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내린 선물이네요
숙소에 돌아와 몸을 눕히기 전에 로비에 가니 외국인 3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인 베리, 중국인 우, 일본인 파울리였다. 그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었는데 미국인 베리는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의 주인공 휴 로리를 0.3초 닮았다. 50대 중반인 이 남자는 짓궂은 면이 있어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추파를 던질 때도 있지만 나는 웃으며 맞받아쳤다. 베리 옆에는 그에 못지않은 장난꾸러기 중국인 우가 있었는데 피부가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남자였다. 베리와 우는 서로 말이 잘 통했다. 우의 영어 실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영어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농담 따먹기가 쉬워 보였다. 일본인 파울리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나와 파울리는 경청하며 최대한 흐름을 따라잡기에 급급했다.
이들은 서로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험한데 그럴 강단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오토바이를 전혀 타지 못하는 나에게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오토바이 기행을 듣고 있자니 내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중국인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그녀가 이야기에 참여하면서부터 이야기의 흐름은 그녀 중심에 있었다.
“오토바이는 위험하잖아요.”
“조심하면 돼요. 그리고 타기 쉬운데.”
“북경에 오토바이가 많지만 사고가 잦아요. 그리고 사고로 죽은 사람도 많고요.”
“오토바이 운전 안 하시나 봐요?”
“네, 오토바이는 위험하잖아요.”
“맞아요! 오토바이는 위험해요.”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동지를 만났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나도 동지를 만나 반가웠다. 위험하면 안 타면 된다.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혹시 반락타이 가 보셨어요?”
“네. 오늘 거기 갔다 오는 길이에요.”
중국인 여자는 이미 반락타이를 다녀왔었다.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는 그녀가 어떻게 다녀왔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가셨어요?”
“썽태우 타고 갔어요. 하루에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아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 호수가 정말 예뻐요. 게스트하우스도 깨끗했구요.”
“아침 9시에 있는 썽태우 타고 가셨던 거죠?”
“어?”
나와 중국인 여자의 대화를 들은 베리가 끼어들었다. 그도 내일 반락타이에 갈 거라며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내일 반락타이에 갈 거라고 하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우가 한마디 던졌다.
“베리가 오토바이가 있으니까 같이 가면 되겠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정이 맞아 함께 다닐 여행자가 생긴다는 게 오랜만이었다. 비록 내가 영어는 잘하지 못했지만 베리가 월등하게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대강 어떤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반락타이 가는 길이 조금 험난할 수 있어 걱정은 되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괜찮겠냐고 물었고 베리는 웃으며 “Why not?”이라 대답했다. 이런 블루베리,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같이 달콤한 외국인 같으니라고. 본격적으로 몇 시에 출발할 것인지, 머문다면 게스트하우스는 어디가 괜찮은지 등 정보 교환의 시간을 가졌다.
아침 7시. 일어나자마자 짐을 정리했다. 오토바이 하나에 두 명이 탈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짐이 적어야 했다. 길이 가파르기도 하고, 급커브 구역도 있어서 무게 중심을 잘 잡는 게 중요했다. 백팩에 모든 짐을 욱여넣었다. 입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입었다.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난방 하나를 걸치기엔 쌀쌀한 감이 있었지만 내가 입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반락타이가 굉장히 아름다워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소리에 평소에 바르지도 않았던 CC크림을 바르고, 입술에 색도 칠해주고, 눈썹도 그려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렌즈도 착용했다. 인생샷을 건질 수도 있는 그런 곳에 가는 것이다. 이정도의 준비는 마땅히 해 줘야 한다.
아침 식사를 즐겁게 마치고 베리의 오토바이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베리는 내 옷차림을 보더니 “추울 텐데”라며 걱정했다. 그러면서 오토바이 의자를 열어 기모 후리스를 꺼냈다. 나에게 입으라고 건네주었다. 나는 고맙다며 그 옷을 입었는데 굉장히 따뜻했다. 겨울엔 역시 기모였다. 후리스를 입고 다시 백팩을 메려고 하니까 베리는 짐 전부 뒷좌석에 묶자고 했다.
“근데 베리, 당신 짐은 어딨어요?”
“여깄어요.”
축 늘어진 더플백을 가리켰다. 나보다 여행을 오래 했을 베리인데 짐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놀라웠다. 나는 도대체 뭐가 들었냐고 물었고, 베리는 지퍼를 열어 가방 속을 보여줬다. 수건, 칫솔, 치약, 속옷, 옷 2벌, 충전기가 전부였다. 와. 나는 전생의 업보를 등에 지고 살았구나.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을 보았나. 나는 다음 여행에는 짐을 최대한 줄이겠노라 다짐했다.
짐을 꽁꽁 줄로 싸매고 탑승하려고 하는데 베리가 헬멧을 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헬멧인데 나를 주다니 감동이었지만 운전자의 안전이 우선이라며 호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오토바이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장비라며 건넸다. 베리의 유머도 함께.
“For girlfriend.”
드립엔 드립으로 승부한다.
“Thank you, daddy.”
미션은 시작되었다. 급경사, 급커브를 뚫고 반락타이를 향해 달려갔다. 1시간 30분 뒤, 드디어 반락타이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내가 머물 게스트하우스도 몇 군데 살펴보았다. 그러는 내내 베리에게 무언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호의를 받았으면 호의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바이 기름 필요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밥 먹을래요?”
“괜찮아요.”
휴. 다 거절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반락타이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도착해서 마을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베리 덕분이었는데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 지역이 차로 유명하대요. 차 마시고 싶어요.”
반강제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당당하게 들어가 메뉴판을 달라고 했는데 영어가 통하질 않았다. 그러자 베리가 중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지? 미국 출신이라 영어를 할 줄 알고, 어머니가 프랑스인이라 불어도 하고, 어제는 스페인어를 하더니 오늘은 중국어를 했다. 4개 국어를 할 줄 안다니 베리에게서 후광이 나타났다. 역시 닥터 하우스는 대단했다.
차를 마시며 가족 이야기를 했다. 베리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각자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곳도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일하다가 퇴직하고 오토바이 여행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퇴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빠가 생각났다. 지금 퇴직하고 국내 여행을 즐기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빠가 비행기만 탈 줄 알았다면 지금쯤 엄마와 함께 해외 여행을 즐기고 있을 테지.
두런두런 이야기가 끝날 때쯤 베리가 함께 빠이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빠이에 가기 전에 로드 동굴(Lod cave)에 들릴 건데 재밌을 거라며 날 꼬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겐 빠이행 벤을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이미 돈을 들여 산 표가 아까웠다. 그리고 그에겐 장난이지만 추파를 던지는 게 불편했었다. 미안하지만 내 일정대로 여기서 하룻밤 자고 빠이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12시가 되자 베리는 이만 가 봐야겠다며 일어났다. 그리고 찻값을 내겠다며 주머니를 여는 것을 극구 막았다. 나는 지갑을 들고 종업원에게 가서 찻값을 물어보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곤 손사랫짓을 쳤다. 여기는 바트를 안 받나 싶어서 베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리가 중국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공짜니까 돈 안 내도 된대요.”
이런 황송한 일이 다 있나. 반락타이에 가는 것부터 차 마시는 것까지 호사란 호사를 다 누린 기분이었다. 이게 다 베리 덕분이었다. 난 베리를 배웅해주고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게스트하우스 몇 군데 둘러보다가 호수가 잘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숙박비를 지불하려고 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영어를 전혀 못 하셨다. 중국어로 뭐라뭐라 이야기하는데 1도 못 알아 들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배웠던 중국어를 총동원해서 질문하였다.
“점머양?(어때요?라는 뜻이다. 이와중에 틀린 말로 회화를 대화를 시도한 나란 사람...)”
손가락 3개를 핀 주인아주머니의 손을 보고 300바트를 냈다. 내가 중국어를 한다는 게 신기했는지 이런저런 말을 또 쏟아붓기 시작하셨다. 난 다시 중국어로,
“팅부동, 팅부동(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다시 태국어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까울리, 까울리.(한국인, 한국인.)”
주인아주머니는 이제야 이해하시고 웃으며 방 열쇠를 주셨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산책했다. 반락타이의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건물도 중국식이라 빨간색 지붕이 많았다. 호수에 비친 건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곳에 마치 용 한 마리가 살 것만 같았다. 수채화 물감을 들고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빵웅보다 이곳이 훨씬 좋은 것 같았다.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이 내 맘에 쏙 들었다.
#5
슬슬 배가 고파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다. 차를 공짜로 내준 레스토랑을 먼저 갔지만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메뉴판을 부탁해도 주질 않았다. 결국 그 레스토랑을 나와 후미진 곳에 있던 허름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레스토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고급스러운 느낌과 반대되는 레스토랑이었다.
메뉴를 보니 모두 태국어로 적혀 있었다. 가격도 적혀 있지 않아 멋대로 시킬 수도 없었다. 덤터기 씌울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메뉴 하나를 골라 중국어로 물어보기로 했다.
“점머양?”
중국어로 물어보니 대답은 당연히 중국어였다. 흑흑. 나도 울고, 배도 울고, 메뉴판도 울었다. 나는 침착하게 가격을 다시 물어보았다. 45바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난 중국어로 1부터 6까지 숫자를 셀 수 있었다.
‘중국어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제 중국어 실력이 빛을 발휘합니다.’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국물이 많은 면 요리였는데 후추 작은 게 들어가 있었다. 수저로 떠서 살펴보니 날파리였다. 침착하게 날파리를 휴지에 버리고 날파리가 잠깐 목욕했던 음식을 먹었다.
사장님은 중국인이 아닌 동양인은 처음 보았는지 서툰 몸짓으로 내일도 또 오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시간이 된다면 내일 올게요”라며 되지도 않는 영어와 보디랭귀지를 사용했다.
#6
숙소에 돌아오니 밤이 깊었다. 깊은 어둠이 내리깔린 시간, 건물마다 환하게 등을 밝히고 있었다. 평화로워야 하는 순간에 클럽 음악이 마을 초입에서 울렸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는 그곳으로 갔다. 알고 보니 기념품숍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기념품숍에서 음식, 술, 음료, 기념품 등을 팔았다. 이 모든 게 반락타이에서 만든 것들이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와인이었다. 시음회도 하고 있었다. 여자 종업원이 나를 보자 시음할 수 있도록 와인을 컵에 따라주었다. 와인의 종류는 총 4가지였다. 복숭아, 파인애플, 말라카, 플럼이었다. 복숭아 와인은 달달했고, 파인애플 와인은 약간 톡 쏘는 단맛이었고, 말라카는 형용하기 어려운 쓴맛이었고, 플럼은 걸쭉한 쓴맛이었다. 반락타이를 기념하기 위해 어떤 와인을 사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에 한잔, 한잔 종업원이 주는 와인을 받아 마셨다. 그런데 나만 마시는 게 아니고 종업원도 나 한잔, 너 한잔 하며 함께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장님에게 들키면 잘리는 게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이 사람은 여기 직원 아니예요.”
옆에서 시음하던 여자가 나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종업원도 아닌데 와인을 따라주고 맛을 물어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 놀리나? 맛있는 와인이 있으면 사라고도 말하던데... 그녀의 호객행위에 내 손에는 이미 파인애플 와인이 있었다. 가격도 저렴한(?) 200바트였다. 와인을 들고 계속 시음을 했다. 4개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리고 파인애플 와인에 마음을 굳혔을 때 종업원은 나와 함께 시음하던 여자와 유유히 사라졌다. 나에게 웃음과 와인을 남기고 말이다.
#7
와인을 품고 숙소에 돌아와 자고 일어나니 아침 7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매홍손 시내로 가는 썽태우가 8시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게스트하우스 밖에서 썽태우를 기다렸다. 간밤에 잠을 설쳐 꾸벅꾸벅 길가에 서서 졸고 있는데 뜬금없이 들리는 클럽 음악에 잠이 달아났다.
‘역시 아침에는 클럽 음악이지.’
평화로울 것만 같은 이곳에 클럽 음악이라니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잠을 깨는데 특효였다. 카페인보다 효과 만점이었다.
8시가 되자 썽태우가 지나갔다. 빵웅까지 데려다주었던 썽태우 기사를 다시 만나 괜스레 반가웠다. 그렇게 다시 매홍손으로 돌아가 빠이로 가는 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