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 위아 위 아티스트 베이베
나의 주요 고객은 타패 게이트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들이었다. 이거 그려달라, 저거 그려달라 관심이 많았다. 사진을 보며 나의 스타일대로 그림을 그려주면 좋아하며 짧은 영어로 예쁘다, 좋다며 감상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5바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예술가 조는 유별났다. 짧은 영어로 어디서 왔니, 무슨 일 하니,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니 등 질문을 했었고 그의 친구들 그림도 소개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를 자꾸만 친구라 부르는 게 아닌가. 우리가 서로 대화한 지 몇 시간이 되었다고 벌써 친구인가 생각이 들었다. 친구라는 단어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오해도 하게 되었다.
‘내가 동양인 여자라고 쉽게 보나?’
내 안에 있던 철벽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자꾸 치근덕거리는 게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그가 내일 작업실을 보여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에 밥이라도 먹자고 제안했다. 다른 사람도 동행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다음날이면 치앙라이로 떠나니까 그들과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쉬웠다.
자정이 되어도 정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조에게 몇 시에 갈 거냐고 물어보니 이제 가자며 그만 짐을 싸고 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다들 함께 먹지 않았다. 조와 단둘이 가는 거였다. 곧바로 합리화했다. 작업실 보러 가는 것보다 건전하다고. 나도 재빨리 정리하고 조를 기다렸다. 조는 다 정리하고 오토바이를 타려고 했다. 그가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아까까지 보았는데 그는 음주운전을 하려고 했다. 거기다가 나를 뒤에 태우려고까지 했었다. 나는 곧바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까 맥주 마셨잖아요. 운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걸어가죠?”
“괜찮아요. 타요.”
“음주운전 싫어해요.”
“알았어요.”
알았다는 말은 오토바이를 놓고 간다는 의미라 생각했는데 오토바이를 끌고 식당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하고 고마웠다. 내가 뭐라고 잔소리하지만 않았으면 그는 편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식당에 도착했을 것이다. 고마웠던 부분은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오토바이를 끌고 갔다는 점이었다.
로컬 식당에 도착했다. 이미 문 닫은 시장 밖에서 국수를 파는 식당이었다. 국수 두 그릇을 시켰다. 나는 그가 자꾸만 나를 Friend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게 거북했다. 참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왜 자꾸만 친구라고 해요? 저는 당신의 여자 친구가 아니잖아요.”
“제가 친구라 말하는 건, 당신도 예술가고 나도 예술가니까 서로 친구라는 거예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굴이 발개졌다. 그가 단순하게 꺼낸 친구라는 말을 오해했다. 가슴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치근덕거리는 현지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그런 모자란 남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나는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아침이 되어 부랴부랴 짐을 다시 꾸렸다.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던 어제, 타패 게이트 친구들이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줬다. 온전하게 한국 집까지 챙겨가고 싶었다. 그리고 버스터미널까지 조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탈 테니 역시나 짐을 야무지게 꾸려야 했다.
타패 게이트로 나왔다. 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짐을 내려놓고 게이트를 한 번 훑어보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한국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태국을 밟아볼지 막연한 곳이었다. 한 번 돌아다닐 때 후회 없이 돌아다니고, 이제 여행은 지긋지긋하다며 되뇌어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유독 이번 여행에서 헤어짐이 아쉬웠던 건 친구들과의 이별과 더불어 돈과의 이별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여전히 그는 나를 보고 웃으며 친구라고 말했다. 나는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갈 수 있을까 물었고, 그는 끄떡없다고 말했다. 반락타이를 갈 때처럼 가파른 도로도 아니었으니 짐을 잘 메고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래 봬도 오토바이 뒷좌석 짬밥이 오래되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실으려는 그때, 그는 내가 배고플까 봐 카우람을 주었다. 대나무 통에 달콤한 밥을 찐 건데 버스 안에서 맛있게 먹었다. 또 먹고 싶은 마음에 치앙라이에서도 몇 번 더 사 먹었다. 먹을 때 대나무를 일일이 벗겨야 하고 진득진득한 찰밥이 손끝에 묻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매번 사 먹는 이유는 맛있기 때문이었다. 안에 콩이 들어간 것도 있었는데 그건 꽤 고소했다. 엄마가 콩밥을 해 줄 때는 우리 집이 감옥이냐며 칭얼거렸는데 태국에서 먹는 콩밥은 맛있기만 했다.
버스터미널까지 별로 안 걸렸다. 썽태우를 타고 갈 때는 엄청 멀리 있다고 느껴졌는데 오토바이 타니 타패게이트에서 금방이었다. 썽태우를 생각하니 또 바들바들 떨렸다. 썽태우 기사들...(부들부들)
조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이메일을 건네받고, 버스를 기다렸다. 치앙라이는 처음 가 보는 곳이라 다른 도시를 갈 때보다 설렘이 컸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보던 화이트 탬플을 보게 되는구나 싶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조가 적어준 이메일 주소를 확인했다.
‘얘, 뭐지?’
이메일을 적어줬는데 아무리 봐도 @가 없었다. 심지어 도메인 주소도 없었다. 그는 도대체 나를 무엇을 적어준 건가. 아이디만 덩그러니 적어주었다기엔 너무나도 길었다.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왜 이렇게 적어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바람 같은 친구였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조를 알고 있다면 안부를 대신 물어주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의 그림은 어떠한 존재인지 치앙마이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을 판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어릴 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는 곧잘 만화를 그렸고, 코믹월드를 챙겨갔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괜히 부러웠고,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은 그림을 보면서 가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림으로 작은 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을 때 나쁘진 않았기에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꿈꿨다. 부모님께 예고를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Yes or No가 아닌 나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겠어?”
이 질문이 나의 미래를 다시 설계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중학생 권진하는 만화가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만화책에서의 내용으로만 알고 있었다. 마감 독촉에 시달리고, 고된 근무환경에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체는 나와 매우 달랐다. 주변 친구들도 나보다 잘 그렸다. 그림 실력도 평범한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나를 좀 잡아먹었다. 수많은 생각 끝에 보통 친구들처럼 인문계에 가기로 마음먹고 연합고사 기출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만화가의 인생을 꿈꿨던 나는 다른 인생을 꿈꾸었다. 윤리 선생님, 시인 순으로 꿈꾸다가 작가가 되자는 생각에 구성작가가 되었다. 막내작가였지만 구성작가를 살짝 맛을 본 것으로도 힘들었다. 친구 K가 최저임금도 챙겨주지 않고, 퇴근이 없는 직업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욕할 때 함께 욕했고, 친구 J가 휴가는 언제냐며 놀러 가자고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휴가가 없다고 매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구성작가 일을 도망치듯 나온 나는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는 사실에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지금은 그림과 글을 쓰면서 나만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크다. 이렇게 생각한 건 치앙마이 때부터 조금씩 나의 그림에 자신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 글을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디에나 있고, 그 예술 속에 내가 숨 쉬고 있다. 여전히 나는 그 풍경에 내가 예술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