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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g Aug 17. 2015

꿈 그 자체가 내 삶인 일

인정받는 것 보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언젠가부터 누군가 꿈을 이야기 하면 꼭 다시 되묻곤 한다. 가령 디자이너라고 대답 한다면 '어떤 것을 하는 디자이너인지'. 이때 묻고 싶은 것은 세부적인 분야가 아니라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다. 몇 가지를 더 질문해도 '직업'적인 얘기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금은 안타까운데, 거기엔 내가 없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얘기를 나눌 때 눈을 반짝이는 사람을 만나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하고 싶어진다. 선택한 이유는 물론, 보여주고 싶은 것, 얼마나 흥미로운지, 사회나 주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는 세상은 무엇인지도. 구체적이지 않아도 '프로세스'가 아닌 '전해지는 것'을 대답할 수 있다면, 선택과 실행의 어려움은 오히려 더 크겠지만 고민의 폭이 넓어 건강한 상태로 보인다.


직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내가 이루고 싶은 것, 꿈 그 자체가 내 삶인 일. 그러면 어떤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꼭 직업이어야 한다면 거의 평생 그것과 살아가는데, 그 이유가 만약 삶에 대한 불안이나 외부적인 요인이라면 당장이든 언제든 괴롭지 않을까. 이루어도 이루지 못해도. 꿈이 사라질 때의 공허함, 잃어버린 것에 자기보호와 두려움. 물론 사람의 가치관은 모두 다르니 직업이든 노후 대비든,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방향이 좋다. 그 어느 쪽이든 타인의 상황과 사회를 기준으로 강요도, 비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일의 즐거움을 어느 한쪽으로 당기고 놓을 수 있는 그런 균형이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람이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어떤 방향도 각오할 것이 존재하고, 고쳐보고 변화하고 결국 그 다음의 모습이 무엇인가, 감수할 수 있는가의 반복. 그렇게 나를 바로 안다면,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꿈을 꼭 이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흔히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하지만 과연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의 크기 만큼이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안과 실망도 크지 않을까. 진척된 것 같다가도 뒤돌아보면 그대로인 모습들. 당장 있지 않는 미래만 바라보면 내 앞의 것을 놓치고 현재를 살지 못한다. 시기가 언제든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나아갈 때 끊임없이 걸을 수 있다.


한때 내일이 사라지길 바라는, 오늘을 이겨낼수록 두려운 내가 있었다. 의지와 달리 점점 좁아지는 생각, 분 단위로 찾아오는 불안과 나약함 앞에 나 하나 붙잡지 못하고 망가져갔다. 바닥에 치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차비조차 없어진, 이렇게 된 자신을 비난했다. 중학생 때 용돈을 벌고 삶을 오가는 수술도 버텼던 나는 어디에 있던가. 부질없는 과거, 모든 것 잃은 듯한 그 때. 스스로를 끝없이 놓아갈 때 어떤 위험신호였는지 허드렛일을 시작했고, 살아가고 일어서는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헤매던 내가 지금은 마음이 좀 나아졌다고 어줍잖게 해도 되는 말들인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하고 싶었던 일, 그게 나 자신인데 멀어질수록 심해진 것 같고.


한 후배의 고민에 오래 전의 나처럼 자신 있는 답변도, 그저 잘 될 거라는 대답도 어려웠다. 다만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변화를 감수하되 상처받을 공간이 크지 않다면, 인정받는 것 보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그래도 하고 싶을 딱 그 정도만.


꿈 그 자체가 네 삶이고 잃지 않기를, 그렇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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