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하는 잠깐 이라는 시간
잠깐,
잠깐이란 어느정도의 시간의 범주를 말하는걸까?
한달, 한주, 하루, 단 몇시간 또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서
한숨을 쉴 정도, 호흡할 시간, 산만하게 엉켜져있는 생각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시간
대학원을 수료와 함께 논문 예심과 본심 숙제가 남겨졌다.
코로나19와 함께한 20년도 대학원 입학은
공부의 험난함 보다는 낯설음과 부르터짐이였다.
학부 전공이 달랐기 때문보다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 문화연구 전공은
멘붕의 도가니 였다.
기본기가 없다는 것은, 방댕이를 붙이고 책을 한권 읽고,글을 써보고, 철학적 질문에 답해보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지 않는 기본기다.
사회의 문제의식과 역사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로 풀어내고 다듬고 토론하고 다시 수정하고
그러면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덜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다방면의 인종, 종교, 언어,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책읽기가 기본이고 책을 읽고 나의 생각을 정립하며, 고찰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뉴스를 볼때마다 또는 친구를 만나면서 대화를 할때마다, 어떠한 옷을 사러갈때마다
불편했던 사람이다. 나의 불편함은 그들의 불친절은 아니다.
뉴스에서의 불편함은 비슷한 사건사고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데 지식인들과 고위급 인사들은
당장의 한 문제로 단정짓는 것들이 불편했다.
친구의 대화에서는 눈앞에 보여지는 불편함을 그들의 생김새와 성격과 배경으로 나뉘는 것들이 불편했다.
(그것들이 왜 불편한지 질문을 던질 수 없는 것인가?)
또한, 성별과 연령에 맞게 행동하기 위한 고개숙임이 싫었다. (그래서 결국 꼰대 라는 말이 유행한건가?)
어떠한 옷을 사러갈때마다 교환과 환불의 불분명함 (이제는 정말 많이 괜찮아졌지만)
소비자와 판매자의 투명하지 않는 거래 방식이 싫었다.
또한 그것 이상으로 나는 모든 것이 불편한 사람이였는데, 일반쓰레기를 버려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방치된 쓰레기를 보았을때 1차적으로 버리지 말아야하는 것을 버리는 사람이 잘못이지만
2차적으로 지속적으로 버리는 이유는 방치를 한 행정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수 없이 헤아릴 정도로 많지만....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성별적 등 많은 것들에서
잠깐, 왜? 질문을 달고 산 나에게 문화연구 전공은 석사의 라이센스가 아니였다.
그 자체였다.
비판할 수 있는 학문, 문화란 인간의 일상의 총체적인 것을 다름으로 질문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마이너한 학문이라 마음에 더 끌렸다)
그런데, 학문의 발길을 들어서니 나의 무식함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난 문화연구전공자가 꼭 공부해야하는 필수전공에서 개론처럼 따르는 책 <문화사회학을 향하여>
는 검은것은 글이고 흰것은 종이. 구나
몇장을 붙들고 읽고 읽어도 무슨말인지 도통 이해할수 없었다.
나의 독해력의 수준을 그때 알게되었지.... (책을 많이 읽는다고 무조건 독해력이 좋은건 아니다)
그렇게 나는 버텼다. (그렇게 난 열심히 방뎅이 시름하며 공부했다라고 하고싶지만...공부할 수 있는 것도
수준이라는게 있는거다)
나의 1학차시의 고찰은 이것이였다.
"나를 왜 합격해준 걸까?"
"요즘 대학들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래서, 역시 요즘 일반대학원도 아무나 가는 곳이 되었구나"
"그런데 진짜로?, 그래도 그렇지 학과의 위상이라는게 있는데 왜 나를..?"
대학원 1학차시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후 나는 휴학계를 작성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