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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g Aug 31. 2015

타인의 이야기를 나누는 무게

감정에도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1. 어려움에서 얻은 위로


10년 전 중환자실에 6개월 정도 머물렀던 때가 있다. 첫 번째 갈비뼈와 쇄골이 거의 협착되어 왼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마비가 왔고, 다른 병원에서 잘못된 치료 후 한 달간 방치되는 바람에 급한 수술을 필요로 했다. 심장에서 이어지는 혈관과 신경다발, 그리고 팔까지 모두 괴사로 굳어가는 상황. 병실 주변에는 암이나 의식불명, 어딘가 절단된 환자가 많아서 꽤나 큰 병이라는 것만 짐작했다.


응고된 혈액을 녹이고 뼈를 잘라낸 뒤 스탠트와 같은 재건수술로 위험한 상태는 벗어났지만, 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팔에 구멍을 내어 몇 가지 시도 끝에 손바닥에 온기가 생겼지만 감각이 없었다. 잘 모르지만 이미 신경에 많은 손상이 생긴 듯 했고, 회복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맴돌았다.


팔을 잘라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데 그 말이 사실임에도 들리지 않는다. 20대 청춘에게는 너무 큰 날벼락이었다. 뼈의 통증과 피부 봉합을 위해 일주일 정도 휴식을 권했지만 3일째 되던 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무통증 주사에 의지했다. 아픈 것 보다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병원 내부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마치 다른 환자들이 양보라도 한 것처럼 창가에는 의식불명 환자가 많았다. 겉으로만 봐도 뇌가 함몰되거나 호흡기에 의지하는 심각함이었다. 그들 곁에서 가족은 언제나 아무 말 없이 버텼다. 매일 오후가 되면 암으로 투병중인 아버지를 찾아와 간호하며, 휴게실에서 공부하던 또래의 여자아이도 기억난다. 앞날에 대해 오만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의 눈물을 보면 이만한 일에 슬퍼하는 것이 사치 같았다. 몇 주 후 나는 스펀지로 된 공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언젠가 나와 같은 치료를 받았던 비슷한 나이의 환자가 있었는데, 결국 움직이지 않는 팔을 안고 퇴원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재활을 버티지 못했고 보험료를 기대했다는 얘기도 함께. 그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안타까웠다. 만약 나도 팔을 못쓰게 된다면. 가족, 일, 주변사람으로 뻗어가는 생각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되었다.


사실 움직일 때 마다 겁이 났다. 작은 움직임에도 팔이 푸르게 변하며 터질 것 같았고, 어딘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의 재활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래도 감각이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닐까, 어차피 잘못 되어도 똑같다는 생각에 점점 강도를 높였다. 팔을 굽힐 수 있게 되었고, 병원 사람들과 친해졌고, 이 때를 남겨두고 싶어 집에 두었던 카메라를 가져달라 부탁했다.





#2. 아무것도 아닌 일


가끔은 내가 겪어본 일이나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참 많아서,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갖고, 어려움을 이겨내며,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회사 동료나 친구만 해도 그렇다. 이런 생각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나 자신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서 자아상실과 관련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는 타인의 경험도 그리 대단치 않게 느껴질 때다.


타인의 고민이나 경험을 들었을 때 '이 정도를 힘들어 하나', 혹은 '이런 것을 자랑하나' 하며 쉽게 보는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손에 꼽을 만큼이거나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는데, 이미 지나왔거나 그보다 더한 것을 경험한 경우 조금은 사소하게 느껴지는 현상이다. 마치 고민 이겨내기 시험도 아닌데 누가 더 힘들었나 하는 순위를 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생각은 '당신보다 내 키가 더 크다' 하는 정도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내게도 가장 힘든 일


물론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나는 대단해', 혹은 '그건 별 것 아니야, 이렇게 해야 해'라는 조언보다 '그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당신의 어려움을 궁금해하고, 자신도 힘들었을 것이라며 들어줄 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의 경험과 그릇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고민을 접할 때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는 것을 품은 채 마주해야 한다.


스스로가 먼저 공감 해야만 상대에게도 진심 어린 얘기를 해줄 수 있다. 상대방은 공감의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더 깊은 마음을 건넨다.



즉답보다 시간의 대답


고민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큰 어려움일 수록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저 그 시간을 응원해주면 된다.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고자 하는 얘기가 아닐 뿐더러 정말 해결방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사람, 환경, 주변상황은 모두 달라서 고민 끝에 생각이 정지하여 꼼짝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의외로 말을 꺼내는 것 만으로도 해결될 때가 많다.



설득해야 하는 대단함


자신의 대단함을 '설득'해야만 할까. 인정받고 싶은 것은 사람의 욕구지만 그 대상이 나보다 뛰어나지 않고 비슷하거나, 그 수가 많을 수록 안도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는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문제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상대방이 처음부터 나와 완전히 같은 경험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어쩌면 더 잘 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100m 달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모든 종목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은 마라톤을 더 잘할 수도 있다.



마음도 잘하는 것이 있다


감정이 감당할 수 있는 분야도 마찬가지다. 마음에도 체력이 존재하고 그 체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이겨냄의 정도 역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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