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0
아일랜드 여행이 무산되면서 새로이 계획했던 동유럽 여행이 내일로 다가왔다. 회사생활하면서 이렇게 긴 휴가를 내어 본 적이 없다. 이탈리아 동료들은 매년 여름 3주, 크리스마스 휴가 2주를 즐겼지만, 한국에서야 어디 그렇게 길 게 쉴 수가 있나. 주변의 동료들에게 눈치도 보이고, 너무 오래 쉬면 자리를 빼 버릴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다.
그치만 올 해는 눈 딱 감고 그냥 떠나기로 했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 오지로 갈 건 아니기 때문에 급하게 결정할 일이라면 어디에서라도 할 수 있겠지.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믿고 가기로 했다. 점심 후 단골카페 사장님하고 잠깐 수다를 떨면서 휴가이야기를 했더니 몹시 부럽단다. 사장님도 떠나보라 했더니, 자기가 없으면 카페가 돌아가지 않는단다.
"나두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예전에 현장에 있느라 거의 두 달간 사무실에 출근 못 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회사는 잘 돌아가더라구요. 같이 일하시는 동료분들 믿고 떠나세요"
가고 싶으시단다. 커피와 관련된 여행을 늘 꿈꾸고 계신단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커피농장을 방문하는 것이 위시리스트이긴 한데, 좀 무서운 동네라서 혼자 갈 엄두는 못 내겠다고 하신다. 콜롬비아는 나도 무섭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도 평화로운 곳만 골라서 다니는 것이 내 마음도 편하고, 가족들의 마음도 편하다.
이번 여행은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뭐 가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개략 일정과 숙소만 정해 놓고 떠나는 여행이다. 같이 동행하기로 한 친구들도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지난번 토스카나처럼 가야 할 길을 지도상에서 꼼꼼히 살펴보고 시간배분을 하고 하는 쪼잔한 짓은 하지 않았다.
동네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음식도 만들어 먹고, 골목길 카페에서 스케치도 좀 하고, 모르는 사람과 수다도 좀 떨고 하면서 쉬엄쉬엄 2주간을 보낼 계획이긴 한데, 막상 가게 되면 이곳저곳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길 테지. 하루가 끝날 때마다 간단한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이것도 욕심이려나.
같이 동행하는 두 친구, 지마음 작가와 지금사진 작가는 올빼미형 인간에 가깝다. 오늘도 밤새고 온다고 하더라. 그에 비하면 나는 노인형이라 새벽잠이 없는데, 아마 새벽이 일어나서 회사메일 접속해서 일 비슷한 걸 하면서 새벽시간을 보낼 테지. 아침이 되어 동네 산책을 슬쩍하고 오면 올빼미형 인간들도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겠지. 아마도
각자의 행동패턴은 다르지만 '느긋하게 여행을 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시작한 여행이다. 홍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번 여행 다녀와서 세 사람 '쫑'날 것 같은데라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그럴지도 모르지. 원래 같이 여행을 하면 의견차이가 생길 테고 서로 마음에 꼭 담아두고 있다가, 조그마한 불씨에 화르륵 타올라서 그만… 여행 다녀와서 서먹해졌다부터 웬수가 되었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뒷이야기를 가끔 듣는데, 우리는 그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