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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Nov 25. 2021

발사믹, 람부르스코 그리고 페라리

모데나, 이탈리아


  어스름 저녁 기운이 몰려오면서 낮 동안 꾸물꾸물하던 하늘에 드디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마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 하필이면 12월에 출장 일정이 생겨서 모데나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는 바로 전 금요일, 이탈리아 본사도 송년회를 한다. 현장 직원들과는 별도로 해외영업부 직원들과 우연찮게 마지막 근무일까지 본사에 남은 해외지사 직원들끼리 모여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사적인 모임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공적인 모임으로 발전하면서 모데나의 핫플레이스에서 송년회를 가지게 되었다.       


  카페 콘체르토는 원래 시청사에 속한 부속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두오모와 피아차가 바라보이는 모데나의 명당자리이다.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하는 저녁식사는 늘 그렇듯이 식당이 문을 닫을 때가 되어야 끝이 난다. 공짜 식사에 즐거워하는 직장인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다. 와인병은 늘어만 가고 횡설수설 끝도 없이 수다를 떨고 있다. 이상하게 취하면 영어도 잘 나오고 잘 알아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길을 지나 호텔로 돌아오면서 살짝 내일 아침 걱정이 된다. 뭐 어떻게 되겠지. 와인으로 인한 취기는 사람을 대책 없이 낙관적으로 만든다.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호텔 문을 나서는데 문이 안 열린다.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있는 까닭이다. 호텔 종업원과 어찌어찌해서 문을 나섰는데 역으로 가는 길이 감감하다. 택시를 부를 수도 없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평소 같으면 10여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짧은 길이었지만 눈길을 헤치며 가느라 몇 배의 시간과 힘이 든다. 이곳의 겨울은 습하다. 안개라도 끼게 되면 5 미터 앞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심하다. 짐작했듯이 역시 모든 기차는 연착이 되었다. 호텔에서 출발하여 로마의 호텔로 들어가기까지 족히 12시간이 걸린 듯하다. 아침에 출발했다가 저녁때 도착했으니 말이다. 이후로 12월 이탈리아 출장은 절대 사절이다.     



  모데나는 작은 도시이지만 로마가도가 지나갔을 정도로 오래된 도시이다. 모데나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발사믹 식초, 람부르스꼬 그리고 페라리로 유명하다. 와인으로 발효시켜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발사믹은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종갓집의 씨간장처럼 매년 없어지는 양만큼만 채워 넣어 그 가치와 맛을 유지하고 있다.


나에게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발사믹이 있다. 출장 갔다가 선물로 받은 것인데 아껴두었다가 먹으려고 잘 보관하다가 그만 먹는 것을 까먹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려고 살림살이를 뒤집다가 이것이 발견된 것이다. 족히 10년이 넘는 동안 선반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뚜껑이 열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조그마한 단지처럼 생긴 병인데 기울여보니 마치 두부를 만들 때 몽글몽글하게 생기는 덩어리처럼 작고 까만 덩어리들이 윤기를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표에 있는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발사믹 비니거와 체리로 만든 잼이다.


그 맛을 어떨까 참을 수 없는 궁금함에 드디어 병뚜껑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병뚜껑이 꼼짝을 하지 않는다. 고무장갑을 끼고 해 보고, 뜨거운 물에 거꾸로 담갔다가 해보고, 옆집의 덩치 큰 아저씨도 해보고, 결국엔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도 유통기한이 너무 오래되어서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장식용으로 보관 중이다.      


  람부르스꼬는 달콤하면서 톡 쏘는 탄산의 맛이 일품인 와인이다. 일반적인 스파클링 와인과 다르게 레드이면서 스파클링의 상쾌함과 달콤함이 있다. 종류와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나는 그냥 식당의 수도꼭지(?)에서 유리병에 담아주는 것 같은 격식 없는 람부르스꼬를 좋아한다. 둘이 가면 한 주전자, 혼자 가면 반 주전자. 발사믹을 살짝 끓여 자작자작하게 만든 소스를 뿌린 모데나식 스테이크에 람부르스꼬를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지만 이것이 빠진다면 진정한 여행이라고 할 수 없지. 잘 걷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실컷 떠들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즐거움이 아닌가 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꼬맹이들도 와인을 일찍 시작하는 것 같다. 물론 도수가 있어서 아이들에게 줄 때는 물을 타서 준다. 와인에 물을 탄 맛이라면 누구나 그 밍밍함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잘 익은 람부르스코는 물을 타도 그런대로 마실만하다.      


  슈퍼카를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페라리 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근처의 자동차 트랙에서 인스트럭터와 함께 페라리를 직접 운전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들었는데 해보지 않았다. 엔초 페라리가 레이싱카를 만들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농기계를 만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엔초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러고선 만든 것이 람보르기니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람보르기니의 로고인 황소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이 이야기를 해준 이탈리아 친구에게 예전에 한국에서 트랙터 대신에 황소로 밭을 갈았다고 하니 진짜냐고 되물으면서 박장대소를 한다.         

이탈리아 친구들 언제나 리액션이 좋다.

매년 만나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똑같이 재미있어한다.



  모데나는 이 세 가지 외에도 세계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두오모와 종탑이다. 피렌체나 밀라노의 두오모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모데나를 방문했다면 꼭 들려야만 하는 곳이다. 물론 두오모 안에서 복잡해진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좋지만 오래된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거나 재래시장을 가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두오모 근처에 자리 잡은 메르카토(영어의 마켓)는 예나 지금이나 모데나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일 것이다. 색깔을 너무나 곱고 예쁘게 배치해 놓은 과일과 채소가게, 먹음직스러운 염장된 돼지 뒷다리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정육점, 돌처럼 딱딱한 파마잔 치즈 덩어리, 감베로, 아라고스따, 마짠꼴라, 스캄포, 그란치오,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갑각류를 모아 놓은 생선가게, 먹음직스럽게 만들어놓아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가게, 꽃가게 우리네 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다양한 냄새와 시끌벅적한 소음과 웃음소리. 내가 여행지에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날에는 맛 좋은 햄과 프로슈토를 조금씩 잘라내어 팔기도 한다. 얇게 저민 프로슈토를 들고 와인 잔 술을 파는 곳에 가서 가볍게 한잔 할 수도 있다.          


  산책 삼아 구시가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두깔레 궁이라고 불리는 곳을 찾을 수 있다. 이 유서 깊은 건물은 군인과 카라비니에리를 교육하는 군사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학교로 알려져 있다. 카라비니에리는 경찰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디에 위치하는 조직이다. 테러, 국가안보와 같이 일반 경찰과는 다른 업무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내 앞에 가던 차량이 유턴을 하길래 나도 무심결에 따라 했다가 카라비니에리에게 잡혔다.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나는 당연히 당황했지만 나를 잡은 그는 더욱더 당황한 눈치였다.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헤어진 기억이 있다. 아니, 테러와 같은 중대범죄를 위한 조직이면 나의 불법유턴 정도에는 눈을 감고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이런 카라비니에리를 이탈리아 사람들은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별로 똑똑하지 않은 친구들이 제복을 입고 뽐내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정도 하고 여기는 것 같다.        



  2012년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 진도 5 이상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진원에 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던 본사의 공장도 30퍼센트 이상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 곳을 잃었다. 한동안 집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 무서워서 텐트를 치고 밖에서 잠을 잤었다고 했다. 모데나의 두오모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지진 이후에 모데나를 갈 때마다 천막으로 외부를 가리고 복원공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몇 년 전 갔을 때 드디어 복원공사가 끝나고 멋진 파사드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이럴진대 두오모를 사랑하는 모데나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을 할 수 있다. 자연재해는 아니지만 우리도 2008년 숭례문을 잃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비록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유명하지 않은 곳이지만 혹시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저녁때쯤 카페 콘체르토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서 종탑의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보다 멋졌던 일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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