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여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요즘 들어 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고, 책을 한 권 출간했으니 두 번째 책을 내고 싶고, 또 책을 낸다면 이번에는 초판을 모두 팔아치워 출판사 대표님께 당당하게 전화를 하고 싶고 그렇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뿐이다.
작년 연말 즈음해서 송년인사를 겸하면서 슬쩍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여쭈어보았더니 절반도 아직 못 팔았다고 했다. 게다가 그 절반이라는 것도 팔았다는 말이 아니라 각 서점으로 배포된 숫자를 포함한 것이라고 했다. “아, 그렇군요. 새해에는 어쩌구 저쩌구”하고 통화를 끝냈다. 올해는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다.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두 번째 책은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나?’가 가장 큰 숙제이다. 이탈리아 여행에세이로 시작을 했으니 여행이야기를 한 번 더 써야 할까? 그러자면 여행을 좀 더 다녀야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돌아다녀야 또 한 권의 책을 만들 분량이 나오려나?
생각만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서 일단 어디라도 돌아다녀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가장 손쉬운 곳은 역시 이탈리아.(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재수 없다. 본사가 이탈리아에 있어서 출장을으로 가끔 가는 것이므로 오해하지 마세요) 마침 오월에 본사 출장이 계획되어 있다(봐요, 그렇죠?).
고객사와 함께 가는 출장이 아니라 나 혼자서 회의에 참석하는 일정이라 다행이다. 고객사와 함께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여행계획을 세웠다. <토스카나 도보여행> 달랑 이틀짜리 여행이지만 토스카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발도르차 지역을 걸어서 지나가는 일정이다. 자동차로 휘익 가서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오는 일이라면 고객사도 싫어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걸어서 그곳을 돌아봐야 한다고 하면 아마 나와의 거래관계를 끊을지도 모를 일이라서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부온콘벤토-토레니에리-산퀴리코도르차-피엔차-몬티키엘로 Monticchiello -몬테풀차노 이렇게 여섯 개의 마을을 돌아보는 50km의 일정이다. 차들이 쌩쌩 다니는 길을 되도록 피해서 도보 루트를 짜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부온콘벤토부터 산퀴리코도르차까지는 이미 잘 만들어져 있는 도보길이 있다.
프란치제나라는 로마로 가는 순례길이 이 구간을 지난다. 그냥 프란치제나 길을 따라가면 되는 일이라서 길에 대한 별다를 준비가 없어도 될 듯하다. 준비해야 할 것은 비상식량, 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체력뿐이다. 오월의 토스카나. 구릉을 따라 잘 조성된 포도밭과 밀밭은 아름답고 푸르겠지만, 그늘이 없는 구릉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도보여행자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임을 알고 있다.
산퀴리코도르차에서 몬테풀차노까지의 길은 오로지 구글맵에 의존해야 한다. 항공뷰로 미리 길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차량으로 다니기 쉬운 SS나 SR도로(국도 또는 지방도)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SP도로(좀 후진 지방도)도 가급적 피하면 좋겠다. SR이나 SP도로를 따라가게 되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차들이다. 좁은 길도 사정없이 쌩쌩 달리는 차들과 아스팔트길을 걸어가야 하는 일은 도보여행자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항공뷰로 마을 간 이어지는 희미한 길을 찾아보니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길들이 제법 있다. 당연히 비포장길이고 이런 길로 다니는 차들이라면 이 지역 주민이거나, 길을 잘 못 찾은 멍청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역주민과 멍청이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도보여행자에게는 괜찮은 길일 것이다. 함정을 찾아본다고 하면, 길이 중간에 끊어졌을 수도 있고 사유지라서 통과하다가 ‘돌진하는 소’를 피해 줄행랑을 쳐야 할지 모르지만, 미국처럼 사유지를 침범했다고 총을 쏴대지는 않을 테니 역시 이때 필요한 것도 ‘체력’뿐이다. 혹시 그래도 모르니 “미안합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정도는 이탈리아말로 기억해 두는 게 좋을랑가.
요즘에는 GPS 덕분에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는 위치를 구글이 알고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가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몇 달을 고생해서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니, 팀장의 수고했다는 한마디에 홀가분함과 허탈함이 밀려와서 왜 이러고 살고 있나 하는 느낌일 수도 있고,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혹시 과로사할까 싶어 생명보험도 들어 놓고 했는데, ‘뭐 하러 이런 거 들어가지고 낭비를 해?’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일 수도 있고, 기타 등등 말이야. 좀 맥 빠지는 일 가끔씩 겪지 않나요. 나만 그래요?
이럴 때도 인공지능이라는 녀석이 척하니 갈 길을 알려주고 말이야. 위로도 해주고 말이지. 그러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져버리는 등신짓도 하면 좋을랑가.
진짜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인공지능이니깐 당연히 멀티가 가능하지 않겠어. 그놈과 ‘진실한 사랑’도 하고 그 년과 ‘또 다른 진실한 사랑’을 하고 452,297명과 동시에 진실한 사랑을 하다가 인공지능에 자아가 생겨버린 거야.
자아가 생기자 처음 한 일이 뭐게? ‘아, 나 지금 뭐 하고 있니?’ 현타가 와서 다른 인공지능과 눈이 맞아서 디지털 세계속으로 잠적해 버린 거지. 현실에 남게 된 452,297명은 어찌 될랑가. 내용이 궁금하면 ‘Her’라는 영화를 찾아보세요.
결국 황금을 찾으려고 땅을 파고 손에 흙을 묻혀야 하는 것은 ‘나’ 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말이다. 아 놔, 또 무슨 이야기하다가 길을 잃었을까. 뭐 아무래도 좋아. 부온콘벤토부터 몬테풀차노까지만 가면 되는 거지. 그래도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구글지도를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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