 글을 쓰니 단순하게 부럽지만 않았다. 격하게 부러웠다.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말이다.
하지만 혼자 여행할 때 외로울 때 친구가 다독여주었다.
“혼자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어.”
그 말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맞는 말이었다. 혼자이기에 볼 수 있었던 풍경이 많았다. 함께 다녀서 좋은 게 있다면 혼자라서 좋은 게 있었다. 나는 이미 혼자 여행하는 데 익숙해졌다. 누군가와 여행을 다니는 게 가끔 두렵기도 했다. 싸우면 어쩌지 하는 그런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이렇게 고민할 바엔 혼자가 편했다. 친구의 조언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기승전키스면 어때. 난 기승전여행이다. 치앙마이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