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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진하 Dec 14. 2022

시원섭섭하다면, 몸은 힘든데 마음은 채워졌던 일이란 걸



매일 라디오를 진행하며 그날의 단어 하나를 듣는 이에게 정의해달라 청한다. 이 단어 하나를 계기로 내 인생의 어떤 구석을 잠깐만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매일 주제에 맞춰 도착하는 문자는 얼마나 같고도 다른지. 또 얼마나 영화 같고 시 같은 글들이 많은지. 누구에겐 어떤 단어가 사랑인데, 누구에겐 듣기만 해도 슬픔이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을 더해 우리만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일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이 글들은 국어사전으론 담아낼 수 없는, 인생이 반영된 진짜 사전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수능날입니다.

지금은 1교시.
열심히 문제 풀고 있을 겁니다.

오늘의 주제,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죠.
수험생들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러면서도 얼마나 아쉬울까요?
오늘은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시원섭섭은  _______이다.

어떤게 그렇게 시원섭섭한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원섭섭하다

: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이 풀리어 흐뭇하고 가뿐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오늘 막내딸 웨딩드레스 맞추는 날이래요"



시원하시기만하고... 섭섭함이 없는 거 같습니다?



"아내가 친구들과 3박4일 여행간다니

아주 좋아~ 아주~ 시원합니다 자유만끽 ㅋㅋ

근데 신랑들은 빼고 자기들 끼리만 간다하니 조금 섭섭합니다

관광버스 타는 곳 까지 아침에 태워 달라고 하네요~"



문자의 전반적인 톤은

밝고 명랑하고 시원하다! 이건데요?

이분 문자를 보니까 이제 문자마다

시원과 섭섭의 비중을 좀 따져야겠다, 생각이 드는데요.


이분은... 시원이 90이고 섭섭이 10정도?

아니, 10도 좀 높죠. 5 되겠네요.




"매년 그림 개인전 전시가 끝난 후,

그림 싣고 집으로 올때 시원섭섭해요."



"진하씨 망원동에서 주부연극동아리를 하는데

그저께 공연을 끝냈어요

코로나로 3년만에 무대에 올려서 시원섭섭하네요."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어떤 작품이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준비는 많이 하셨을텐데 공연을 그간 못해서

연습량이 많아서 실력은 아주아주 올라갔겠어요.

그럴 때가 아주 아쉽죠. 열심히 안한 사람은 후회도 덜해요.

오히려 연습량도 실력도 충분할 때, 그럴 때가 아쉬운 거니까

그만큼 열심히 하셨다는 이야기도 되겠네요.



"다섯살 딸이 아빠 쉬는날인데 어린이집 가지말고 아빠랑 놀까? 하니까

친구들 보러 어린이집 간다는데 시원섭섭하네요?"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만난 외동아들이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네요.

자고 있는 모습 보니 그런 생각듭니다.

이젠 놀이터에 함께 가지 않아도 되고,

씻겨주지 않아도 되고,

떠 먹여주지 않아도 되지만,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시원섭섭하네요."



아이들 키울 때 정말 그렇다면서요?

나 좀 그만 찾아라, 했다가도

막상 안찾으면 내가 필요가 없나, 생각 드신다는.

아이의 '성장' 역시 시원하고도 섭섭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구순의 어머니

올해까지만 김장하신다는 말씀에... 시원섭섭 하네요.

이번주 시골갑니다 김장하러요."



그렇죠.

힘들게 하신다하면 하지마시라 하시마시라 그리도 만류했는데

막상 안하신다 하면 먹고 싶다- 싶은 마음 들면서도

아이고, 우리 어머니 이렇게 나이드셨나- 싶은 일.


이렇게 시원섭섭하다는 문자에

시원함이 9할, 섭섭함 1할인 문자가 많이 옵니다.



"와이프가 회사워크샵 1박2일로 간다고했다가

당일치기로 일정바뀌었다네요.. 시원섭섭 해요..

아니 많이 아쉬워요..ㅎㅎ"




당일치기도 하루종일 안 계신거니까 밤까지는 놀면 되죠.



"우리 딸이요.

 어렸을때는 아빠봐봐~아빠봐봐~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했는데

 이제는 방문이 언제 열릴지가 제일 궁금해집니다ㅠㅠ



"부모님께서 이제 연로하셔서

 명절에 차례 못 지낸다고 할때 시원섭섭하더라고요"



아까 구순 어머니 올해까지만 김장하신다고 했던 문자 있었잖아요.

이것도 그것도 비슷한 거 같아요.


막상 할 때는 나 바쁜데 시간도 따로 내야하고,

나도 손 보태야할 것 같고, 시간 내기 어려울 때도 있어서

이걸 대체 왜 하는 건가 까지 생각이 미치는데


막상 주최하시는 분이 안하신다 하면

괜히 내가 그런 말을 해서 그러셨나 싶기도 하고

아님 이렇게나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나 요즘 힘이 없으신가

그런 걱정으로 뻗어나가죠.




"정말 시집못갈 천방지축인 딸

 결혼식날 시원 섭섭했죠

 그런데 지금은 대견합니다 예비엄마거든요"




아버지, 시집을 '못 갈' 딸은 대체 뭡니까(웃음) 얼마나 천방지축이기에!

지금도 얼마나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명랑한 엄마일지




"보고싶은 손주녀석 오니까 반갑고 가니까 더 반갑더라!

 이말처럼 오늘도 주말만 기다리는 50대 할아버지입니다.

 왔다가 갈때가 되면 시원하지만

 또 늘 주말만 기다리게되는 할아버지의 이 마음은 늘 섭섭에 가깝지요"



"지난 주말에 백일 지난 손녀가 집으로 가서

 너무 허전한 시간 보내고 있네요

 백일동안 함께 육아했는데 이제 시원섭섭하네요"



아기 보는 게 쉬운 일 아니죠. 얼굴 볼 땐 좋은데 5분 후부턴 힘든 법.

자꾸 찾고 챙겨줘야하고 울고, 손발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이런 육아라면 섭섭함보단 시원함이 절대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보내는 그 순간 빼곤 늘 섭섭해하셨던 거군요.




"집안청소 하다가 못 버리고 두었던

 빨래걸이 런닝머신 애물단지 치웠더니 시원섭섭하더이다

 빨래 널때 마다 생각나요 ㅠㅠ"



은근히 요긴하지요. 손 닿는 데 착- 있구.



"음식 솜씨가 부족한 저희 어머니는

 김장을 안하시고 김치를 주문하세요.

근데 올해는 김치값이 너무 올랐다며

직접 김장을 하시겠다는데 온 가족이 긴장 상태입니다.

시원섭섭이 아니라 그냥 섭섭합니다. 그냥 김치 사먹읍시다~~~"



아이고, 어머니.

엄마한테 대놓고 맛없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재료값 더 든다... 이런 논리로 접근하면 어떨까요. 잘 막아보세요.

에이, 근데 안되면 뭐 어때요. 어머니 손맛 좀 내신다는데 먹죠 뭐.




"어머님께서 아범아~ 그랬었는데

 손자 이름을 먼저 부를 때 시원 섭섭하지요

 오늘부터 저는 해방입니다 야호 신난다 방학이당"


"10년된 차를 드디어 패차하고 세차로 바뀌 너무 좋았지만

 오래된 차에 추억이 너무 많아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5년간 저희 가족에게 좋은 추억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준 텐트레일러를

 방금 중고거래로 판매하고 왔네요. 너무 섭섭합니다."


"지난 일요일에 17년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나의 발이 돼준 자동차를 보내고 다른 차를 구입했어요

 그간 큰 고장없이 나와 함께한 정든 차를 폐차 시킬 때

 정말 시원섭섭하고 미안했네여"



"미국에 사는 형남내외 귀국하시면 며찰씩 아님 더 길게

 저희집에서 머물다 가시는데 올때 반갑고 갈때 반갑습니다.  

 제일 고민이 식사준비요.

 그래도 작은엄마가 만든게 제일 맛있단 조카의 말에 피로가 눈녹듯이 녹습니다"



자는데 자리는 편한지, 먹는건 괜찮은지

우리집은 이거 맛있다고 먹는데 손님은 입에 안맞는 건 아닌지.

또 어디 지저분한덴 없는지 손님 접대하는 내내 쓸고 닦고 하는거죠.

이렇게 마음 쓰는 일을 매년 하고 계신걸 보니...  

글쎄요. 시원섭섭은 그 마음에 맞지 않는 단어 같기도 하고요.



"몇년동안 결제 속썩이던 거래처가 있는데

 저희 회사와 거래를 끊는다고 하니 앓던이가 빠진것처럼 시원섭섭 하네요"



100%의 시원함!



"할까말까 망설였던 마음속의 말을 곰곰이 들여다보며 톡으로 보냈어요.

 친구도 같은 마음이었다며, 서로 시간을 두고 보자고..."



할까말까, 이런 얘기 해도 될까, 이런 얘기 해서 우리 사이 멀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꺼냈어야할 문제 아닐까요?

두 분 사이에는 위기도 기회가 되기를...




"오늘도 황아나 목소리들으며 화물 배송중입니다

 시원섭섭이라... 한회사에 40년 정년하고 나올때 아닐까"



"올해 35년 직장생활 종 올해 35년 직장생활 종지부를 찍는 아빠

 가족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정년퇴직 시원섭섭하네요

 고생 많으셨네요 응원해주세요"



35년이란 세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요?

섭섭함 보단 시원함이 큰, 인생 이모작의 시작이 되도록 옆에서 에너지 넣어주세요.

평소에 이거 해보셨음 생각했어요, 저거 배워보시면 잘할 거 같아요, 그런 말이요.




"나이 50다 되서 시작한 사회복지사 공부 마지막 단계 실습중입니다.

 지역아동센터4주 실습중인데 내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아이들을 이제 못본다 싶으니 시원섭섭합니다^^"



"제게 시원섭섭은 어릴적 오랫동안 살았던 나의 유년시절이 듬뿍 담겨있던,

 불편했던 낡은 주택에서 이사하던 날이었어요.

 분명 더 좋은 신축 아파트로 기는건데~~ 눈물이 났어요."



"몇년전 30년 넘게 운영하던 점포 정리하며

 집에 가져오기 힘들어서 가게에서 듣던 오디오와 LP판 1500장을 정리했는데

 너무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시원함이 느껴졌어요

 물론 지금도 자주 생각납니다"



"시력장애가 있음에도 서로서로 도와가며 여행을 다녔던 모임.

 올해로 종료됐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종료가 된다니 이것도 시원섭섭하네요"



이건 섭섭함으로만 끝나지 않게 여행은 끝나도 만남은 이어가실까요?







읽다보니 시원섭섭한 것들은 대부분 몸은 고되며 품이 드는 일인데, 마음, 정신적으로는 채워지는 일들이 많네요. 요즘 제일 많이 보내주시는 일과인 '김장'도 그렇죠. 그렇게 준비할 것도 많고 몸도 고된데 또 먹을땐 좋고 뿌듯하고 감사하고 오래 가요. '육아'는 또 어떤가요. 너-무 힘든데, 아이 방끗하고 웃는 거 한번 보면 마음에 꽉 차서 다시 갈 힘을 얻고요. 오래된 차 바꾸는 것도 그래요. 탈 땐 고장날까 불안하고, 요즘은 이런 것도 있다던데 하며 새롭고 반짝거리는 것들만 눈에 들어오고요. 세상 불편하게 느껴지고 바꾸고 싶고요. 근데 또 바꿀 때 되면 쌓인 정이 있어서 안녕하려 하니 아쉽지요.


이제 조금 알겠네요. 시원섭섭하다는 마음에 대해서요. '시원섭섭하다'라는 말은 이렇게 다시 채워봅니다. 시원섭섭하다면, 몸은 힘든데 마음은 채워졌던 일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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