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공황시기 중앙은행장들이 세계경제를 어떻게 말아먹었나?
If a man will begin with certainties, he shall end in doubts; but if he will be content to begin with doubts, he shall end in certainties -Fransis Bacon
이 책 “Lords of Finance”의 마지막 Chapter를 여는 인용구인 위의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구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근거한 도그마에만 사로잡혀 다른 가능성을 외면할 때, 정작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고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 이책을 읽으려고 구입한 것은 작년(2013년) 여름이었다.
재작년, MBA를 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책읽기는 그해 ‘경영전략이론 정리’을 시작으로 ‘2008년 금융위기 분석’을 거쳐 위기 해법에 대한 ‘폴크루만 vs 니얼퍼거슨 방식 비교’까지 갔다가 니얼 퍼거슨의 글을 읽은 것을 계기로 평소 정치적인 근거로 혐오감을 갖고 있던 “밀턴 프리드만 읽기”까지 이어진 후, 밀턴프리드만이 ‘Capitalism and Freedom에서 주장한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궁금까지 이어졌고, 인터넷 서평을 근거로 대공황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분석이라는 추천에 혹해 이 책을 구입했었다. 방학시작과 함께 며칠내에 독파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하지만, 촘촘한 작은 글씨로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과 첫 chapter부터 느껴지는 영국식의 화려한 수사를 동반한 현학적(?) 문장등으로 2~3일 들고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책꽂이에 밀어 넣고 말았고 그후로 내내 읽기는 해야하는데 손이 잘 안가는 상태로 최근까지 오게 된 것.
작년 연말,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환상적인 겨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Ann Arbor는 연일 눈이 펑펑 내리고 온도가 급속도로 내려가 일체 이동이 힘든, 그야말로 자의와 무관하게 집에 틀어밖혀 책 읽기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김에 묵은 숙제를 털어내자는 생각으로 5개월 만에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 책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전세계를 강타했던 ‘대공황’의 태동과 그 이후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가장 독특한 점은 서술되는 사건들의 주체가 철저히 당시 세계 경제를 주물렀던 미/영/프/독 4국의 ‘중앙은행장’들이라는 점이다. 그 동안 대공황의 원인, 해결방안 등에 대해서 자본주의 본래의 시스템적인 문제라는 결정론적 접근이나 정치 영역의 잘못된 의사결정에 기인했다는 식의 event 중심의 해석은 꽤 많이 있어 왔으나 이 책의 저자 Liaquat Ahmed는 대공황의 원인이 4개국 중앙은행장의 잘못된 의사결정의 누적적 효과에 기인하며 그 중심에 1차 세계대전 이후 ‘금본위제(Gold Standard)로의 회귀’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생한 상황 설명과 동시대 4개국을 넘나드는 스펙타클한 인과관계 설명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1917년부터 1933년까지 대공황의 진행상황을 연대기적으로 좀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국지적 마찰에 대한 잘못된 정치적 판단으로 1차대전 발생. 참전국들 모두, 6개월 내의 단기전 예상했으나 장기화
2. 장기화된 전쟁비용 지원을 위해 통화량 확대 및 해외 차입(주로 미국)으로 유럽 각국 inflation발생 & 미국에 대한 과다 채무 발생. 금본위제도에 따라 미국으로 Gold 집중
3. 독일 패배와 함께, 파리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국들은 대미 부채와 독일의 전쟁보상금을 연계(독일에 과도한 경제적 부담). 독일 Hyperinflation 발생
4. 고민 없이 전쟁이전의 금본위제로 돌아갈 것을 결정. 영국은 파운드화의 overvaluation, 프랑스는 프랑의 undervaluation 결정. 영국은 실업 및 장기 불황, 프랑스는 상대적인 호황.
5. 독일은 전쟁배상금 채무 변제를 위해 미국/영국과의 협의를 통해 해외 차입 지속확대(Hyperinflation 잡았으나 국내 부문 버블 발생)
6. 1차 대전 후 미국으로 집중된 금이 저금리로 이어져 미국내 신용창출 폭증. 특히 주식구입 관련 대출 폭증으로 주식시장 버블 확대
7. 미국 주식시장 붕괴(1929). 주식구입 관련 대출이 과다한 미국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
8. 유동성 부족한 미국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로 인한 국제 금융시장 유동성 위기 발생
9. 과도한 해외차입 등으로 경제구조가 가장 취약한 독일 경제 붕괴 & 연합국의 과다한 전쟁보상금 반대 및 독일의 권위 회복을 주장하는 Nazi의 발호(2차 대전 발발의 기초 원인 제공)
10. 파운드의 통화상징성 확보를 위한 overvaluation과 미국 주식시장 폭락으로 인한 미국의 해외 신용제공 감소로 인한 영국내 금보유 부족으로 인해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11. 유럽 각국 중앙은행들 연쇄 금본위제 포기 및 보유 달러의 금태환
12. 유럽의 대규모 달러 금태환으로, 미국 내 은행들의 유동성 부족 발생
13. 소형 미국 은행들의 Bank Run 발생 & 은행의 신용공급 중단으로 인한 미국 내 기업도산 본격화
14. 소비위축, 부실대출 급증으로 인해 은행 도산 미국 전역으로 확대 & Bank Run 미 전역, 대규모 은행으로 확대
15. 대공황의 영향 : 1931년 대비 1933년 미국 상업은행의 신용제공 40% 감소, 전체 은행의 1/4 도산, 주택가격 30%하락, 제철소/자동차 공장가동률 90% 감소 등 산업생산 50% 감소, 물가 30%하락, GDP 45%감소, 실업률 25%로 상승.
16. 루스벨트 집권 후, 금본위제 탈피 선언(달러를 약 40% devaluation). 실질금리가 낮아지며 단기적으로 소비 및 생산 증가, 주식시장 활성화. 투자활성화 및 실업률 감소는 10년 소요.
사실상, 실업 해소 등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환율 안정성 및 통화 상징성 유지에 그 목적이 있었던 1920~30년대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해결된 후, 변화된 환경(금융위기의 국제확산 가능성 고조, 미국으로의 경제력 집중에 따른 경제력 불균형 본격화 등)을 고려하지 못하고 다시 금본위제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은 저자의 말처럼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을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결정이 대공황과 그 이후 전지구적인 2차 세계대전 발발로까지 이어졌다는 저자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집단적 고정관념이 야기하는 무시무시한 결과에 새삼 몸서리가 쳐진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한겨레 신문의 인터뷰 중 “채현국”이라는 어르신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정치적으로 이 분의 입장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나를 포함한 세상의 문제를 지식으로 헤아려보려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주시는 죽비와 같은 울림이다.
이 책이 중앙은행장을 중심으로한 역사 서술이라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이면에는 저자 자신이 정치 영역에 대해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혐오”가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책 중에서 저자는 대부분 정치의 영역에 있는 인물들을 경제적 지식이 빈약하고 소인배적 정치적 목적에만 복무하는 탐욕스러운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 가차없는 조롱을 날리고 있다(루스벨트만은 예외).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중앙은행장들이 위기 대응에 실패한 바로 그 지점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 담당해야할 Field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표 계산만 하는 정치가에게 경제를 맡기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신의 도그마에만 빠져있을지도 모르는 경제관료를 비록한 소위 경제 전문가들에게 경제를 맡겨야 한다는 반대의 논리도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닐런지….
저자가 책에서 누누히 주장하고 있지만, 금융전문가들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확대재생산된 대공황의 당시에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들이 볼 때 무지몽매해 보이는 “일반 국민”들이었으며 일반 국민들의 의사/우려가 그나마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는 불행하게도 선출된 대표자들을 통한 “정치”의 영역 이외에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일화중 하나로, 대공황 이후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루스벨트의 경제 참모진들이 “금본위제”만이 유일한 경제 운용시스템임을 주장하며 루스벨트의 직관적 판단(물가 상승을 위해 통화량 확대가 필요한데 금에 binding된 현재 상태로는 통화량 확대가 어려우니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통화량을 확대하자는)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었다는 사실을 비추어보면 채현국 선생 말씀대로 “확실하게 아는 것”이 가진 위험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미국의 대공황 극복과정은 저자인 Amehd의 말대로 “통화의 상대적 안정성 및 권위”를 물신화해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소위 경제전문가와 “국민경제의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치가의 대립에서 기적적으로 후자가 승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루스벨트가 보여준 정치력(관료집단 설득, 반대파인 공화당에 대한 강온 양면전술, Fireside Chat(노변정담)으로 대표되는 국민들과의 skinship강화)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the beauty of “정치”의 대표적 사례라 할만하다. 저자의 말처럼, 위기시 금융시장의 균형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Invisible hand” 대신 “A head to guide the invisible hand”가 필요하며 다시말하면, Political Leadership이 필요한 것 아닐까? Ironical하게도 한국의 다가올 금융위기를 예견해 볼 때, 가장 불안한 지점이 바로 이 political leadership의 부재이기는 하지만 …
이 책이 주는 여러가지 ‘생경스러움’ 중 개인적으로 신선했던 것 중 하나는 저자가 유럽 및 미국의 경제적 역학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일반적인 1,2차 대전시 독일은 악, 연합군은 선이라는 승리자 위주의 단선적인 역사해석을 벗어나 유럽의 강대국과 미국간 Power struggle을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국가별로 상대국들에게 갖는 악감정(?) 근원을 실증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데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깊은 흥미를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다. 사실 저자는 상대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혐오(정치적 불안정성, 경제문제를 정치화시키는 환원주의 등)가 깊은 듯 보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글의 저자인 Liaquat Ahmed라는 사람 본인이다.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는 놀랍게도 전문 저술가 아니라 50대 중반까지 현역(WorldBank, BNP Paribas, Aspen Insurance holdings등)으로 금융시장에서 투자전문가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저술 동기를 묻는 기자의 인터뷰에서 “1994년 멕시코 위기에서 1920년대 독일의 hyperinflation을, 2000년 인터넷 버블 붕괴에서 1929년 미국 주식시장 폭락을, 2007년 이후 금융위기에서 1931~33년 Bank Run을, 그리고 1997년 아시아 외화위기에서 1931~33년 유럽 외환위기를 읽을 수 있었고 과연 현대의 4가지 위기가 복합적으로 동시에 발생한 1929~1933년의 대공황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정리하고 싶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암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는 창으로서 역사 공부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말이었다. 저술의 방대함이나 자료의 치밀함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집필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감안하면(책 발간은 2009년이나 자료수집은 1999년부터 했다고 함) 정말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인 듯. 50대 이후 Target으로 삼아볼만한 개인적인 role model 중 한명으로 list에 올리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현재 한국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뭐 당연한 일인진데…
저자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중앙은행은 항상 Actionable한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위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부의 자화자찬처럼 한국의 규제시스템이 이번 금융위기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무기가 된 것인가?
혹시 2008년에는 심각하지 않았던 over-leveraging 문제가 전임 정권에서 활용한 저금리, 세금감면 등의 정책으로 확장되는 상황은 아닌지? 현 정부/중앙은행의 처방은 무엇인지?
아마도 금융부문에서 career를 마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볼 수많은 문제를 이 책은 제기하고 있다.
금융시장 한켠에서 밥을 구하고 있는 사람 혹은 퉁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반드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국내에도 “금융의 제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와있다 (사실, 번역된 제목에 좀 불만인데, 저자는 Lords of Finance를 상당히 시니컬하고 우화적인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다. 제목의 직역인 금융의 제왕보다는 부제인 The bankers who broke the world, 즉 ‘세상을 망가뜨린 은행가들’ 같은 제목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마케팅의 관점에서는 뭐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책의 내용과 Background는 여기에서.
책에 대한 내용말고도 기억할만한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Ahmed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볼만한 대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