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 후의 이야기

동유럽 일기-16

by 지노그림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후, ‘의리’는 가치를 바라고 ‘서운함’만 마음에 남아서 그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세 친구의 15박 여행 후에는 과연 어떤 마음이 남아있을까 사뭇 궁금했다.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중 여행 뒤풀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나 보다.


‘일단 우리 동네 카페(내가 우리 동네 카페 사장님이 엄청 미인이라고 해서 그랬나?)에서 만난다. 지금사진이 영종도 펜션을 하나 빌려 놓을 건데 그곳에서 수제비와 김밥을 만들어 먹기로 한다’고 했다고 한다. 뭐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원래 술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는 것 아니었어. 그러라고 ‘신’께서 귀를 두 개 주신 거고. 내 생각이었나 보다. 지마음과 지금사진은 진심이었다.

그래, 그러면 가면 되지. 여행에서 돌아온지 2주 뒤에 동네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사진은 카페사장님 얼굴을 제대로 못 보았다고 한다. 부끄러워서 혹은 수줍어서 혹은 없어 보일까 봐, 흘끔 쳐다본 게 다여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마음은 카페사장님이 환한 미소로 반겨주어서 좋았다고 했다. 아무도 ‘미인’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여간 안맞아, 안맞아.


근처 마트에서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를 좀 사고 숙소에 도착. 주변환경이 인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신도시 주변에 펜션촌을 만들긴 했는데, 어쩐지 썰렁하다. 주변에 식당도 없고 그래도 편의점은 하나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사진이 가져온 막걸리는 상당히 걸쭉해서 얼음을 넣고 마셔야 제맛이라서 둘이서 열심히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설렁설렁 얼음컵만 몇 개 사가지고 왔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곳에 외국인 가족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얼떨결에 인사를 주고받긴 했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여행지가 이 근처에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지마음이 솜씨를 보여주겠다며 열심이다. 야채를 살짝 볶고 김밥용 구운 김에 밥을 얇게 깔고 아무튼 열심이다. 지금사진은 집에서 잘 반죽해서 숙성을 시켜온 수제비를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뜯어서 멸치와 다시마를 잘 우려낸 육수에 넣고 있다. 나는 뒷짐을 지고 ‘노동요’ 대신 ‘노동수다’를 떨어주고 있다. 동영상도 찍어주고.

들인 노동과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 보면 굳이 이렇게 만들어 먹을 일일까 싶다. 여행 중에서야 이런 것을 사 먹을 수 없으니 만들어 먹었다지만 왜 한국에 와서까지 만들어 먹겠다고 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여행 중에 만들어 먹었던 수제비가 너무 맛이 있었다. 이 맛있는 걸로 수제비를 만들어 식당을 해보자는 농담이 오고 갔었다. 지마음은 국물요리는 못하지만 김밥은 자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름하여 ‘고사우수제비’와 ‘빙구김밥’이 오늘 선을 보이는 날이다. 으음, 고사우에서 식당을 오픈하는 것은 심사숙고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우리들 사이에 ‘팩폭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오늘의 주종목은 풀라에서 사 온 와인과 지금사진이 광속주문에 성공한 고급막걸리이다. 식전주로는 지마음이 가져온 유자술이 있다. 상당히 진한 막걸리라서 그냥 마시는 것보다는 얼음컵에 부어서 마시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흑맥주도 한 캔 마시고, 와인 마시고, 막걸리 마시고. 이렇게 짬뽕으로 섞어 마셔도 괜찮을 정도의 속도로 마신다. 마시는 동안에도 이야기와 웃음은 끊이질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을까. 기억나는 것은 다음번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우리 지난번 여행에서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었고(비록 안 맞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긴 했지만) 즐겁고 아쉬웠던 기억만 있다고 했다.


아, 내년에는 무슨 핑계를 대고 장기휴가를 내야 하나.


그로부터 수주일 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을까. 인사동에 남도음식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 이야기가 나왔다. 지명으로 식당이름을 정했는데, 그게 특이한 이름이라서 혹은 식당주인이 영화감독이라서 좀 알려진 식당이다. 그런 식당이 있었냐며 지마음이 데려다 달라고 했다. 서른이 넘은 어른이 길을 몰라서 데려다 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튼 날을 잡아서 같이 가기로 했었다.


제철음식이란 말이 있다. 모름지기 이 음식은 이때 먹어야 가장 맛있다는 뭐 그런 말일테지. 이 식당메뉴 중에 꼬막이 있다. 꼬막이 맛있는 계절은 찬바람이 불어올 때이다. 살이 탱탱해져서 꼬막 한가득 꽉 찬 맛이 최고다. 그런 꼬막을 두고 한여름에 패류를 먹는 것은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가기로 하긴 했는데, 지마음 마음이 변했다. 지마음이 왜 지마음이냐 하면 ‘지 마음대로’의 준말이라서다. ㅋㅋㅋ. 꼭 거길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잘 되었다. 그럼 다른 곳에서 보자.


자루우동을 잘 만드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마침 내가 그 근처에서 미팅이 있어서 아주 좋았다. 미팅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는 대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니, 약속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모였다. 이탈리안 젤라또를 간판으로 내 건 카페였다. 여행 때 먹었던 피스타치오가 생각나서 먹었는데 그냥 그저 그랬다. 좋은 술은 멀리 여행을 하지 않는 것처럼, 좋은 젤라또도 멀리 여행을 하지 않는가 보다. 지금사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너무 성의 없이 물컵에 얼음 몇 개 넣고 마지못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준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바로 이탈리안 스타일 아이스 아메리카노인가.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넣어달라고 해서 주긴 주겠지만, 이건 제대로 된 커피는 아니다 뭐 이런 말인가. 이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끼리 웃었다. 유럽여행 중에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했다.


덥다 더워. 카페에서 자루우동집까지 겨우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아스팔트의 열기까지 더해져서일까. 너무 덥다. 저녁 먹기에 약간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몇 테이블에는 손님들이 있다. 조금만 늦었으면 밖에서 대기를 할 뻔했다. 우동을 한 그릇씩 주문하고 술안주로는 뭐가 있나 찾아보다가 깔라마리 발견. 기쁜 마음에 깔라마리를 주문하고 뭐가 나올지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냥 냉동 오징어 튀김에 마요네즈를 잔뜩 뿌렸다. 기대했던 그것이 아니라서 급 실망. 술은 맛있었다.

너무 일찍 만나서 저녁을 먹고 나도 7시밖에 되지 않았다. 선술집에 가서 다시 시작. 그러고 나서도 뭔가 아쉬워서 맥주집에 가서 다시 한잔. 한창 더운 날 이게 뭐 하는 짓이었나 싶다. 요 며칠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금 우울한 기분이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연관된 일이라서 말끔하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남은 사람은 남고 떠나게 될 사람은 떠나게 되는 문제같은 거라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우울한 건 우울한 거지. 우울감이 내 어깨 위에 똬리를 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말이다. 근데 아픈 부모님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변에 이런 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아 놀라게 된다. 난 침대에서 죽기 싫은데. 가능하면 길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


즐거움만 있는 삶이 얼마나 지루하고 권태로울지 알고 있다. 너무 우울하지 않도록 너무 즐겁지 않도록 적당한 중용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가끔씩은 쓸모없는 일도 하면서 말이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쓸모없는 일을 하며 놀다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인사이트가 나올지. 내년에도 쓸모없는 여행을 가서, 쓸모없는 일을 하고, 쓸모없는 농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보름간의 일기를 쓰다 보니 정말 아무데도 쓸모없는 일을 많이 하고 다니긴 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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