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먼츠 맨 written by Robert & Bret
가끔 어떤 일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이 가끔 있다.
예를 들면 영화를 분명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몇 번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옛날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내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그거 지난번에 본거 아녀? 본 걸 뭐 그렇게 재미나게 보고 있어? 이리 와서 수건이나 개켜.”
”아니 안 본 건데” 하며 볼멘소리로 대답하면 또 그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책도 가끔 그렇다. 영화는 수동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라 좀 덜 억울한데(심지어 새 영화를 보는 기분이라 더 좋을 때도 있다) 책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후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깝긴 하다.
그중 최악은 책과 영화를 모두 읽거나 본 경우인데 둘 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할 때이다.
<모뉴먼츠 맨>도 그중 하나이다. 나치가 약탈해간 문화재를 찾기 위하여 전장을 누비는 학자 군인들의 이야기인 것은 동일한 데, 영화는 재미를 위하여 책과는 다르게 많이 각색이 되어있다. 책과 영화 모두 흥미로운 분야라서 재미나게 읽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거나 기억이 서로 섞여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뉴먼츠 맨 책 표지의 그림이 영화 포스터의 주인공인 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다시 보니 ‘엥, 이건 실제 사진이잖아’
도대체 난 뭘 읽은 거냐?
다시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한다. 분명 다시 읽는 것인데 재미있다.(심지어 이번이 두 번째 읽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ㅠㅠ)
미국이 2차 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많은 미국의 박물관, 미술관들이 일본의 공습으로부터미술품들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여기에 이미 전쟁이 진행 중인 서유럽에 관심을 가진 사내가 있다. 사내의 이름은 조지 스타우트이다. 끈질기게 정부를 설득해서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린 예술품을 구하기 위한 위대한 작전을 시작한다.
지금 생각하면 타당성과 명분이 충분한 고귀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 예술품을 보호하겠다고 뛰어들겠다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더 있다. 서유럽에 파견된 문화재전담반은 8명으로 시작되었다.(위대한 작전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요원들은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전선 여기저기로 홀로 배치되어 남겨진 성당의 잔해를 기록하고 약탈된 문화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모든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두 쓸 수는 없는 일. 브뤼헤의 성모자상, 겐트의 제단화 그리고 루브르에서 약탈된 미술품들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로 뼈대를 만들고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에피소드로 살을 채웠다. 괴링을 필두로 한 탐욕스러운 나치들, 목숨을 걸고 약탈된 문화재의 행방을 추적하는 정보원들, 그리고 배신자들. 이 이야기들 중 특히 내가 관심이 가던 부분은 브뤼헤의 성모자상이다.
미켈란젤로가 20대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조각상은 피에타의 대칭점에 있다. 피에타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통에 잠긴 성모를 표현했다면, 브뤼헤의 성모자상에서는 어린 예수가 성모의 옷자락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의 명성에 걸맞는 아주 훌륭한 작품인지라 히틀러는 친위부대를 동원하여 이를 약탈하고 오스트리아의 소금광산 깊숙이 감추어둔다.
이 성모자상은 기념물 전담반의 최우선 순위였으나 추적은 더디고 안개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전쟁에서 패전의 징후가 보이자 히틀러의 광기는 극에 달하고 연합국에 넘겨줄 바에야 모든 것을 파괴하여 독일을 구석기시대로 만들려고 한다. 미치광이의 광적인 추종자들은 이에 동조하여 수 천 점의 예술품들이 임시 보관된 알타우세의 소금광산을 폭파시키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금광산의 폭파를 막은 것은 그동안 나치에 동조하던 광부들이다. 그들에게 소금광산은 나치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문제보다는 생계문제가 우선이다. 광산에 설치되었던 폭약은 몰래 반출되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광산의 입구를 막아버림으로써 연합군이 도착하여 안전을 확보할 시간을 벌어준다.
바로 이 소금광산에서 브뤼헤의 성모자상과 겐트의 제단화가 극적으로 발견된다.
내가 왜 브뤼헤의 성모자상에 관심을 가졌을까?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2015년 10월 암스테르담에서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브뤼헤를 갔었다.
https://brunch.co.kr/@jinho8426/69
브뤼헤에서의 일정 중에 성당을 방문해서 성모자상을 보려고 마음을 먹긴 했었다. 그런데 여행 도중에 만난 미국인들과 그만 브루어리 투어를 가기로 약속해버렸다. 벨기에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다양한 종류의 맥주라며, 그곳에 가면 맥주의 수호성인도 만날 수 있고 덤으로 방금 만든 진짜 맥주도 마실 수 있다며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벨기에에 가면 진짜로 세인트 아놀드라는 맥주의 수호성인이 있다. 성인의 보호 또는 묵인하에 마시는 맥주맛은 어떨까 궁금하지 않으신가?)
그때나 지금이나 팔랑귀를 가진 나로서는 그만 ‘삼초만에’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브루어리 투어는 오늘뿐이지만 성모자상은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테니 다음에 보기로 한 것이다.
과연 브루어리 투어는 매우 교육적(?)이었고 맥주 맛은 환상적이었다. 그때는 브루어리 투어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었다.(맥주 이름을 보라. 당연하게도 ‘존맛’ 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면서 맥주 대신 성모자상을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지 않은 길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게 인생이라 그런가.
금방 다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일 년 반이 지나도록 묶여 있는 요즘.
가지 않았던 길이 자꾸 생각난다.
모뉴먼츠 맨의 정식 명칭은 MFAA,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이다.
전쟁이 끝난 후 다른 모뉴먼츠 맨들은 제대를 하고 제자리를 찾아갔지만 조지 스타우트는 군에 끝까지 남아서 남은 일들을 처리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지 스타우트는 한국에 가서 기념물 전담반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재입대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한국전쟁 동안 기념물 전담반과 같은 고귀한 임무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유엔군에게 있어서 한국의 기념물들은 서유럽의 문화예술품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문화재가 살아남았다. 북진을 하면서 설악산 신흥사에 마련된 연대본부의 병사들이 불경의 목판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을 본 젊은 장교는 기겁을 하고 상부에 보고하면서 불을 끄고 남은 경판을 모두 회수한다. 신흥사의 그 불경 목판은 조선 효종 때 제작된 것으로 한자와 한글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대역으로 이루어진 불경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귀한 문화재라고 알려져 있다. 이 장교는 2010년 타계한 언론인이며 저술가인 리영희 선생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으로 유명하신 바로 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