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이탈리아 남부 -3
조그마한 동네라서 호텔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두오모 앞의 작은 광장에 있는 10번지라고 했는데, 12번지와 8번지는 있는데 10번지는 보이지 않는다. 흉측한 외관의 대문이 있는 곳이 딱 10번지 자리인데, 설마 이곳이 게스트하우스일까 싶어서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아보았다. 여기가 맞는 듯하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장에게 전화를 하니, 맞다면서 자기가 내려오겠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보이고 빨래를 널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할아버지 한 분은 따뜻한 볕이 드는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 계신다.
주인장과 함께 작은 중앙정원을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호텔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문만 잠그면 작은 성처럼 보인다. 이곳에 갇히게 된다면 어쩔 도리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 반, 걱정 반, 주인장을 따라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니 현대적인 현관문이 나온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그런, 딱 아파트 현관 같은 문을 여는 순간, ‘어, 이건 뭐지?’할 정도로 깨끗한 내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문을 통과한 듯 달라져 있다. 깨끗하게 새로 단장된 숙소를 보는 순간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을 보면서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이다. ‘손님을 모시고 올라왔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며 덩달아 커다란 미소를 보낸다. 작년 6월에 오픈해서 영업 중이라며, 방을 무료로 업그레이드해주겠다고 한다.
<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금 생각해 보니 이곳이 너무 깔끔했으면 재미없을 뻔했다 >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길래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면서 이번에 출간된 책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을 보여주었더니 이 친구 눈도 역시 휘둥그레진다. 이곳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느니 얼굴이 조금 두꺼워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확실히 과장된 리액션이 강하다는 느낌이다. 영어가 매우 짧은 탓에 긴 시간의 대화를 했지만 요약하면 몇 줄 되지 않는다. 자기도 답답한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꿔주었다. 무슨 인터내셔널한 회사에 다니고 있는 베스트 프렌드라며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된다면서 ‘No problem’이란다. 이번에 남부를 여행하면서 ‘작가코스프레’를 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낯간지러워서 못하겠지만 이곳에서는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 두오모 게스트 하우스 퀵 드로잉 >
이 두 친구들은 Michele and Giulio, 미켈레와 굴리오(맞게 읽은 것일까)이고, 둘이서 공동운영하는 듯한 숙소의 이름은 두오모 게스트 하우스(Duomo Guest House)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번지수도 붙어 있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역사가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예전에 산타크로체 궁(宮)이라고 불릴 정도로 도시의 유력자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튼튼한 아치형의 대문은 그동안 지내온 세월을 감내하는 것이 버거운 듯 이곳저곳 훼손되었지만 아직은 더 버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처럼 당당하게 입구를 막고 있다.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내부공간은 보는 순간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숙소를 만들 생각을 했지’라고 의심이 든다. 회벽은 벗겨진 채 내부의 벽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계단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반질반질하다.
바를레타에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체크인을 끝내고 미켈레에게 마침 점심도 먹어야 하니 괜찮은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잠깐 기다려보라고 한다. 문을 열었는지 확인해야 한단다. ‘아니, 1시가 다 되어 가는데 문을 열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구? 이게 무슨...’. 이것의 의미는 여행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다.
95라는 식당을 “몰또 프레스코”라면서 추천해 주었다. ‘매우 신선’하다는 말에 ‘재료가 무척 신선한가 보군’이라고 짐작을 했다. 가까운 곳이라서 배낭만 내려놓고 바로 식당으로 가니 문이 잠겨있다. 조금 더 기다려보다가 이 무슨 경우인가 싶어서 전화를 하니 안쪽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아니, 안에 있으면서 문을 왜 안 열어?’. 과연 이곳이 추천을 할 만한 곳인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친구의 추천이라니 믿어보기로 했다. 뭐 알 수 없는 메뉴이다. 카르파쵸 어쩌구하는 단어가 보이길래, 육회 같은 음식인가 싶어 시켰더니 ‘생새우’을 가져다준다.
허헛, 이곳에서 새우회를 먹다니,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한 마리 먹어보니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미켈레가 말한 ‘몰또 프레스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가져온 메뉴는 그냥 해물파스타. 다행이다. 이 식당을 맛집으로 추천하겠냐고 물어본다면 ‘잠깐만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먹지 못할 정도로 맛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딱 보통이다. 순전히 내 입맛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일부러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느낌은 남부의 식당을 다니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평범하지만 신선한 재료, 맛은 환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건강한 맛이라고 해야 하려나.
바를레타에만 있기엔 오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번 풀리아 여행은 처음이기 때문에 책의 목차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가급적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바를레타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인 ‘Trani 트라니’를 가기 전에 동네를 잠깐 둘러보니 노인들만 몇 명 돌아다니고 대체로 도시가 휑하다는 느낌이다. 비수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이곳도 공동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런가.
바를레타에서 트라니까지는 레지오날레 열차로 8분 거리이다. 물론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시간은 넉넉하게 계산하거나 아니면 잊고 있는 게 좋다. 레지오날레는 열차시간을 안 지키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5분 정도 연착은 거의 정시도착이라고 보면 된다. 30-40분 늦는 일도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속열차, 인터시티, 레지오날레가 같은 철도노선을 이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고속열차가 연착하면 순차적으로 인터시티, 레지오날레가 고속열차를 피해 연착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열차가 늦어지면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먹는 게 편하다. 레지오날레에도 기차편명과 시간이 적혀있긴 하지만 무시하고 방향과 정차역만 같다면 다른 레지오날레를 타도 무방하다. 자기가 탈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도 다른 열차가 오면 그냥 타고 오면 된다. 다만 열차를 타기 전에 작은 기계에 표를 넣고 Valid를 시켜야 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불법승차로 간주되니 현지인들 하는 것을 보면서 잘 따라 하면 된다.
역시 레지오날레는 오늘도 연착이다. 일관성 있게 연착하는 것을 보면 어쩐지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탈리아는 역시 만만치 않은 곳이다.
트라니는 그냥 작은 어촌 마을이다. 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가득하다. 포구를 둘러싼 성벽은 나지막하지만 단단해 보인다. 포구의 한쪽 끝에 성당이 보인다. 특이하다. 보통의 경우 역사지구의 중심에 성당과 광장이 있는데 이곳은 성당이 바다와 접해 있다. 중세시대 지중해를 배회하던 이슬람 해적들이 이곳을 가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성당을 만들었을까.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성당일까. 포구에서부터 작은 골목을 지나 만난 성당의 파사드는 무척이나 단아한 모습이다. 위압적이지 않은 크기와 은은한 옅은 갈색의 벽이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부르던가. 절제된 선과 화려하지 않은 파사드(성당의 전면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면서 음지와 양지의 온도차가 제법 느껴진다. 어슬렁거리며 포구를 걷다 보니 갑자기 ‘당’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럴 땐 뭐를 먹는다? 젤라또가 정답이다. 이탈리아의 젤라또는 무척 달다. 그런데 먹고 나도 텁텁하지 않고 개운한 단맛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젤라또도 있지만 대체로 그랬다. 매우 한가한 이곳에서도 역시 젤라또 가게는 인기가 있다. 다른 가게는 텅 비어있지만 젤라또 가게에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온 듯한 여자분들이 정성 들여 젤라또를 고르고 있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한가한 여행자이므로 개의치 않는다.
나도 여자분들이 가장 많이 주문한 피스타치오 맛으로 주문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여자분들이 엄지척을 하며 눈을 찡긋거린다. 멋지게 웃어주어야 하는데, 그만 어정쩡한 웃음이 나와버렸다. 가게 밖으로 나와 모두 포구의 벽에 몸을 기대고 젤라또를 먹고 있다. 젤라또에 끼워 준 비스킷을 숟가락 삼아 떠먹었다. 여자분들은 손을 흔들어 주면서 떠났다. 나의 손은 젤라또에 묶여 있으므로,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한국에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민트색 비슷한데, 이곳의 피스타치오 젤라또는 갈색이다. 너트맛이라서 아주 고소하다. 하긴 피스타치오가 너트류이니 이게 당연한 건데,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트라니는 피스타치오 젤라또의 맛을 알게 해 준 곳이 되었다. 이날 이후 풀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젤라또는 모두 피스타치오만 먹었다.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먹으면서 나에게 이 맛을 알게 해 준 여자분들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