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뭐든 좋은 건 내가 가져야 하고
무조건 편한 일은 내 몫이고
누구보다 날 우선으로 대우해줘야 직성이 풀리던 그런 날들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갑이어야만 했습니다.
상대의 배려는 당연한 거고
어쩌다 베푸는 나의 친절은 황송한 거였죠.
겉모습에 혹해서 접근했던 남자들은
당연하게도 두세 번 만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사라졌어요.
부모님도 내가 힘겹다던데 완전 타인인 그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너 그러다 평-생 혼자 산다. 고양이 한 마리 끼고.
지인들의 충고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습니다.
딱히 남자에게 관심이 넘쳐났던 것도 아니고
가만있어도 알아서 몰려오니 남자 귀한 줄을 몰랐던 거죠.
어휴- 밥맛. 임자를 만나야 정신 차리지.
눈을 하얗게 흘기던 친구의 말처럼
어느 날, 느닷없이 임자를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훈남 아니고 매우 매우 흔한 남자- 흔남에 홀딱 빠져 버렸어요.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듯 파리한 얼굴에
내 다리, 아니 팔뚝보다 얇진 않을까 염려될 정도의
일명 걸그룹 표 각선미를 뽐내는 남자
처음 만난 자리에서
종이 인형이세요? 물을 뻔했네요.
딱 차 마실 때까지만 버틴다.
이 시간 후로 너랑은 끝이다.
밤길 조심해라-
주선자 친구에게 다다다 쏘아놓고
시간아 흘러가라 멍 때리고 있는데
건너편 자리의 아가에게 방긋방긋 미소를 보내는 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지 남의 집 애가 분명한 아가가 마치 그의 조카처럼 두 팔을 쫙 펴고 안아 달라 성화를 부리더군요.
급기야 소개팅 자리에서 베이비시터로 변신한 그는 매우 능숙한 자세로 아기를 얼렀습니다.
어머나, 이렇게 가정적인 남자라니-
여자 친구분 좋겠어요.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네.
평소 같으면
남자 친구 아니거든요! 단호박 멘트를 날렸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소 호들갑스러운 아주머니들의 반응에 같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십 분 전까지만 해도 이제껏 만나본 남자 중
제-일 별로였던 그가 내 맘에 훅 들어왔어요.
남자 친구를 넘어서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을 본 거예요. 첫 만남에!
냉장고에 있는 반찬도 못 꺼내먹는 오빠들한테 질려서 그랬나.
(물론 챙겨준 적은 없지만)
밥도 할 줄 알고 국도 끓일 줄 알고
반짝반짝하게 그릇 닦기가 특기인 남자는 신세계였어요.
받아먹기가 특기인 내가,
그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잘 해주니까요. 몸이 알아서 움직이더라고요.
오늘도
거듭된 야근 탓에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그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었습니다.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문제 되지 않았어요.
내가 그를 의지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의지해주었으면
그의 배려에 매 순간 감동하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감동을 주는 여자 친구가 되었으면
지나간 사랑들이 보면 기함할 멘트를 하고 있어요.
모든 순간 나보다 그를 먼저 생각하는 건
아마도 사랑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