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방콕으로
카톡을 보내고 나니 핸드폰은 전원이 꺼졌다. 나의 첫 번째 실수(바데리를 아끼지 않았던 것)로 위급할 때 핸드폰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불안해할 언니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차라리 연락하지 말걸 그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짐을 챙겨 버스 밖으로 나갔다. 내 차례가 되어 나가보니 버스 앞 유리가 와장창 깨져 있었다. 유리를 조심조심 피해 걷다가 실수로 유리조각 하나를 밟았다. 두 번째 실수(슬리퍼를 신었던 것) 때문에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부터 유리조각이 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짐칸으로 가 내 배낭을 꺼내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도로로 올라와 버스를 보니 가관이었다. 앞 유리는 다 깨지고, 앞 좌석 유리는 멀쩡한 것에 비해 뒷좌석 유리는 처참했다. 뒷자리가 제일 위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되도록 뒷자리는 타지 않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사고가 난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버스 기사와 차장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현지인 승객 중에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외국인들끼리 모여 추측할 뿐이었다.
1. 운전기사가 졸았다.
2. 도로 위에 있던 돌이 앞 유리를 과격했다.
3. 나뭇가지에 부딪혔다.
다양한 추측이 있었지만 유력한 의견은 나뭇가지가 앞 유리에 부딪혀 기사가 놀라 논두렁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사고가 난 지 1시간이 지나자 경찰과 응급차가 왔다. 피를 흘리던 외국인 여자가 1순위로 응급차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리고 조금씩 다친 승객이 차례로 치료받았다. 나도 발바닥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발바닥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계속 따끔따끔한 건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기우라고 여기고 돌아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예비 버스가 언제쯤 도착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국인 승객 중 한 명은 오후에 돈므앙 공항에서 끄라비로 간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늦어질까 봐 불안해하였다.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그 승객은 버스 기사에게 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버스 기사는 손짓, 발짓으로 돈므앙 공항 근처에 먼저 내려주겠다고 했다. 그의 불안감은 해소되었다. 다만 1시간 뒤에 도착한다는 예비 버스는 2시간이 지나도, 3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싶어 외국인 몇 명은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너무 졸려서 뭘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배낭을 베개 삼고, 담요를 이불 삼아 도로 위에서 잠을 잤다. 졸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현지인과 외국인 승객 몇 명도 졸린지 나처럼 잠을 청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도로 위의 난민이 되어 새벽 4시까지 있었다.
도로 위의 난민이 되었지만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았다. 차장은 끊임없이 물과 과자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땐 미니 벤이 근처 주유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럴 바엔 얼른 예비 차량을 공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조금 몸이 편안해지니 심하게 다친 외국인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응급처치는 받았지만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버스 회사에서 보험 처리를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 버스가 논에 빠졌을 때도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았었다. 기름이 유출되어 폭발할 수 있어서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고 밖에 나와서도 사람들은 차에서 멀리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근처에서 상황 파악하기 바빴다. 안전불감증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예비 버스가 도착했다. 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사고 나서 논에 빠진 버스를 타는 게 더 안전해 보였다. 수난과 역경이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버스가 논에 빠진 것부터 고속도로 위에서 쪽잠을 자고, 폐차되기 직전처럼 보이는 버스를 타야 하는 것까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했다.
정오가 넘어서야 방콕에 도착했다. 돈을 아끼겠다던 나의 여행 모토는 도로 위의 난민이 된 순간 싹 사라졌다. 거지 같았던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살아서 왔는데 또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갈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곧바로 난 택시를 잡고 언니 집으로 갔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언니에게 인사했다.
“살아서 왔어.”
마지막까지 다이나믹했던 태국 북부 여행은 20일 만에 끝났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은 4가지였다. 첫째는 돈이 최고라는 것이었다. 돈이 많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서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돈과 스트레스받는 정도는 반비례했다. 비누 하나를 살 때도 10바트 차이에 바들바들 떨지 않아도 되고, 썽태우 바가지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OK!”를 외쳐도 된다. 그리고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번 여행의 모토가 돈을 절약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여행 컨셉에 질색할 정도로 싫진 않다는 게 내 문제점이기도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꼼꼼히 가격을 확인하고, 걸어 다니면서 마주친 사람들, 보게 된 풍경이 생생했다. 앞으로도 여행하게 된다면 돈을 아끼고 싶다. 이렇게 최대한 도피 여행을 하고 싶은 게 나의 바람이다.
둘째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안전이 최고였다. 버스사고 이후로 며칠 동안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그 후유증을 극복하고 버스를 타기까지 성공했지만 버스가 조금만 흔들린다 싶으면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야간 버스는 최대한 타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나에게 큰 사고로 기억되고 있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였다. 불의의 사고로 죽는 건 순간이었다. 몇 년 전에 우간다의 진자라는 곳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나일 강 래프팅을 하다가 물에 빠져 보트 밑에 깔리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대로 익사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는 사고를 대비하여 유서와 보험은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셋째는 사람과 친해지기는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름 내가 사교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사람들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한 내 모습을 보니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해보면 큰 스트레스이진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라며 위안을 가졌다. 다만 100% 내가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와 친한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이렇게 친해지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넷째는 여행할 때 짐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홍손에서 만난 미국인 베리한테서 배운 점이다. 짐은 가벼울수록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다음 여행에서는 최대한 배낭을 가볍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옷을 여러 번 입어야 하고, 손세탁을 자주 해 줘야 하지만 배낭을 가볍게 하기 위해선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세면도구, 옷 몇 벌, 필기도구 정도면 충분하다. 앞으로의 여행에서는 가볍게 여행할 수 있길 바란다.
#6
사람들이 나의 여행기를 읽고 어떤 에피소드가 가장 재밌었을지 궁금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20일간 여행이었다. 나름 나대로 인상적이었던 순간 TOP3를 꼽아보았다.
3. 베르가모트 마사지
2. 방갈로에서 들리던 신음
1. 반락타이 호수
3위는 베르가모트 마사지다. 다시는 베르가모트가 들어간 어떠한 것도 하지 않으리. 충격적인 추억이었다. 나에게 베르가모트는 욕이었다. 이런 베르가모트 같은!
2위는 방갈로에서 들리던 신음이다. 이런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듣겠는가. 심심하던 일상을 재밌는 일상으로 바꾸어주었다.
1위는 반락타이 호수다. 평화로운 호수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지금은 아련해진 추억이지만 그 단어는 내 가슴에 박혀 반락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행복해진다.
#7
여행기가 도움되었으면 좋겠지만 욕심일 것 같아 그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경험을 한 사람도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준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도피 여행을 떠나고 싶어 궁리하고 있다. 다음 여행기를 기대해도 좋다.
돈이 많냐고 물어본다면, 비록 모아둔 돈은 친구들보다 적을지 몰라도 없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