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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Jul 22. 2020

체스키 크룸로프-시간이 멈춘듯 평화로운

방구석 드로잉 여행  6

  오늘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운 일정이다.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고 서두를 이유가 없는 한가한 아침이다. 어제 혼자 살짝 다녀왔던 브세흐라드를 같이 가보기로 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제법 사람들이 보인다. 출근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개들… 브세흐라드는 보헤미아의 초대국왕이 묻힌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공원은 깨끗하고 아침 공기는 너무 상쾌하다.


  브세흐라드는 지하철역에서 아이걸음으로도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구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은 아니지만 시간이 남는다면 꼭 이른 아침에 산책 삼아 한 바퀴 도는 것 추천한다. 체코의 유명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예쁜(?) 묘지도 있고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구 시가지를 조망할 수도 있다. 딸아이는 바닥에 그려놓은 미로에 꽂혔다. 엄마랑 둘이서 미로의 끝을 찾느라 계속 빙글 빙글 돌고 있다.


  브세흐라드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어제 같이 투어를 했던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비록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고 느꼈다는 동질감 때문이지 오랜 친구처럼 참으로 요란스럽지만 다정스런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딸아이와의 약속대로 공항에 가서 꼬맹이 가방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가방을 찾지는 못했다. 딸아이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던 엄마는 ‘우리 이제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면 더 멋진 가방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라’며 위로를 한다.


  예약해둔 차량을 렌트하고 체스키 크룸로프로 출발한다. 급한 일도 없고 여행자의 기분에 도취되어 경치를 보면서 쉬엄쉬엄 가고 있다. 1년 치 사용료(비넷)를 미리 납부하고 운전해야 하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고속도로와 일반도로가 구분 없이 운영되고 있다. 점심은 지나가다가 나온 패스트푸드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고속도로상의 맥도날드는 딱 기대하는 그 맛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로 가는 길은 평지라서 그런지 단조롭다. 그래도 고속도로와 국도와 시골도시들을 지나면서 가는 길은 나름 재미있다. 멀리서 체스키 크룸로프가 보인다. 오호, 멀리서 봐도 정말 괜찮아 보인다. 아이와 엄마는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예약해 둔 펜션이 있는 곳은 주변이 너무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이다.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여행가방을 위로 올려 보내는 조그마한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다. 꼬맹이는 여기 타고 올라가도 되겠다면서 깔깔거린다. 주인장에게 시내(?)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걸어서 10분거리라고 하면서 지도를 건네준다.  대충 짐을 풀어 놓고 시내구경을 가기로 한다. 횡단보도에 설치된 신호등이 방정맞은 소리를 내면서 초록불로 바뀐다. 여기서부터 대충 구시가지라고 하면 될 듯하다.


  길옆의 조그마한 가게를 보니 블타바강에서 카약도 타고 나무 뗏목으로 강을 따라 가면서 구 시가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광고가 붙어있다. 그냥 지나갈 우리 꼬맹이가 아니지. 시간을 알아보니 6시 출발 뗏목은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예약을 하고 대금을 지불하려고 하니, 아차! 지갑을 펜션에 두고 왔다. 멀지 않은 곳이니 식구들은 근처 구경하면서 기다리라고 하고 쌩하고 뛰어 갔다 온다. 6시가 되었지만 서머타임인지라 아직도 해가 중천이다. 뗏목은 두 명의 젊은이가 앞뒤에서 긴 막대기로 바닥을 밀면서 천천히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구경하는 동안 열심히 이것저것 설명도 해주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시원한 바람이 귓가에 산들산들, 강 주변의 멋진 풍경들. 정말 완벽한 물놀이이다. 다음날부터 불순해진 날씨를 생각하면 그 날 뗏목을 타기로 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걸어 다니면 보지 못했을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여행객모드를 즐기고 있다.



  40여분간의 뗏목투어가 끝내고 강변 어딘가에 내려준다. 같이 타고 왔던 미국에서 온 가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주차장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걸어 올라가기로 한다. 강변에는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워진 날씨에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물이 맑아 보이지는 않지만 더러운 물은 아니라고 한다. 더러운 물이면 녹조가 보이거나 악취가 날 텐데 손으로 물을 떠보고 냄새를 맡아봐도 괜찮을 걸 보니 겉보기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시내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입구를 발견하고 들어간다. 와! 드디어 체스키 크룸로프의 골목길을 걷고 있다. 시간은 어느덧 7시를 지나가고 있고 꼬맹이는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꼬맹이에게 가고 싶은 곳을 정하라고 했더니, <볼레로>라는 식당을 고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배도 고프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고른 식당이었지만 제대로 고른 것 같다.

 

 식당의 입구는 무슨 동굴처럼 어두컴컴한데 쭈욱 안으로 들어가니 오호! 강변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야외테라스로 연결된다. 아내는 작은 환호성을 지르며 바로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고 기뻐하고 식당을 고른 아이는 아주 뿌듯해한다. 저녁메뉴로는 닭고기샐러드와 수프 그리고 돼지고기 스테이크 비슷한 것을 주문한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마시면서 마음껏 여유를 즐기고 있다. 볼레로의 스테이크가 우리 꼬맹이 입맛에 딱 맞나 보다. 그 후로 3일 저녁을 매일 이곳에서 같은 스테이크를 먹었다. 샐러드와 닭튀김도 맛있다. 이렇게 푸짐하게 먹고도 식사비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 아내는 무척 행복해 한다. 꼬맹이도 이젠 제법 의젓하게 어른들 대화에 끼면서 여행지에서의 저녁을 만끽하고 있다. 행복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펜션으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 꼬맹이 이곳 저곳을 잘도 기웃거린다. 정말로 조그마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이렇게 체스키 크룸로프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다.                   




  어제의 날씨를 시샘하듯 구름 낀 하늘은 언제라도 비를 뿌릴 듯 불길하다. 숙소 근처의 연못에 산책을 갔더니 오리가족이 보인다. 꼬맹이는 아침 먹으러 갈 생각도 잊은 채 오리가족을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들에겐 자연이 가장 즐거운 놀이터인 듯하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바람이 분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날씨가 급변할 수 있다니. 아무리 아침이라지만 8월 한여름인데 공기가 싸늘하다. 그나마 긴 옷을 한 벌씩 가져와서 다행이다. 그래도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싶어 작은 동네를 뒤져 스카프를 찾아내어 아이와 아내 목에 감아주고 나니 내 마음이 편하다. 그냥 식구들 중 한사람이라도 감기에 걸리면 여행을 망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취한 선제적 조치일 뿐이니 오해는 마시기를.

  창가에 앉아서 밖을 구경하고 있는 고양이에게 인사도 하고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듯이 성내로 들어가니 마을 축제 중이라고 한다. 대단하고 요란한 축제는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팔기도 하고 한 구석에서는 활쏘기 체험을 하고 있다. 버들강아지 같은 팔뚝에 당겨질 활이 아니다. 그래도 끝까지 해보겠다고 낑낑거리며 당기는 것을 보다 못한 언니가 나서서 도와준다. 마침내 당겨진 활시위. 애처롭게 날아간 화살은 과녁 앞에서 그만 떨어지고 만다. 실망하는 딸아이를 위하여 언니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다. 바로 석궁이다. 언니가 힘껏 당겨서 활시위를 걸어주고 아이는 과녁을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긴다. 시원하게 날아간 화살은 과녁에 박히고 아이의 얼굴에는 홍조와 함께 미소가 가득하다.                               



과녁에 박힌 화살이 안쓰럽다.

사방팔방 뚫린 곳으로 시원스레 날아가지 못하고 가지 못할 길에서 꼬리를 흔들며 기를 쓰는 것 같아 안쓰럽다. 가지 못할 길임을 알면 돌아가면 되는데 알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활쏘기를 끝내고 올라간 크룸로프성. 주변을 모두 굽어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원한 풍경에 여기저기에서 나직한 탄성이 들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시장에 들려 아이에게 약속한 가방을 하나 사 주니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해한다. 엄마 아빠가 약속을 잊지 않았음에 행복해 하는 것인지 새로운 가방이 생겨서 행복해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아내의 미소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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