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 싫어
새벽 5시, 바깥은 아직도 캄캄했다.
부스럭, 부스럭, 엄마는 등산 가방을 챙기는 소리에 잠이 깨자마자 든 생각, 난 등산이 싫어.
왜 엄마는 등산하러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것일까? 신발을 신고 쾅,하며 현관문이 닫히기까지 나는 자는 척하며 엄마가 빨리 나가길 기다렸다. 등산, 산에서 내려올 걸 왜 굳이 올라가는 것인지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은 엄마를 닮는다고 누가 그러던가. 강산이 한번이 바뀌기도 전 등산을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는 등산이라는 뜻의 하이킹(Hiking)이나 트래킹(Trekking)이라는 영어 단어 대신 트램핑(Tramping)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쓴다. 트램핑의 정확한 정의는 침낭과 요리, 비에 대비하기 위한 모든 장비들을 배낭에 넣고 짊어지며 깊은 산 속을 걷는 하루 이상의 활동을 부르지만, 키위들은 하루 등산하는 것도 트램핑이라 부르기도 한다.
뉴질랜드처럼 트램핑에 최적의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트랙들이 많다. 산을 좀 좋아한다 싶은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 본, 세계에서 아름다운 트랙 중 하나인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도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 해 있다. 그 이외에, 뉴질랜드 산림청에서 지정한 뉴질랜드 그레잇 트랙(New Zealand Great Tracks)은 밀포드 트랙만큼이나 아름답지만 덜 알려진 나머지 아홉개의 트랙이 뉴질랜드 전역에 있다.
처음에 트램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솔직히 주말에 할 것이 없어서 였다. 늦게까지 할 것 많은 한국 밤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가 뉴질랜드에 오면 밤에 할 것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백번 맞았다. TV를 돌려봐도 채널은 몇 개 없고, 어학원에서 사귄 친구도 일찌감치 자기 나라로 돌아간 지 오래, 쇼핑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였다. 무엇을 할까? 뉴질랜드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는 동호회가 없을까? 하고 찾다 눈에 띈 것은 바로 트램핑 동호회였다. 비싼 장비 필요없이 튼튼한 신발과 자기가 먹을 간식만 싸가면 되는, 돈이 들지 않는 취미에 주저 없이 가입했다.
하루에 4시간 이상 걷는 트램핑이 처음에는 길고 지루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왠일, 나 처럼 트램핑을 처음 하는 사람들, 뉴질랜드로 이민 온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걸으며 대화 하다보면 2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어느샌가 자연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잠시 앉아서 쉬는 시간,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시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울창한 숲속을 눈 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트램핑의 맛을 알게 된 순간이다.
트램핑은 걷다보면 마음이 힐링이 되는 정화 작용을 한다. 적어도 걷기 시작한 지 세 네시간은 빼고 말이다. 3박 4일 되는 트램핑 일정에 10키로가 넘는 가방을 들고 걷다 보면 항상 첫 세,네 시간은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지?’ 매번 갈 때마다 속으로 불평 한다. 나는 이 시간을 ‘사회에 찌든 독소가 빠지는 시간’이라 스스로 명명 하는데, 달리기 할 때 세컨드 윈드(Second Wind)가 오기 전의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처음 4km를 뛸 때는 숨도 차고 몸도 덜 풀려서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지만, 세컨드 윈드가 오면 몸이 적응되어 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트램핑도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뿐이지, 그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이 된다.
그 후에는 짜증과 후회가 줄어들면서 사색에 잠기고 자연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눈이 생긴다. 이 때부터가 바로 트램핑을 즐기는 순간이다. 뉴질랜드 몇몇 국립공원은 핸드폰이 안 터지는 장소가 제법 많아 외부로부터 단절 된 시간을 반 강제적으로 가질 수 있는데, 핸드폰에 알게 모르게 중독된 나 자신을 핸드폰으로부터 멀어지게 도와준다.
위의 글은 올해 발간 된 책 <나는 뉴질랜드에서 일한다>에서 발췌, 편집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