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매홍손이 사람 잡네

매홍손하면 트레킹이지!

by 진하하하하

#1

방콕에서 매홍손으로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야 했다. 짜뚜짝 시장으로 유명한 모칫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모칫 터미널에서 매홍손행 버스 티켓을 예매할 수 있다.

버스는 클래스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최대 탑승 승객수가 적을수록 가격이 비쌌다. 덩치가 큰 사람이라면 비좁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버스를 예매할 때 맨 앞 좌석을 고른다. 다리 밑에 간단하게 짐을 놓으면 앞사람한테 피해가 가지 않고, 창문 밖 풍경도 적당히 잘 보인다. 하지만 의자를 뒤로 눕히지 못할 때가 있다. 이번 경우도 그랬는데, 덩치 큰 외국인 남자가 카메라 가방을 내 의자 뒤에 놓았기 때문에 뒤로 젖혀지지 않았다. 매홍손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고 긴데, 이 사람이 정말...


#2

우등 버스를 타면 우리나라와 다르게 담요를 챙겨준다. 에어컨 바람이 꽤 강하기 때문에 춥기도 하지만 밤에 특히 더 춥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때문에 나는 여분의 담요나 옷을 챙겨놓는다. 그걸 덮고 자면 세상 모르게 잠을 잘 수 있다. 하지만 난 지금 방콕에서 매홍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2시간 이상이 걸리는 장거리 버스는 좀 쑤시기에 십상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홍손은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편안하지 않았다. 꼬불꼬불 뱀처럼 무자비한 도로 위를 달려야 했다. 다행히 뒤에 있었던 외국인은 한참 뒤에 내렸다. 나는 멀미를 하는 대신 의자를 젖히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구토 소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웩하는 소리는 귀를 막으면 되었지만 스멀스멀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창문이라도 열고 싶었지만 열리지 않는 고정창(붙박이창)이었다. 제발 구토를 멈춰 주세요.


#3

꾸역꾸역 매홍손에 도착했다. 내 속을 뒤집어 놓았던 버스에서 드디어 도망칠 수 있다는 희열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환한 잇몸 미소를 보여주며 점심 햇살을 느꼈다. 생각보다 늦어진 도착 시간에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오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한심스러웠다. 머물 곳이 없으면 비싼 데서 자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머물고 싶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오직 하나였다. 이름도 거창한 프린스 게스트하우스였다. 예약하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연락처를 찾아보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프린스라는 이름에 대조적인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숙소도 비교적 깨끗했고, 공용 테라스로 나가면 연못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에 제격인 그곳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름이 바뀐 것뿐이라 여기며 그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프린스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야 할 곳에 다른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매니저는 대머리 외국인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풍경에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프론트에 가 방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싱글룸이 있는데 400바트라고 한다. 여행 첫날부터 큰돈을 쓰기가 뭐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프린스 게스트하우스에 대해 물어보았다.


“혹시 여기가 예전에 프린스 게스트하우스이지 않았나요?”

“네, 지금은 이름을 바꿨어요. 주인이 바뀌었거든요.”


매니저의 얼굴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약간 곱슬기가 있는 흰색 장발 할아버지 같았는데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 나는 그저 편하게 쉴 수만 있으면 장땡이었다. 그는 내가 머무는 동안 마주치지 않았다.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할 때 빼고는 말이다. 잠시 1박 2일로 트래킹을 하고 오겠다며 짐을 맡겼을 때가 가장 길게 대화했었다. 연못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할아버지는 평온한 오후를 보냈을 게 상상되었다. 그가 보았던 잔물결에 비친 햇살은 수없이 많을 텐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당신이 없는 게스트하우스는 이름이 바뀌고 구조도 조금씩 바뀌었다. 난 아쉬움을 프린스 게스트하우스에 묻고 나왔다. 늙은 왕자는 사라지고 대머리 왕자가 차지한 그 게스트하우스를 말이다.


#4

새로운 게스트하우스를 물색했다. 둘러 보니 꽤 괜찮아 보이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400바트보다 저렴한 싱글룸을 찾기로 했다. 그러다가 조식 제공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가격은 250바트였다. 400바트보다 저렴했다. 대신 공용 화장실이라는 점이 거슬리긴 했지만 화장실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이틀 머물 거라 500바트를 냈다.

이틀 동안 나는 예전에는 가 보지 못한 곳을 찾는 재미와 변해 버린 풍경을 알아차리는 재미를 누리려고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매홍손보다 북쪽에 빵웅, 반락타이라는 곳이 있었다. 꽤 인기 있는 관광지였는데 아름다운 풍경이 날 매료시켰다. 특히 물안개가 자욱하게 껴 몽환적인 분위기는 내 폐 속까지 사늘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다. 이곳. 꼭 가야 한다고 맘을 먹었다. 투어 신청을 할까 생각하고 여행사를 찾으니 1,200바트에 단독 투어를 제안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닌다 한다. 오토바이 투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가격이 나빴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로비에 가니 외국인 한 명이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빵웅과 반락타이를 보았냐고 물어보았다.


“혹시 빵웅과 반락타이 가 봤어요?”

“네, 진짜 좋더라구요.”

“어떻게 가셨어요?”

“오토바이 타고 갔어요.”


이놈의 망할 오토바이는 내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토바이 타지 못하는 뚜벅이는 오늘도 웁니다.


#5

심란한 몸뚱이를 끌고 향한 곳은 선셋 포인트로 유명한 왓 프라탓 도이 꽁무로 향했다. 걸어서 가는 코스와 자동차를 타고 가는 코스 두 가지가 있다. 나는 불쌍한 뚜벅이, 오늘도 걷는다. 예전에도 올라간 적이 있던 길을 다시 걷다 보니 심기가 불편했다.


‘제기랄, 오토바이만 탈 줄 알았으면 이딴 길 안 올라가도 될 텐데.’


꾸역꾸역 다 올라와 사원을 둘러보았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이었다. 사원 뒤편에 비포 선섹 뷰 카페가 있는데 명당이라고 구글 지도에 적혀 있었다. 난 때맞춰 거기로 가 차이티를 시켰다. 붉은 주황빛이 노을과 비슷했다. 차를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다. 확 트인 시야와 석양이 물든 산들이 아름다웠다. 해가 지고 뜨는 현상은 그저 순리였다. 내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는 것도 그저 순리인 게 아닐까. 내 능력 밖의 일을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조금만 더 연습한다고 나아질까. 어떻게 해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쳐도 사고가 난다면 책임질 수 있을까. 그냥 저 석양이 사라지는 것처럼 나 자신을 이해해주고 싶다. 조금은 억울하지만, 오토바이에 대한 욕심을 놓기로 했다. 그냥 가 보는 거다.


#6

해가 다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슬슬 사원을 빠져나갔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다른 길로 가보자며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가는 길로 걸어갔다. 평탄한 도로이다 보니 계단보다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근데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더라.


예전에 매홍손에서 트래킹을 했을 때도 똑같은 기분이었다. 막연함.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그 트래킹은 나에게 버거웠다. 없는 길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이드가 일부러 길이 아닌 길만 찾아서 가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트래킹이 뭔지 제대로 몰랐던 그 당시에 왜 내가 자꾸 걸어야 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가이드북에서는 매홍손에서 트래킹은 강추하는 투어 중 하나였다. 자연을 보고 즐길 수 있다길래 신청했지만 자연을 보고 즐기긴커녕 자연을 욕하는 내 모습만 있었다. 가이드가 나에게 건네준 묵직한 나무 막대기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스페인 성지순례를 해 본 적이 없지만 하게 된다면 트래킹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도착하는지, 도대체 이걸 왜 신청했는지, 도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지. 도대체 난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마음속에 맴돌던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언제 도착해요?”

“좀만 더 가면 됩니다.”


또 튀어나왔다.


“언제 도착해요?”

“좀만 더 가면 됩니다. 힘들어요?”

“네.”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가이드는 그저 웃을 뿐. 계속 걸었다. 걷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폭포 근처에서 밥을 먹고 수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수영할 거란 이야기가 없지 않았나? 여벌 옷을 챙겨오지 않아서 발만 담갔다. 같이 투어한 캐나다 출신 식물학자는 홀라당 벗고 뛰어들었다. 남자는 이럴 때 쉽게 벗고 수영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가 수영을 원 없이 한 다음에서야 다시 길을 나섰다. 에휴.

가파른 산만 타다가 평지가 보였다. 순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미 내 다리는 녹초였다. 갑자기 가이드는 넓은 잎사귀를 뜯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변환_3.jpg

“이건 샴푸로 대신해서 쓸 수 있어요. 머리 감을 때 써 보세요. 거품이 나요.”


잘 못 들었나 싶었다. 트래킹 가격이 비쌌는데 그 이유가 있었나. 자연 친화적 트래킹이기 때문에 비쌌던 건가. 가이드는 초록 알맹이가 달린 잡초를 뜯더니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우리가 오늘 먹을 저녁입니다.”


자연에서 채취한 것을 씻고 먹는다니 원시적이다. 이런 경험을 언제 해 보겠느냐. 그래, 돈 주고 이런 경험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중에 언니에게 말해 줘야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우리는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식사 준비를 하고, 씻고, 밥 먹고, 잠을 잤다. 잠도 사방이 개방된 2층 나무집에서 잤다. 새벽에 추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해 놀랐다. 아침에 식사를 간단하게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거짓말이야. 또 그 길을 가야 해?’


다행히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다 보니 도착한 곳은 롱넥족 마을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코스예요. 고생하셨어요. 둘러 보시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세요.”


나이스! 드디어 끝이구나. 내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동양인 여성 3명이 보였다. 난 반가운 마음에, 드디어 한국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에서 오셨나요?”

“아, 아뇨. 저희 일본인인데요.”

“아... 그래도 반가워요!”


짧은 영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녀들은 트래킹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꽤 많이 힘들다고 조언을 해 주니 그녀들이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15일 트래킹하신 거예요?‘


네. 네. 15일 트래킹 같은 1박 2일 트래킹했습니다. 제길.

롱넥족 마을 구경이 끝나고 우리는 차에 올랐다. 차로 15분 달리니 도착한 매홍손 시내. 난 어리둥절했다. 1박 2일 동안 걸어서 우린 뭘 한 것일까. 차로 15분 거리를 서성거린 건 아닌가 회의감이 들었다. 걸어서 뭐하노. 차가 있으면 금방인 거리인데.


왓 프라탓 도이 꽁무를 내려오면서 트래킹을 추억하다 보니 이미 어두운 밤이 되었다. 주변에는 차가 가끔 지나가지만 갈길 바쁜 차들뿐이었다. 히치하이킹 할까도 생각했지만 어두워서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차에 치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태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계속 들었다.

매홍손에서 트래킹을 한 뒤부터 가파른 길을 걷는 게 싫어했다. 심지어 등산도 싫어졌다.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힘들었던 등산을 다시 해야 한다니 내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인간은 편해지기 위해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자격이 있다. 자동차를 누려야 한다. 자동차로 못 가는 곳이라면 어쩔 수 없이 걷겠지만 인간이 힘들게 도로 포장을 했다면 그걸 써 줘야 한다. 선인이 날 시내까지 데려다줄까 내심 기대했지만 시내에 도착할 때까지 난 계속 걸어야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렇게 꾸역꾸역 걸어서 내려왔는데 내일 빵웅 가서 좀 걷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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