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이탈리아 남부 -1
살면서 귀가 얇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다. 남의 말을 쉽게 잘 듣고 ‘혹’해서 저지른 일이 꽤 많기는 하지만, 엄청난 손해를 입거나 큰일로 확대되어 마음고생을 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주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성향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서 ‘편견’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것도 괜찮은 것이 또 다른 사람의 주장도 받아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므로 언젠가는 균형을 찾아가게 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무척 줏대 없는 인간처럼 보이는데, 사실이 그렇다.
< 폴리냐노 아마레의 해변 >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은 이탈리아 모데나이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작은 도시이지만 로마시대에는 로마가도가 지나가던 곳이었고 중세시대에는 모데나 공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지금은 수퍼카 페라리와 발사믹식초로 유명하다. 인접한 도시로는 볼로냐가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볼로냐는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주도이며, 중심도시답게 활기차고 젊은 에너지로 넘치는 곳이다. 본사로 출장을 갈 때면 거의 볼로냐를 거쳐 모데나로 가게 된다. 로마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곳은 북부에 속한다. 에밀리아-로마냐는 드넓은 평야지대에서 수확되는 농산물로 로마시대에는 곡창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양질의 농산물을 기본으로 다양한 음식이 발달되었으며, 거기에 기계류를 만드는 산업도 발전하여 부유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 마테라의 야경 >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북부사람들은 은근히 남부사람들은 무시한다. 게으른 농부들이 많고 북부의 재정지원을 받아야 하는 곳이 많다며 살짝 깔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남부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하여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농촌의 젊은이들의 심정은 우리나라나 이탈리아나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각자 다른 공화국, 공국 또는 왕국으로 수백 년간을 지내왔으니 그럴만하다고 이해는 된다. 특히 북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 자부심이 더 한 듯하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스머프가 살 것 같은 알베로벨로 >
이탈리아 북부에 살고 있는 회사동료들 역시 이탈리아 남부는 아직도 꽤나 촌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내가 가 본 포지타노와 살레르노는 예쁘기만 하던걸”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렇단다. 진짜배기 남부가 아니란다. ‘흐음, 이 친구 이탈리아 사람 맞네’하며 속으로 웃었다.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 자기가 사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고 문제는 항상 옆 동네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나폴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면서 집시가 어떻고 소매치기가 어떻고 치안과 쓰레기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는 둥 하면서 흉을 본다. 쳇, 나폴리처럼 큰 대도시는 다 그렇지. 그리고 말이야. 이탈리아에서 로마-밀라노에 이어 세 번째쯤으로 큰 도시이니까 당연히 문제도 많겠지. 동료들이 그렇게 남부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니까 언젠가 내가 직접 가보고 과연 남부가 그렇게 후진 곳인가 판단해 보기로 했었다. 남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뜨리고 싶어졌다. 줏대없는 인간이 큰 결심을 했다.
< 마테라의 골목길 >
이탈리아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북부의 여러 지역을 다녀보았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글도 쓰고 삽화도 그려서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산책’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초판을 다 팔아치우지 못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출판사 대표님께는 연말연시 인사만(그것도 문자로) 전하고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제발 누님, 형님, 동생님들 모두 얼른 책을 사주셔서 출판사 대표님을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 제가 이렇게 비굴합니다. ㅎㅎ
< 순백의 도시, 오스투니 >
남부지역에(정확하게는 풀리아지역)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올리브나무’였다. 어느 유튜브에서 3,000년 된 올리브나무가 있다는 것을 보고 궁금해졌다. ‘아니, 3,000살 먹은 나무가 아직 살아있고 게다가 매년 열매를 맺는다구?’ 이탈리아 사람들 ‘구라’가 심한 줄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구라를 치다니. 흥미가 생겨서 이곳 농장에서 생산한 올리브기름도 상당액을 지불하고 사서 먹어 보기도 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고 ‘귀가 얇다’고 했다. 신선한 올리브기름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목이 따끔할 정도로 매운맛과 뒤에 따라오는 풀향기, 흙향기가 일품이다. 아내는 이 맛을 보고 ‘맛이 너무 갔다’고 표현하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 3,000년 세월을 지내온 올리브 나무 >
이탈리아 지도를 보면 장화처럼 생겼는데 장화 뒷굽에 해당하는 곳이 풀리아이다. 풀리아는 고대로마시대부터 올리브 나무를 키우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올리브기름의 30% 정도를 이곳에서 생산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3,000년 올리브나무의 존재를 믿게 된 것 같다. 겉에서 본 것으로 실제 나무의 나이를 어찌 정확하게 알겠냐마는(식물학자님들께는 죄송합니다) 사진으로 보니 정말로 늙어 보이는 나무들이 꽤 있다. 3,000년 된 나무가 존재하는 이곳이라면, 1,000년 된 나무들은 오래된 나무 축에 끼지도 못할 테지. 그렇다면 100년 된 나무들은 겨우 묘목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더욱 가보고 싶어졌다.
< 마테라의 동굴식당 >
그래도 올리브 나무를 보러 이탈리아까지 간다고 하면 ‘미친 거 아냐?’ 할 사람이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어두기로 했다. 마침 코로나가 끝나자마자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야 할 일도 생겼다. 공식일정에 주말 끼고 사흘 정도 휴가를 만들어 풀리아 지역을 다녀올 일정을 만들었다. 올리브나무가 궁금하다고 하루종일 나무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주말에 농장문을 닫아버리면 올리브 나무는 담너머로 보고 와야 할 수도 있다. 풀리아 지역에 어떤 곳이 유명한가 찾아보니 이외로 재미있는 곳이 많이 나온다. 그중 마테라와 알베로벨로가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계획형 인간답게 최적의 동선을 만들어본다. 누가 봐도 올리브 나무를 보러 갔다는 ‘숨겨진 진실’을 발견할 수 없는 여행계획이다. 바를레타까지는 기차로 이동, 바를레타 1박, 다음날 차량 렌트, 마테라 1박, 오스투니와 올리브농장을 거쳐 알베로벨로 1박 후 바를레타로 돌아와서 차량 반납, 로마로 기차를 이용하여 돌아온 후 인천발 늦은 저녁비행기로 귀국하는 것으로 계획을 만들었다.
< 폴리냐노 아마레의 골목길 >
풀리아의 여러 해변도시 중에 바를레타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알게 된 분인데 이곳에 살고 계신다고 했다. 그냥 연락해서 ‘이곳에 왔으니까 한번 봅시다’라고 주접을 떨기에는 내가 사회성이 조금 부족하다. 슬쩍 메일을 보내봤는데 연락이 없으면 ‘아하,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하고 금방 포기한다. 늦게 확인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는 메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방법으로 다시 연락하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럽다.
< 나의 첫 풀리아, 바를레타 >
이런 지경이니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물론 일을 하면서 만난 분들이 많지만 이런 분들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에 대한 정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날 갑자기 전화해서 아무 일 없어도 ‘한번 봅시다’하면 만날 수 있는 사이 정도는 되어야 ‘아는 사람’이란 집합에 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바를레타에 살고 계신 분은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보내드린 메일에 답을 주셨다면 ‘거의 아는 사람’이 될 뻔했는데 답이 없으셨으니 ‘에잇’ 모르는 분으로 그냥 남았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바를레타를 가보기로 결정하고, 취소불가한 기차표를 예매했으니 그냥 가야 한다.
이탈리아의 국철은 여행조건에 따라 요금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 KTX처럼 5% 찔끔해주는 것이 아니다. 1달 이상의 여유를 가지고 잘 찾아보면 환불불가이긴 하지만 ‘우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할인폭이 큰 기차표를 구할 수 있다. 소심한 5%가 아니라 대범한 50% 이상 할인되는 표도 ‘스페셜’ 가격으로 국철판매사이트인 트렌이탈리아(Trenitalia.com)에서 구할 수 있다.
남은 일은 숙소를 예약하는 일이다. 비수기에 숙소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럴듯해 보이면서 비교적 저렴하고 도보로 역사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