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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Sep 18. 2020

볼차노와 돌로미티 - 이태리 알프스 속으로

방구석 드로잉 여행

  도시에서 한참을  들어간 시골이라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뮌헨에서의 전시회 일정을 끝내고 근처의 한적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격도 적당하고 외관도 깨끗한 호텔  식당(Mara Restaurant & Hotel) 찾았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흠이긴 하지만 훌륭한 터키식 저녁식사와 넓고 깨끗한 방을 생각해보면 좋은 선택이었던  같다.  가지  무서웠던  방안에 사슴 머리 박제가 떡하니 걸려있어서 수건으로 덮어 놓고 잠을 청해야 했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에 잠을 깬 김에 봄의 향기를 가득 담은 산들바람을 친구 삼아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자그마한 동네에는 아직 인적이 없다. 마을을 가로질러 근처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다다르자 다람쥐 한 마리가 낯선 이를 경계하면서 마치 숲 속의 친구들에게 경보를 울리듯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숲 속엔 들어가지 않을 거야. 내가 너보다 더 무섭다고 웃으며 이야기를 해주고 호텔로 돌아온다.  


  오늘은 뮌헨 공항에서 차량을 반납하고 플릭스(Flix) 버스로 인스부르크를 거쳐 볼차노로 가야 한다. 플릭스 버스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도시 간 이동버스인데 저렴한 비용으로 젊은 여행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공항을 출발한 버스는 버스터미널을 거쳐 시내를 벗어나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를 향해 달린다. 버스가 국경을 넘는다. 아무런 제한 없이 이렇게 쉽게 국경을 넘어가다니. 처음 겪는 일도 아니면서 볼 때마다 항상 부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의 목가적인 풍경이 나타나고 이 길을 선택하면서 예상했던 대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가히 환상적이다. 초록의 초원과 소떼들, 그리고 그림엽서에 나올법한 풍경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스부르크를 지난 버스는 이제 이태리 돌로미티 산군으로 들어선다. 아마도 내가 직접 운전을 하면서 이 길을 지났으면 이렇게 오롯이 주변 경관을 즐기지 못했으리라. 거대한 암벽과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 그리고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조그마한 산골 마을들. 4시간 정도를 걸려서 볼차노에 도착했지만 나에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길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나한테 냄새(?)라도 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옆자리를 비워둔 채 목적지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도 누가 옆자리에 타서 인사라고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으면 이렇게 호젓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겠지.         


  볼차노는 돌로미티 산군의 초입에 자리한 도시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이태리와 오스트리아에 의해 번갈아 가면서 점령당하면서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이태리 말로는 볼차노(Bolzano)이지만 독일어로는 보첸(Bozen)이라고 부르며, 교통표지판도 두 가지 언어로 되어 있다. 이곳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무슨 그런 행운을 가지고 태어났냐고 할지 모르지만 두 나라 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알프스의 많은 산악인들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친구였을 동료들에게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돌로미티 산군에 들어서면 그 당시 사용했던 참호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프스의 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까닭에 내가 생각하는 이태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건물의 외관도 그동안 보아왔던 것과는 다르고 거리도 깨끗하다. 얼핏 보면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시골마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돌로미테 탐방을 시작하는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돌로미티는 이태리 북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지를 부르는 말이다. 설산과 초원이 어우러진 스위스 알프스와 달리 수직 바위와 고원지대의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 여름에는 시원한 곳을 찾는 피서객으로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다. 고원지대여서 그런지 4월 초까지도 스키를 탈 수 있을 정도이다.


                    


  알프스의 산자락과 초원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하이디와 피터가 양 떼를 몰고 나타날 것 같다. 딸아이와 조카아이를 데리고 하이디 마을로 유명한 마이언펠트를 간 적이 있다. 이태리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오니 눈 덮인 산들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은 뽀로로가 사는 곳에 온 것 같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운전하는 나는 아주 무서웠다.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고 스프링롤을 먹는데 고추기름을 발라 주었더니 계산도 하기 전에 한 개씩을 손에 들고 꿀꺽한다. 이것도 무서웠다. 그날 휴게소에 남아 있던 스프링롤을 모두 먹어 치웠던 것 같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출발.


  눈 덮인 풍경이 너무 근사해서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 잠시 차를 세웠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마치 처음 눈을 보는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마이언펠트에 도착하니 이미 어둑어둑해진 저녁이었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추운데 오느라고 힘들었겠다며 아이들에게 코코아 차를 대접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고 딸아이는  내 옆에 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맛있다고 영어로 어떻게 말해?” “음, 베리 딜리셔스”. 아이는 한두 번을 되뇌고 아주머니에게 가서 “맛있다”는 말을 하고 수줍어했다. 아이가 귀여워진 아주머니는 내 솜씨가 아니라며 손을 휘저으며 요 앞 미그로스(Migros)에 가면 살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굳이 알려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코코아 가루를 사 가지고 가고 싶다는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슈퍼마켓에 가야 했고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말로는 학교에 가지고 가서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 코코아를 타 먹었다고 한다. 마이언펠트 하이디 마을을 찾아갔지만 낮에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낸 탓에 결국엔 코코아 가루만 사 가지고 온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도 그날 낮에 놀던 마을을 하이디 마을로 기억하고 있다.


  돌로미테에서 가장 유명한 산골 마을로는 볼차노에 가까운 오르티세이(Ortisei)와 베네치아에서 가까운 코르티나담페초(Cortina d'Ampezzo)가 있다. 마을에 도착하면 케이블카로 상당히 높은 곳까지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마을 자체도 예쁘지만 돌로미테는 트레치메 등으로 이미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 산악인이 아니어도 트레킹화만 있다면 고원지대에 잘 만들어 놓은 코스를 돌면서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어느 곳이 되었든 한번 들러서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면서 경이로움을 느껴보시길······.


  7월에서 8월 한여름 성수기 또는 스키시즌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예약은 필수이지만 그 외의 계절은 그다지 붐비지 않으므로 즉흥적으로 찾아가도 무방하다. 시즌이 모두 끝난 9월에 간 적이 있었는데,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지만 날씨가 협조를 하지 않았다. 케이블카로 오른 정상의 고원은 구름에 갇혀 있었고 고원 주변의 산봉우리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암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이 간 일행들과 가벼운 트레킹을 즐긴 후 산장에 딸린 식당에서 먹는 맥주와 슈니첼(딱! 돈가스 비주얼과 맛이다)은 역시 절대 실패하지 않는 조합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영국에서 온 것 같은 단체 관광객과 같은 케이블카로 타게 되었다. 유난히 튀는 복장을 입은 떠들썩한 중년의 여성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저분 직업이 무엇일까 하다가 가이드다. 아니다 이태리 가이드치곤 영어가 너무 자연스럽다며 우리끼리 내기를 하였다. 초면에 대놓고 직업을 물어볼 순 없고 “너무 멋진 곳인데 구름 때문에 아쉽다. 그렇지 않냐”고 슬쩍 말을 붙이니 “그렇다”고 하면서 자기는 괜찮은데 같이 오신 손님들이 섭섭해하시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빙고! 가이드가 정답이었고 그날 저녁 근사한 와인은 우리 차지였다.


  영국에서 살다가 이곳이 좋아서 여기에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그냥 그래도 되는 자유로운 삶이 부러웠다. ‘토스카나의 태양아래’에서 다이안 레인이 그냥 여행 중에 충동적으로 집을 사고 새로운 삶과 사랑을 토스카나에서 찾았던 것처럼, 돌로미티의 가이드도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리라. 혼자 여행 중이었다면 아마도 그 뒷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저녁식사라도 초대했겠지만 일행이 있고 일정이 있던 여행이라서 아쉬움을 뒤에 남겨놓아야만 했다. 언젠가 다시 돌로미티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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