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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12. 2020

볼로냐 - 미친 도시 그리고 두 개의 탑

방구석 드로잉 여행 18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가을. 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볼로냐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이태리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광적인 사랑은 익히 들어왔던지라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을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출장 중 만났던 몇 사람은 모레노 심판의 불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은 일부러 화제를 꺼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이라는 브랜드 네임이 전 세계 특히 이태리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음은 자명한 듯 했다.     


  이태리에서 처음 경험한 도시여서 그런지 볼로냐는 각별하게 느껴진다. 작은 소도시이긴 하지만 볼로냐는 아주 오래된 대학이 있는 젊은이들의 도시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아주 조그마한 소도시도 일부러 찾아다니지만 2002년 이태리 관광하면 로마, 베니스, 피렌체, 밀라노 정도가 거의 다였다.


  환승시간까지 포함하면 16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볼로냐에 도착하니 이미 밤 11시. 그래도 초행길이라고 본사에서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누가 이 늦은시간까지 날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냥 택시 운전사를 보낸 줄 알았더니 안드레아라는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입사와 동시에 일본지사 근무가 확정되어 본사에서 교육 중에 있다고 했다. 선한 웃음과 그것에 어울리는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던 것이 인상적이다.    


  이태리 사람이 말이 많다고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동안 마치 이제 막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클래식카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일본까지 가져 갈 순 없어서 고민이라는 둥, 일본생활이 너무 기대된다는 둥 묻지도 않은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이야기한다. 내가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서양에서 사생활 관련된 질문은 실례라는 말은 이태리에서는 예외로 하고 싶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했냐는 질문, 아이는 있냐는 질문, 나이가 얼마냐는 질문 등을 수없이 들었다.


  본사에서 맞이한 첫 금요일 저녁 안드레아는 나에게 무슨 계획이 있냐고 묻는다. 계획이 있을 턱이 있나. 보름달이 뜨면 발광하는 늑대들처럼 금요일 밤만 되면 미치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을 알고 있다고 자기랑 일본지사 직원이랑 셋이서 볼로냐에 가자고 한다. 입장료는 20유로이니 그건 각자 부담이고 자기 차로 갔다가 오면 된단다. 거절을 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과연 약속된 시간이 되니 호텔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시내 구석에 대충 주차를 하고 안드레아를 따라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 따라가니 웬 컴컴한 지하실 입구로 데려간다. ‘이거 뭐지’하는 사이에 안으로 끌려 들어갔더니 과연 미친 곳이었다.   


  스콜피언스를 흉내 낸 밴드는 라이브로 공연을 하고 있었고 내부는 뽀얀 담배연기로 가득한 공연장과 술집을 합쳐 놓은 그런 곳이었다. 2002년 이태리에서는 식당에서도 마음껏 흡연을 즐길 수 있었다. 20유로의 입장료에는 맥주가 한 병 포함되어 있었고 추가로 맥주를 원하면 알아서 사서 마시란다. 자기는 운전을 해야 하니 맥주 한 병이면 족하다고 소리를 질러가며 이야기를 한다. 이곳은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대화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실 대화가 필요한 곳도 아니었고 음악을 즐기고 소리 질러 따라하고 춤추고 마시며 열기를 발산하는 그런 곳이었다. 열기를 발산하는 것에는 남녀노소가 없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젊은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연령층이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젊음을 만끽하고 인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의 20대는 어땠는지 기억을 되살려 본다. 80년대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로 인해 아마도 이렇게 대놓고 즐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일탈이 달갑지 않던 내 성격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고 있었을까. 나이만 어렸지 ‘꼰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계를 깨뜨리지도 않고 미쳐보지도 않고 지내온 젊은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50대가 된 지금도 너무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살아오면서 하고 싶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 그 일이 아직 가슴을 뛰게 한다면 다리가 후들거리기 전에 한 번 더 도전해 보라고 하고 싶다. *무덤에 가기 전에 못 먹은 한 숟가락의 밥이 아쉬울지 아니면 못 이룬 꿈에 대한 미련이 아쉬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 파괴왕으로 유명한 주호민 작가의 <무한동력>에 나오는 글귀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실제로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흥에 겨워진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젊은 아가씨 들은 웃옷을 벗어 던지고 토플리스 차림으로 춤을 추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친 곳이다. 안드레아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한다. 금요일은 매주 돌아올 것이고 미친 콘서트도 매주 계속될 거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이런 낙관적인 녀석 같으니라구.


  지난 밤 유흥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다음날 아침 산책을 핑계로 그 장소를 찾아 볼로냐의 골목을 헤맸다. 희한하게 같은 길 같은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딱 한 번의 기억만으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다시 만난 안드레아한테 그날 밤 우리가 갔던 곳을 물으니 자기는 기억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런 미친 곳을 어떻게 기억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아마도 그보다 훨씬 미친 곳을 서울과 도쿄에서 경험해서 그런 것 같다며 깔깔 거린다. 서울에서 경험한 미친 곳이라니, 도대체 어디를 갔던 거니.       



  이 그림에서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면 십중팔구는 맞은편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계단은 도서관의 입구이다. 날씨가 좋을 때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고 젊은이들은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이태리의 젊은이들은 애정표현에 인색하지 않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앉았던 계단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면 도서관 벽에 오래된 사진들과 이름이 붙어있다. 무솔리니의 독재에 항거했다가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볼로냐는 이태리 공산당과 아나키스트의 성지이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일제의 폭압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던 많은 아나키스트와 좌익운동가들이 있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에 좌우의 구분이 있을 리가 없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역사는 이런 고귀한 분들을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금기시되어 있던 이런 이야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꺼내게 될 때까지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심스레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더 적극적으로 발굴을 해서 우리도 서울 시청 앞 벽면을 이렇게 기억해야 할 얼굴과 이름으로 장식을 하면 어떨까. 김구, 윤봉길, 안중근, 유관순, 동주와 몽규, 장준하 그리고 지금은 이름 없는 선열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분들을 기릴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을 될 거라고 생각한다.   

 



 도서관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다. 그냥 평범한 도서관이지만 도서관 내부에 조성되어있는 홀에서는 가끔 사진전과 같은 행사를 하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멋진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내가 도서관을 찾는 이유는 도서관 저 구석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뭐라고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럽에서 양질의 화장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유료 화장실조차 청소상태가 불량하고 냄새가 난다. 아내말로는 여자화장실의 경우는 변기커버조차 없어서 난감할 때가 많다고 한다. 조그마한 아이라면 충분히 변기 안에 빠질 수도 있다고 여행 중에는 되도록 물먹는 것도 자제한다.

 

  “엄마, 여긴 변기가 이상해요. 어디 앉아요? 남자 화장실인가 봐요.”


  이런 형편이니 훌륭한 화장실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끔 사용하는 방법은 5성급 호텔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치 이런 호텔은 자주 이용한다는 듯 약간은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당당한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이용한다. 왜 5성급 호텔이냐 하면 5성급이어야 로비에 화장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멋진 삼지창을 들고 훌륭한 근육을 뽐내고 있는 넵튠(포세이돈)의 청동상이 있다. 넵튠의 밑에는 풍만한 가슴으로 물총을 쏘아대고 있는 바다의 님프들도 있다.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구경도 재미있다. 혼자 여행하는 일이 자주이다 보니 내 사진을 찍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이건 핑계이고 나는 내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들어가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싫어져서 그랬던 것 같다. 반대로 생각해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니 내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난 오늘도 카메라에 나를 담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포토존라고 좋아하지만 볼로냐의 상징은 두오모도 아니고 넵튠도 아니고 광장도 아닌 탑이다. 탑이란 말이 적당할지는 모르겠는데 이태리 말로 토레(torre)라고 한다. 영어의 타워에 해당하는 말이다. 중세시대 볼로냐의 유력가문 마다 너도나도 타워를 건설하기 시작해서 한때는 180개가 넘었다고 한다.


 타워들의 생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가문의 몰락과 함께 타워들은 사라지고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았고 중심에 있는 두개의 타워가 유명하다.              

 


  타워들이 우후죽순처럼 도시에 여기저기 마치 타워크레인처럼 솟아 있던 중세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대한 페니스를 상징하듯 도시 곳곳에서 솟아 오른 타워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해보였지 않았을까. 페니스에 대한 이태리 남자들의 자존심을 이야기해주는 일화가 있다.


   2차 대전 때였던가? 보급물자 중에 콘돔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는 대로 받을 것이지 보내는 쪽에다 1cm더 큰 콘돔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보내는 쪽은 기분이 나빴지만 콘돔박스에 소형사이즈라고 표기를 해서 보내는 것으로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깟 1cm가 뭐라고 이 소동이겠냐 하시겠지만 수컷들은 안다.

 

 이제 볼로냐는 더 이상 거대한 탑을 가지고 경쟁하지 않는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주도답게 번성하는 산업과 물류의 중심도시로 바쁜 직장인들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어둠이 도시로 스며들면 사람들은 뒷골목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프로슈토와 와인을 홀짝거리며 다시 돌아올 내일을 준비한다. 이렇게 볼로냐의 밤은 깊어가고 다시 찾아온 새벽은 또 다른 하루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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