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수다 (2015년 10월)
독일 사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런 독일 친구들을 보면서 Square mind를 가졌다며 놀리곤 한다. 공중전화박스를 두 개 만들어 놓고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팻말을 붙여놓았더란다. 독일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남녀 구분하여 줄을 서는데 반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푯말을 떼어 버리곤 비웃더란다.(실제로 이런 실험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라서 진위여부를 알려줄 수가 없다)
일본 사람은 어떨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좀 더 고지식하고 튀는 행동을 싫어하는 것 같다. 일본에도 우리 회사의 지사가 있다. 일본지사장을 맡고 있는 제이슨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우수한 인재이다. 나와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 친구이다. 나이도 같고 키도 비슷하고 나보다 조금 통통하긴 하지만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 아마 나와 비슷한 체형이 될 듯하다. 이런 외형적인 공통점뿐 아니라 같은 문화권에서 온 이유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내가 가장 듣기 편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이상하게 일본 사람들이 하는 영어는 귀에 쏙 들어온다)
고지식한 것으로는 이 친구도 만만치 않다. 이탈리아로 출장을 갔다가 가끔씩 휴가도 함께 내어 여행을 하곤 하는 나를 보고 부러워한다.
“아니, 그렇게 부러워하지 말고 너도 조금 즐겨”
안된단다. 직원들이 자기 출장 스케줄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단다. 일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각자의 선택이고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만 깔끔하게 끝내 놓은 뒤라면 난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별로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던 이 친구가 그 해에는 나하고 같이 출장업무 끝나면 암스테르담에 갈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래? 진작에 이야기하지 그랬어. 암스테르담은 아니지만 벨기에의 브루게라는 곳을 가려고 이미 계획을 세워놓았는데”라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그랬으면 보나 마나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궁금해졌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려는 친구가 어디를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가 주어야지.
“무슨 일이길래 네가 먼저 가자고 하냐?”
일본지사에서 근무하던 시모네라는 이탈리아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 친구라면 나도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다. 특히 그 친구의 아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기억이 확실하다. 일본어를 같이 공부하던 어학당에서 만났다고 했다. 처음엔 서로 별로였다고 ‘디스’를 하더라구. 세상의 많은 부부가 그렇듯이.
“그 친구라면 나도 알고 있다. 와이프도 알고 있고”
이번 출장엔 하루 휴가를 내서 이 친구를 만나기로 했단다.
“겨우 하루?”
어쩔 수 없는 친구이다. 하루라면 나의 브뤼헤 방문 계획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브뤼헤는 아주 작은 동네이기 때문에 사실 3박 하는 것이 너무 길 수도 있겠다 싶어서 차라리 잘 되었다.
시모네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인데 지금은 이곳에서 새 직장을 얻고 새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이슨과 함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 약속시간 딱 맞추어 시모네가 온다. 이탈리아 사람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오래 살면서 많이 일본인화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시간관념이 좀 다르긴 하다.
오늘은 편한 복장으로 완전히 관광객 모드로 돌아다닌다. 시모네가 가자는 대로, 먹자는 대로 따라가고 먹는다.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음식이라며 포장마차에서 핫도그 빵 사이에 정어리 같이 생긴 생선 절인 것을 넣은 희한한 음식을 사더니 먹어 보라고 권한다.
웩!
그냥은 비린내에 너무 날 것 같아서 레몬즙을 듬뿍 뿌리고 한 입 베어 문다.
어!
비리긴 하지만 맛이 생각보단 아주 괜찮다. 아! 사진을 찍어 두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가면 길거리에 여기저기 무척 많으니 색다른 맛을 좋아하신다면 시도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간식을 먹으면서 광장으로 데리고 간다. 이름은 모른다. 사람들이 제법 몰려있는 걸로 봐서는 이름이 있을 법하지만 묻지 않았다. 렘브란트 동상 밑의 조그만 군인들은 아마도 스페인에 대항했던 오렌지공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왜 이곳을 왔냐고 물어보니 주변에 커피숍이 많은 곳이란다.
정말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커피숍이 보인다. 암스테르담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별한 커피숍. 냄새가 묘하다. 마리화나 냄새이다. 맹세하건대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지만 직감적으로 마리화나인지 알았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마리화나 따위는 마약 축에 끼지도 못한다. 마약중독자에게는 정부에서 ‘대주기도’한다.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손에 넣기 위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공급하겠단다. 아주 신박한 생각이다. 대신 조금씩 양을 줄여서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게 돕는 일도 잊지 않고 있다.
누가 먼저라고 이야기를 꺼냈다고 밝힐 수는 없지만 홍등가를 가보자고 시모네를 조른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스윽 구경만 할 것이므로 상관이 없다며 흐흐거린다. 수놈들의 본능이다. 마약을 허용한 네덜란드답게 이곳에서는 매춘 역시 매우 합법이다. 세금도 내고 노조도 만들어서 포주들에게 대항해서 자기 권리를 행사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노조라니 이것 역시 신박하다. Red Light District는 관광지이지만 당연히 19금 장면이 노골적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쇼윈도의 헐벗은 여인네들이 조금 무섭다. 시모네 말로는 인기(?)가 없는 여인네들은 이렇게 낮에도 일을 한다고 한다. 이곳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아주 귀여운 인형(?)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 동심파괴를 일삼는 곳이니 아이들과 같이 오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점심을 먹어야 한다며 풍차를 찾아가고 있다. 암스테르담에 몇 개 남지 않은 풍차라고 한다. 풍차를 보러 일부러 간 것은 아니고, 우리가 가려는 수제 햄버거 집 옆에 풍차가 있다. 햄버거 집 이름이 있지만, 그냥 풍차 옆 햄버거집으로 부르기로 한다. 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미안하다. 이름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는 건데. 그게 그렇다. 내가 주도해서 뭔가를 할 때는 세부적인 것도 기억을 하지만 이렇게 아주 느긋한 기분으로 따라다닐 때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햄버거 집이긴 하지만 맛 좋고 푸짐한 스테이크도 팔고 있다. 스테이크에 맥주를 마시면서 남자 셋이 수다를 떨고 있다. 맥주 맛이 보통이 아니다. 이곳은 바로 하이네켄의 고향이 아닌가 말이다. 항구를 따라 산책을 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10월에 이렇게 멋진 날씨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고 시모네가 날씨 자랑을 한다. 게다가 오늘은 휴일이니 길에는 자전거와 사람들로 가득하다.
시모네가 반 고흐 박물관에 가보자고 제안을 한다. 트램을 타고 몇 정거장 타고 가니 오우~ 바로 사진에서 보던 그곳이다. 쫘아식, 진작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지. 하지만 반 고흐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하니, 사람들 줄이 길어도 너무 길다. (여러분, 이곳은 예약이 필수인 곳입니다. 우리처럼 멍청하게 그냥 오시면 안 됩니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꼭 안에 들어가서 해바라기를 봐야 하는 것인지 맥주 한잔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긴급 제안에 모두 격하게 동감을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건너편에 하이네켄 박물관이 보입니다. 반 고흐 박물관을 배신하고 맥주박물관을 볼 수는 없으니 이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게 됩니다. 남은 오후 시간 내내… 반 고흐의 인생과 예술과 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개뿔…시시껄렁한 남자들만의 수다가 이어지고 있다. 제이슨도 맥주 몇 잔을 마시니 상당히 재미있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맥주는 너무 맛있고 날씨는 너무 좋습니다. ONE FINE DAY!
시모네 와이프도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하고, 약속 장소인 중앙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 이번엔 어스름해진 저녁 사이로 넷이서 홍등가를 지나가고 있다. 확실히 낮보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 합니다. 무서운 여인네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저녁은 낮에 보아둔 타이 음식점에서 먹기로 했다. 제이슨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번 저녁을 자기가 쏘겠다고 한다. 난 원래 누가 쏘는 것을 말리는 타입이 아니다. 시모네에게 갚아야 할 마음이 빚이 있다며 이것으로 퉁친다고 한다. 시모네는 빙긋이 웃고만 있다.
즐겁고 즐거운 저녁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반갑고, 화끈한 타이 음식도 맛있고… 이렇게 암스테르담의 밤은 깊어 간다. 제이슨은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러 떠나고, 나는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벨기에 브뤼헤로 가야 한다. 제이슨을 보내 놓고 기차 시간이 남아서 호텔 앞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입구에 렘브란트 공원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최소한 내가 있던 곳이 어디쯤인지는 기억할 수 있겠구나.
다음에 암스테르담을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순서에 밀리고 코로나에 밀리고 벌써 6년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