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세상은 넓다고 했냐?
#1
치앙마이에서 머물 날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슬슬 나는 치앙라이로 떠나는 버스티켓을 끊어놔야 했다. 시내에서 터미널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에 골치가 아팠다. 썽태우를 타야 하는데 썽태우 기사는 나를 미치게 하는 방법 100가지는 아는 것 같았다. 대강 가는 비용이 얼마인지 아는데 자꾸 터무니없는 요금을 말했다.
썽태우 기사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대강 말을 섞으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외국인은 못 본 척 무시하는 기사들이었다. 살인적인 더위에 기껏 썽태우를 세워서 행선지를 말하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갔다. 심지어 어떤 썽태우 기사는 차도 안 세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
두 번째는 나의 행선지까지 들어주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내 발음이 이상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떠났다. 데이터 충전이 다 떨어져서 검색도 못 하고 떠나보낸 썽태우가 여러 대가 된다.
세 번째는 바가지 씌우는 기사들이었다. 분명 2~30바트면 가는 곳을 무조건 100바트 이상부터 불렀다. 현지인과 다른 생김새라 당하는 바가지는 나를 미치게 했다. 세계 어딜 가도 외국인에게 바가지 씌우려는 현지인은 있다. 그래도 너무 심했다. 썽태우를 나만 타는 게 아니라 행선지가 비슷한 사람들도 태우는 시스템인데, 나한테서 뽕 뽑으려고 한다니,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그늘진 벤치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떤 외국인 한 명이 가게에서 나와 청소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내가 이름은 잘 기억 못 해도 얼굴은 대강 기억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낯익은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더라, 어디서? 누구지? 하며 혼란스러워할 때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를 알아보는 낌새였다. 하지만 상대방도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은 것 같았다.
‘저 얼굴, 어디서 봤는데... 빠이에서 봤나? 분명 우리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지? 누구지?’
우리는 약 30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입을 뗀 건 그였다.
“How are you?”
그의 억양을 듣자마자 쓰나미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만났던 장소부터 대화를 나누었던 장소, 무엇을 했는지 등 생각났다.
때는 2011년, 10월이었다. 당시 나는 인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막 라자스탄 지역을 돌고 뉴델리에 돌아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때였다. 게스트하우스 옆에 바로 보석 가게가 있었는데 나는 라자스탄에서 주워온 작은 돌을 목걸이로 만들고 싶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인도 상인 특유의 친근함으로 서로 통성명하고, 볼일을 보았다.
“이걸 목걸이로 만들고 싶어요. 가능한가요?”
“당연하죠. 줄은 다양하게 있는데 어떤 색을 원하세요?”
황토색 돌에 어울리는 색을 같이 골랐다. 줄을 돌에 대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았다. 그리고 그 줄을 땋아서 돌과 엮었다. 그러면서 보석 관련 도감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주워온 돌은 그냥 단순한 돌이라며 어디서 주웠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라자스탄 지역에 가서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 그 순간을 추억하고 싶어 바로 밑에 있던 아무 작은 돌을 주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이야기한 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그저 눈인사하는 사이였다. 그게 우리의 인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Yes please guesthouse?”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욱 반가웠다. 나는 단박에,
“Yes!”
5년이 지나 다시 그를 만났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세상이 좁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가게에 들어갔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는 인도에서의 근황을 물었다. 그때 이후로 인도를 다시 여행한 적이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온 뒤로부터 인도에 대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 인권 문제가 불거져 국제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그도 그 현실을 절감했다. 외국인 대상으로 장사하던 보석 가게는 손님이 부쩍 줄어들었고 사업이 약간 위태로워졌다. 결국 그는 형과 떨어져 외국인이 많은 태국으로 와 보석을 팔기 시작했다.
나처럼 이렇게 마주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단순하게 가게 위치를 바꿔 장사하는 게 아니라 거주하는 나라를 바꿔 가게를 연 것이기 때문에 너무 궁금했다.
“한 명 있었어요. 이스라엘 남자였는데 저는 기억 못 하는데 그는 저를 기억하더라구요.”
“저는 기억하나요?”
“당연하죠! 그때 만들어 준 목걸이는 잘하고 있어요?”
“네. 이번 여행에는 안 챙겨 왔지만, 종종 하고 다녀요.”
세상 정말정말정말 좁구나. 나는 이 우연이 이어준 인연을 새롭게 추억하고 싶었다. 그는 보석을 파는 상인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여행자였다. 나는 100바트에 살 수 있는 목걸이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목걸이를 주었다. 어떤 보석인지, 가격이 얼마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100바트보다 저렴하면 어떠하고, 비싸면 어떠한가. 추억이 중요했다. 우리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2
목걸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은 인연이었다. 그 목걸이를 하고 난 뒤부터 계속 웃음이 나왔다. 만약 내가 썽태우를 타고 바로 버스터미널로 갔다면 그를 영영 못 봤을 수도 있다. 만약 그가 그 시간에 청소하지 않았다면 나를 마주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인연의 목걸이를 해서 그런지 그날 치앙라이행 티켓을 끊고 썽태우 정거장으로 가니 빠이에서 만났던 외국인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치앙라이를 다녀왔다며 화이트탬플이 좋았으니 꼭 구경하라고 강조했다. 나는 치앙라이의 랜드마크인 화이트탬플을 꼭 보겠노라 약속하고 헤어졌다.
목걸이를 했다고 실상 크게 바뀌는 건 없다. 다만 우연히 또 마주친 인연이 고마울 뿐이었고, 이 목걸이를 할 때마다 조금 더 인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다. 라자스탄에서부터 뉴델리까지, 뉴델리에서 치앙마이까지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왔다. 이게 여행의 묘미였다. 내가 좋아하는 프렌치프라이로 비유하자면, 여행에서 만난 사람은 케첩, 마요네즈 같은 존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스는 마요네즈이지만 그 마요네즈가 없다고 프렌치프라이를 먹지 못하는 게 아니었고, 다른 소스를 맛보게 될 수 있다. 여행은 프렌치프라이를 더욱 맛있게 먹기 위한 몸부림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