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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현 Jan 14. 2016

2014년 책읽기:The Road to Serfdom

진짜 하이에크를 읽기

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  – Benjamin Franklin

이 책 중간에 실려있는 위의 벤자민 프랭클린의 경구가 어찌보면 하이에크의 주장을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이 책 “The Road to Serfdom”은 처음 읽는 책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전 쯤, 아마도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하여 듣게된 정치학과 수업에서 부교재로 채택되어 번역요약본을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의 대학 풍토에서 “자유방임주의”의 수호자로 이미 낙인이 찍혀있던 하이에크는 평소 토론이나 수업시간에서조차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나 스스로도 상당한 적의를 품은채 이 책을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이미 읽었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두가지의 이유때문이었다.


지난 여름방학에 읽었던 Milton Friedman의 “Capitalism and Freedom”을 읽고 나서 느낀 “Liberalism(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그 첫번째였고, 바로 직전에 읽었던 “Lord of Finance”에서 저자가 아주 잠깐 언급한 하이에크의 독특한 포지셔닝(외국인으로서 영국에서 자신이 겪은 독일의 전체주의적 전통의 문제점을 계속 지적하는)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주의”를 이해하는 Text book으로서 나는 아주 궁극의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 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은 그 일부분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라는 사람의 식견에 빚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44년 3월 당시, 유럽은 전세가 역전되어 실질적으로 연합군의 승리가 시간문제인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전쟁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짐과 함께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영국 내에서 한시적인 “전시동원체제”, 즉 국가가 경제 및 사회 운용 전반을 계획하고 국민들이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방식이 영국인들 사이에서 선호되는 현상을 목도한 하이에크는 “전체주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인 “Nazi”와의 전쟁의 결과가 또다른 전체주의인 “사회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책 속에서 하이에크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과 “사회주의(Socialism”을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영국인들이 가졌던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부정적 의미가 명확한 “전체주의”로 설명하면서 이 책이 가진 practical한 의도를 명확하게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본문은 총 16개의 장의 구성되어 있다. 하이에크는 책 초반에 자신이 두 눈으로 목격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체주의” 경향을 영국인들에게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체주의” 경향이 영국적 전통인 “개인주의(Individualism)” 및 “자유주의(Liberalism)”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개념임을 끈질기게 주장한다. 책 중간쯤부터 전체주의의 특성인 ‘계획(Planning)”의 실제 모습과 그 문제점, 특히 “중앙집권적 계획”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국민 모두의 평등과 안녕”이라는 “전체주의”의 구호가 결국 허울좋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풍부한 사례와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는 실제로 눈 앞에 닥친 문제들(Nazi의 다른모습인 사회주의의 발호, 영국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 국제적인 권위를 가진 기구를 통해 국가 상호간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책을 마치고 있다.


이책은 본문 외에 편역자인 Bruce Caldwell 교수가 앞부분에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위한 서문을 쓰고 각주를 꼼꼼하게 재구성한 “The Definitive Edition”인데, 만약 이책을 읽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편역본을 강추한다. 사실, 원문은 정말 웬만한 끈기 없이는(?) 보기 힘든 극도의 만연체로 쓰여 있는데, 앞 부분의 Caldwell 교수의 서문을 읽고 생긴 흥미가 개인적으로 책을 완독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서문에서 Caldwell 교수는 “하이에크 책은 널리 읽혔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주의깊게 읽힌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Hayek’s book may have been widely, but it was not always carefully, read.)라고 말하고 있다. 그 얘기인 즉슨, 하이에크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치 하이에크를 ‘자본주의 본연의 목적을 충실히 대변하는 합리적 대변자’로 반대하는 쪽에서는 ‘자본주의 모순을 외면하고 이윤추구만을 외치는 기업의 대변자’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두가지의 의견 모두 부분의 진실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가 “극단적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극우보수 경제학자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책에서 그가 주장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가장 훌륭한 반박이 될 것 같다. 내생각에 하이에크에게는 “타협없는 민주주의자”쯤이 맞는 label인 듯..  


이 책의 미국판 발간시 출판사에서 “The Road to Serfdom”을 “Socialism : The Road to Serfdom”으로 바꾸자고 하였으나 하이에크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에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Central Planning : 국가에 의한 계획/조정”은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미국에서의 예상치 못한 성공(Readers’ Digest에 요약판이 부록으로 포함되면서 수십만권이 판매됨)을 접하면서, 하이에크는 미국내 좌파들의 근거 없는 비판과 함께 우파(주로 대지주 및 기업가들)들의 왜곡된 환호(경쟁, 조세 등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반대하면서 국제 무역에서 보호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두를 문제제기 하였으며, 심지어 우파들의 환호는 자신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결과라고 말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의 입장인 자유주의(Liberalism)와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함.  “진정한 자유주의(liberalism)는 보수주의(conservatism)와 구분되어야 한다. 보수주의는, 그 자체로 사회 안정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온정주의(Paternalistic), 민족주의(Nationalistic), 권력 지향주의(power-adoring tendencies)에 기반하고있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보다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개념이며, 그 전통주의적(traditionalistic)이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적인 성향으로인해 세상이 개선되려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젋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의 보수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기득권을 보호하는데 그 목적을 두며 그것을 위해 국가권력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자유주의는,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이 국가권력의 보호나 타인이 누릴 수 없는 권한이나 이익을독점적으로 누리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기득권을 부인하는 것에 그 본질적 의미를 두고 있는것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과 자유방임주의도 명확히 구분하고 있음. “권력에 의한 통제/조정에 대한 반대로서 자유주의(Liberalism)와 도그마로서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유주의자(liberal)는 모든 현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자는 것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경쟁“을 통해 인간의 노력을 coordination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임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는 곧,효율적인 경쟁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그 어떤 방법보다 인간의 노력을 guide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는 경쟁이 전체 시스템에 이익이 되기 위해 합당한 법적 테두리(legal framework)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느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과정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 “민주적 절차가 권력자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제한이 자의적 권력행사를 가능케 하는것. 민주적 관리(Democratic Control)가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을 가능성도 있으나,민주적 관리의 존재 그 자체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법률의 불편부당성(만인의 법앞에서 평등)에 대해서도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법률의 지배 (Rule of Law)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 그 자체보다 예외없는 법집행이 훨씬 중요하다.예를들어 말하면,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다니는 것이 더 효율적인지 왼쪽으로 다니는 것이 더 효율적인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모든 자동차가 한방향으로 다닌다는 원칙이 전체를 위해 훨씬 중요하다.”

여기까지의 의견을 보면, 혹시 하이에크가 지금 이시기 대한민국을 살았다면, 소위 말하는 반체제인사, ‘종북’으로 찍히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기관에 의한 정치개입, 정부의 경제계획, 정부의 금융시장 조정,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등에 모두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의 산물 또는 자본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암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목적(End)이 과정(Process)을 정당화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의 가장 전형적 사고”라는 그의 확신일 것이다. 사실, 이 글을 발표하던 1944년 영국은 노동당정부(지금보다 훨씬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전시통제체제를 이끌던)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외국인 신분이었던 하이에크가 이러한 Radical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그는 전체주의(가장 위험한 형태로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실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비판의 Focus는 전체주의적 “계획(Planning)”이 가진 본질적인 “자유 파괴적” 성향이며, 이는 어떤 거짓 선동을 통해서도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하이에크의 주장의 핵심이다.  

산업 내 경쟁을 지속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전체주의의 중앙계획통제는 ‘소비자’를 소수의 독점적 자본가와 가장 잘 조직된 산업의 노동조합의 먹이로 전락시킨다.  

전체주의의 확대재생산 과정을 정확히 묘사. “계획(Planning)을 위한  Technical Difficulty(다양한 이해관계의 조정 등)의 문제가 바로 “권한 위임”을 불가피하게 하고 이것이 정부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민주적 절차의 혼란이 Planning의 효율성을 저하시킨다는 전제 하에 정부 혹은 별도 기구에 대한 “권한위임”을 통해 효율적 Planning을 하자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자, 또는 전체주의자의 방식임.”  

전체주의자들의 잘못된 법률 개념도 비판 대상.
Hayek는 합법적(Legal)인 것과 법률의 지배(Rule of Law)을 구분하여 그 차이를 강조함. 그에 따르면 전체주의 사회인 Nazi와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합법적인 정부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집권과 그들이 제정한 법률들이 모두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지거나 투표로 선출되어 권력이 위임된 대표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 하지만, Nazi나 소비에트처럼 법률에 의해 정부에 무한 재량권을 주거나 특정 세력(게르만인, 프롤레타리아)만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결코 “법률의 지배”라고 할 수 없다.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으며 법률은 제정 당시 특정 집단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이해를 위해 제정되어야 한다는 “General Law”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Hayek는 socialism의 관점에서 피지배계급간 분열과 대립의 문제도 정확히 예견함. 사회주의 운동의 성공을 위해 해당 시기 가장 강력한 elite 노동자 그룹을 중심으로 하다보면,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는 group (소규모자영업자, 일부 지식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 등)으로부터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며 후자의 지지/지원을 받고 나타난 것이 Nazi와 Fascist들임. 따라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 vs. Nazi/Fascist의 대립은 Hayek의 관점에서 볼때는 단지 socialism의 다른 Faction간 주도권 다툼으로 보일따름. 특히 이부분은 현재 한국에서 극우의 일부가 왜 일베 등의 공간을 통해 Nazi나 Fascist와 같은 의견(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등)을 쏟아내고 소위 노동귀족과 그들이 지원하는 정치세력(일베 등에 의하면 좌파/종북)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의를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Frame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임.


하이에크의 사회주의(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사상’으로서 사회주의(전체주의)는 이미 그 끝을 고했을지 몰라도, 지금 이순간에도 제도로서 혹은 향수로서 “국민동원”을 기반으로한 “전체주의”로서 사회주의의 위협은 한국사회에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뭐, 쓰레기같은 북한은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지만…).


하이에크는 책에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체주의와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전체주의의 부분적 요소(국가경제계획, 국민통합을 위한 선전 등)를 차용하였고 이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다고 자평하고 있으나, 사실 전체주의적 제도들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가진 숙주와 같아서 종국에 가서는 자본주의 사회에 전체주의의 망령을 드리우는 구실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하준 같은 경제학자들이 3공화국을 ‘국가사회주의’ 시대라 부르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 시대의 향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이에크의 비판은 현재 한국사회에도 적용된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암튼, 이책을 읽는 중간중간 내가 만난 하이에크의 모습은 “낯설음”이었다. 흔히 얘기하는 “자유방임주의”의 대표 경제학자 중 하나라는 조롱과 시장경제를 지키는 이론적 파수꾼인 “시카고 경제학파”를 탄생시킨 학문적 아버지라는 찬사 그 어느 쪽도 하이에크의 본 모습은 아닌 듯 했다. 아마도 악몽처럼 자신의 조국을 집어삼킨 Nazi의 극악무도함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과학’과 ‘계획’의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의 ‘집단주의’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원하지 않았지만 조국에 등을 돌릴수 밖에 없었던 피가 뜨거웠던 보헤미안 Economist정도로 불리는 것이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그가 1976년판 책에 쓴 서문에 보면 연구하는 학자가 아닌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 회한마저 느껴진다.

I have long resented being more widely known by what I regarded as a pamphlet for the time than my strictly scientific work…. I no longer do so. Though the book may contain much that I could not, when I wrote it, have convincingly demonstrated, it was a genuine effort to find the truth which I believe has produced insights that will help even those who disagree with me to avoid grave danger.

명심해야 할 점. 하이에크는 자유는 그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It is essential that we should relearn frankly to face the fact that freedom can be had only at a price and that as individuals we must be prepared to make severe material sacrifices to preserve our liberty.”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성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치가 있는 듯…


20년 전, 좋지 않은 첫만남을 통해 가졌던 선입관에 대해 개인적으로 하이에크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김과 동시에, 한국에서 대부분 그의 책이 대기업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에서 번역/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뭐라고 할까라는 궁금증도 살짝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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