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레타의 저녁...놀라운 변신 그리고 렌터카

이번엔 이탈리아 남부- 4

by 지노그림

트라니에서 기차가 또다시 연착되어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바를레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여행을 조금 피곤하게 한다. 숙소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야 다시 도시를 돌아볼 기운이 생겼다. 간식으로 젤라또를 먹어서였을까. 점심을 거나하게 먹어서였을까. 저녁은 가급적 간단하게 먹고 싶어졌다.

이미 어두워진 저녁. 평범했던 거리풍경을 떠올리며 문을 나선 순간, 낮과는 달리 완전히 변해버린 모습에 놀랐다. 도시의 골목은 할로겐 등으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고, 한산하기만 하던 거리에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되는 것 같다. 도시의 불빛에 홀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며 역사지구를 배회했다. 물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낮에 보아 두었던 청동거인상도 다시 가보고, 점심을 먹었던 식당골목도 다시 가 보았다.



청동거인상은 바를레타의 상징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한 역사적 유물은 아닌 것 같다. 청동상 옆에 적혀 있는 사연을 보니, 근처 해안에서 침몰한 배에서 주워왔다는 것이다. 청동이 필요해서 청동상의 이곳저곳을 잘라다가 다른 곳에 사용하기도 했단다. 나중에 다시 보수하여 지금의 청동상이 되었다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다리 부분이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허벅지에 비해 종아리가 조금 짧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유난히 반질거리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오다가다 만져서 반질해진 것일 수도 있고. 어느 부분을 새로 만들어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일이 아니다. 밤 산책이 이외로 길어졌다.


아무래도 남부사람들의 라이프사이클은 북부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다. 점심도 늦고, 저녁은 더 늦고. 제법 늦은 시간인데도 꼬마들은 물론 아기들도 말똥말똥한 눈으로 엄마 아빠를 따라다니고 있다. 매일 밤마다 이런 것일까? 아니면 오늘이 금요일 밤이라서 이런 것일까?


파랑새를 찾아서 세상을 헤매다가 결국 자기 집에서 파랑새를 찾은 남매가 이런 기분이려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숙소 바로 옆 건물에서 찾았다. 크레이지 핏자라는 곳이었는데 조각핏자를 팔고 있었다. 마르게리타 핏자 한 조각과 고르곤졸라 한 조각씩 두 조각의 핏자와 맥주를 한 병이면 좋을 것 같았다. 인심 좋게 생긴 주인아저씨와 손짓 발짓과 짧은 이탈리아어를 동원해서 원하는 주문에 성공했다. 마침 손님이 없어 심심한 아저씨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한다.


먹다 말고 번역기 앱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다. 아저씨는 핏자가게를 팔고 나처럼 여행이 하고 싶단다.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에게 핏자 가게를 인수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너스레를 떠신다.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즉석에서 악수를 하고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아니고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크레이지 핏자맛을 평한다면 가볍게 먹을 것이 필요할 경우, 일부러 찾아와도 괜찮을 곳이다. 이미 만들어 둔 핏자를 조각내서 팔고 있지만, 만든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오븐에 덥히기만 하면 금방 구운 핏자처럼 바삭하고 고소하다. 가격은 저렴하고, 맥주와 핏자는 웬만해선 배신을 하지 않는다.



다음날 렌터카 사무실을 가려고 길을 나섰다. 지도를 보니 호텔에서 걸어가도 2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을 듯하다. 철길만 건너가면 바로 렌터카 사무실인데 공사 중이라고 길을 막았다. 혹시 임시 통로라도 만들어 두었나 싶어 옆길로 들어섰지만, 어떤 길도 철길 반대편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역시 이탈리아는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느낌이다. 황당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리 와보라는 손짓을 한다. 다가가서 도움을 청하니 짧은 영어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건 나도 이미 보아서 알 수 있는 내용이고, 혹시 택시를 탈 수 있을까 물어보니 외진 곳이라서 택시는 없을 거라며 기차역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자기가 차가 있으면 데려다주겠는데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어서 미안하단다. ‘아니 저기, 선생님이 미안할 것까지는 없는데요’. 대신 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데려다줄 수 있는지 알아봐 주겠단다. 아니 이 친구 친절한 정도를 넘어섰다. 몇 번을 친구에게 전화하더니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서 미안해한다. 잠깐 쉬어갈 겸 이 친구의 공방구경을 하고 있으니 자기가 만든 거라며 나무판에 음각으로 새긴 조그만 노트를 선물한다. 내가 자기 시간을 뺏은 것도 미안한데 이런 환대라니. 이탈리아 남부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갈 것 같다는 느낌이다.



결국에 다시 기차역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택시를 타고 렌트가 사무실로 갈 수 있었다. 신시가지를 가로질러 역으로 가는 길은 역사지구와는 사뭇 다르다. 아침부터 조금 번화하다(고는 하지만 순전히 이곳 기준으로 번화한 것이다. 서울 기준으로는 일요일 아침 9시 정도 수준이다)


렌터카 사무실 역시 한가하다. 예약을 할 때 선택가능한 차량이 달랑 5대이고 그나마도 모두 수동기어 변속차량만 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다. 두 사람의 직원이 카운터를 보고 있다가 ‘드디어 손님이 왔다’는 즐거운 표정으로 환대를 해주니 좋긴 한데 과연 월급이 제때 나올 만큼 손님이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이다.


뭔지 모를 서류(렌터카 회사를 믿어야지, 별 수 없다)에 사인을 하고 있으니, 어디를 갈 거냐고 묻는다. 마테라에 간다고 했더니 대뜸 스노체인을 구비해야 한단다. 아니 3월에 이탈리아 남부에서 왠 ‘눈’을 걱정해야 하냐고 했더니, 로컬레귤레이션이 그렇단다. 그러면서 스노체인 대여비로 하루 6유로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청구한다. 진짜 규정이 그런 건지 동양에서 온 ‘호구적인 얼굴’을 가진 나에게만 권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선량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추가비용을 지불한다.


3월의 이탈리아 남부에서 눈을 걱정하면서 스노체인을 구비하라는 지방정부의 사려 깊은 배려심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모기나 없으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탈리아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 단테도 그중 한 명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은 알프스 남쪽은 아프리카와 같다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3월에 눈이라니, 이게 농담이라 해도 고약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여행자의 들뜬 마음을 핑계로 처음 만난 사람과 이게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일이 있다. 이름을 교환하는 일이다. 나를 응대해 준 환한 미소의 직원은 ‘마리엘라’라고 했다. 아니 ‘마리올라’라고 했던가. 차를 설명하면서 차에 여기저기 작은 흠집이 있다고 한다. ‘Could I add some more?’ 라며 아재 농담을 하자 슬쩍 차트를 내려다보고는 ‘No, problem. You can add whatever you want’라며 씨익 웃어준다. 아마도 슈퍼커버 보험에 가입한 것을 확인한 거겠지. 이 보험이 비싸긴 하지만 거의 모든 사고에 대해 보험처리가 되니 여행자에게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보험이다. 다만 비용은 생각하지 말자.


차 안에서 마실 물과 군것질거리를 사려고 벤딩머신을 들여다보며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더니, 마리엘라가 내 동전을 모두 가져다가 물도 뽑아주고 크래커도 한 봉지 챙겨준다. 동전을 구멍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틀에 놓고 올리더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암튼 우리네 자판기와는 조금 다르다.


마리엘라는 바쁘지 않으니 잠깐 외지인과 수다를 떨고 싶었나 보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매우 드문 일인데, 어떤 일로 왔냐고 묻는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가코스프레’다. 가져간 나의 첫 번째 책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을 꺼내 보이면서 사실은 내가 작가다. 풀리아에 오면 다음 책을 쓸 수 있을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고 하니 어제 만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처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만점짜리 리액션을 취해 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좀 부끄럽고 오글거렸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나두 한가하고 마리엘라도 한가하니, 여기서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이틀 후 다시 보기로 하고(차량을 반납하러 다시 와야 한다는 말임)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확실히 남부 사람들은 좀 더 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 사람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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