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15
체크아웃 두 시간 전. 남은 와인 몇 병을 넣었더니 올 때와 달리 가방이 꽤 무거워진다. 그래도 비교적 공간이 많이 남아있는 내 가방에 버리기 아까운 것들을 열심히 구겨 넣는다. 쓰고 남은 코코넛 향이 좋은 샤워젤, 샴푸, 간식거리들, 남은 키친타월…
프런트에 짐을 맡기면서 혹시 택시를 불러줄 수 있냐고 했더니, 짐을 잔뜩 실어줄 수 있는 승합차형 택시는 미리 예약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앙역에 가서 기차를 타는 것이 훨씬 좋다고 조언을 해준다.
확실히 독일계 사람들은 실용적이라는 느낌이다.
오늘 마지막 일정은 벨베데레 궁전이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술관을 가기 전 브런치를 해야 한다. 어제 갔던 카페 뮤지엄에 다시 가기로 한다. 지마음이 어제 가지 못한 곳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만은 아니고 오스트리아식 음식으로 브런치를 하는 다른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마음에게는 일부러 가는 것이라고 생색을 무척 내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한산하다. 거의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듯한 화장을 한 종업원도 그대로 있고 수습생인 듯 어리바리 종업원도 그대로이다. 아침부터 부담스러운 메뉴이긴 하지만 미니 굴라쉬를 주문하고 오스트리아의 굴라쉬는 어떨까 내심 기대를 하고 있다. 미니라고 해도 아침으로 먹기엔 부담스러운 모양새이다. 내 입맛에 맞았던 굴라쉬를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이렇다.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고 딱 한 번씩 먹어본 것이므로 일반화 할 수는 없으니 참고만 해주시길.
맛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평소에도 별로 블로거맛집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라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맛집이라고 후기를 남겨놓는 것은 더욱 믿지 못한다.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생각을 해보면 그렇다. 체스키크롬루프에서 들렸던 식당을 예로 들어보자. 원래 가려던 곳에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맞은편에 있는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 그런데 이외로 맛이 있네. 그렇다면 이 집이 맛집일까. 잘 모르겠다. 내 입맛을 일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서 여행을 할 때 식당을 고르는 기준이다.
유명 관광지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식당보다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에 있는 식당을 선호한다. 관광지가 보이는 곳에 있는 식당은 현지인보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격도 비싸다.
슬쩍 들여다보고 현지인이 많은 곳을 선호한다. 기왕에 여행을 갔는데 그 동네 현지식을 맛보려면 아무래도 현지인이 많이 가는 곳이 그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의 메뉴 또는 주방장 메뉴를 추천하는 식당도 좋아한다. 특히 메뉴를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모를 때 요긴하다. 물론 메뉴를 보고 아무거나 시키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기는 하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좋다. 이건 아마 여행을 다녀 본 사람이면 모두 같은 생각일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주방장 대신, 종업원에게 메뉴를 몇 번 추천받았는데 모두 실패였다. 종업원 추천메뉴는 이제 받지 않는 걸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인기가 없는 음식을 밀어낸 것이 아닌가 (매우 주관적인) 의심이 든다.
아침부터 매우 무거운 음식을 먹었다. 아침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오스트리아 굴라쉬를 맛본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벨베데레 궁전으로 간다. 클림트와 에곤쉴레의 작품을 직관하는 것이 목적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황금색으로 가득한 몽환적인 키스로 인해 많이 알려져 있다.
에곤쉴레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불편한 기분이 들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픔이 느껴진다. 특히 ‘가족’을 그린 그림이 그렇다. 생전에 에곤쉴레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내의 유산으로 아픔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가족을 그리면서 품어보지 못했던 아이를 그려 넣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다시 보면 왜 가족을 그리면서 행복한 표정이 아니고 슬픈 표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일은 훈련이 부족해서 인지 금방 피곤해진다. 많은 시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일이라서 그럴까. 현대미술을 둘러볼 때는 그 피곤함의 정도가 더 커진다. 주요 작품들을 모두 보고 나서 ‘덤’으로 보는 거라서 그럴 수도 있고, 해석하기 어려운 그림에 빈곤한 상상력을 끌어모아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욱 피곤하게 한다. 아,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미술관 옆에 딸려 있는 작은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는 것으로 여행을 끝낸다.
호텔에 맡겨둔 가방을 찾는 시간과 기차로 공항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제 가야 한다. 호텔로 돌아가 가방을 찾으려고 하니,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자꾸 다른 가방을 들고 나와 ‘이 가방이 네 가방이냐?’고 묻는다. 금도끼 은도끼도 아니고 답답해서 내가 직접 들어가서 찾으면 안 되겠냐고 하니, 그건 안된단다. 확실히 독일계 사람들은 원칙에 충실한 경향이 있다. 몇 번의 시도를 더한 끝에 겨우 가방을 찾았다.
공항 가는 기차. 이렇게 여행이 끝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일까. 창밖을 보면서 다들 말수가 적어졌다. 한 시간 연착으로 인해 미안하다며 10유로 바우처를 받았다. 별로 밥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버릴 수는 없어서 샐러드와 맥주로 유럽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다음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내년에도 다시 한번 여행을 하자. 마지막이 있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