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전라남도 목포에 살았다.
가끔 나는 전혀 생각치 못한 장소에 출몰하곤 하는데, 목포가 두번째였다. 목포는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만들어준 첫 장소였으며, 내겐 이제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나는 제2의, 제3의 고향이 있다는게 자랑스럽다. 인생이 힘들때마가 그리워할 순간들, 돌아가고픈 마음의 고향이 있다는 건 꽤나 힘이 되고 감사한 일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당시에 나는 한번도 목포를 가본 적이 없었다. 처음 목포로 내려가던 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4시간 30분을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게 너무 좋았다. 그 뒤로 서울 본가를 오고가며 난 KTX보다 버스를 선호했는데 오래동안 차창밖을 내다보며가는 그 시간, 어딘가로 떠나간다는 그 두근거림이 좋았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꽃나무, 과일나무가 제 색깔을 찾아가고, 주변을 에워싸는 멋드러진 산의 능선과, 논밭의 풍경. 따뜻해지는 공기가 느껴진다. 사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에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내가 가지고 있는 근심 걱정도 이 넓은 자연에 빗대면 다 별 거 아니다, 지나간다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특히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에 풍경을 안주삼아 몽상에 빠지는 건 최고의 시간이었다. 아무튼 처음 내려가는 그 날,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잔뜩 기대되었다. 그렇게 이력서를 쓰며 머리를 쥐뜯고, 울고 불고 하더니 결국 한자리 얻어서 이렇게 원하던 일을 시작하는 구나, 스스로 대견했다.
목포역에서 캐리어 하나를 질질 끌며 도착했을 땐, 마치 2000년대 초반으로 시간여행을 간 것 같았다. 대합실에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 앉아서 차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간판들에 옛날 글씨체가 많았고, 역사 뒤편으로는 다방과 유흥주점들이 많았다. 어디 섬으로 가는, 아주 오래된 시외버스들이 그렇게 많았다. 영화 세트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종종 들려오는 억양이 강한 사투리 말씨가 내가 타지에 왔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다음날, 첫 출근에 만난 학교 선생님들 대부분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 중엔 나와 같이 타지에서 온 선생님도 있었는데 과학 선생님은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그 분은 자신을 제외한 우리를 '육지인'이라는 신기한 명칭으로 불렀다. 다행히 모두 나이가 비슷하고, 붙임성이 좋아 mbti 대문자 I인 나도 여차저차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내가 더 붙임성이 좋고, 그들만큼 싹싹하니 "허벌" 유쾌한 성격이었다면 사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며 영원한 찐친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난 숨겨도 I였고, 당시는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8시간 근무하며 사회력을 다 소진하면 나는 반드시 퇴근을 하고 허름할지언정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나의 원룸으로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다음날 사회생활이 가능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대문자 I 성향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E 성향의 친절한 선생님들은 집에 혼자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며 종종 적극적으로 나를 밖의 세계로 초대해주기도 하였다. 뭐, 덕분에 목포대교를 환상적인 배경으로 둔 카페도 가보고, 유달산의 핫플레이스도 방문해보고, 전남의 식당들은 그냥 식당이 아니라 '식육식당'이라 불리는지도 알게 되고, 인생 최고의 육회비빔밥 집도 가게 되었다. 돌아보면 다 감사하다.
2020년은 코로나가 터지고 난 직후였지만 점차 수업이 오프라인 등교로 돌아오는 추세였다. 봄에는 벚나무가 어찌나 예쁘게 피는지, 퇴근길 트렌치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의 원룸으로 돌아오는 그 5분 쪼금 넘는 짧은 길임에도 벚나무 천지여서 몹시 황홀하였다. 여름 장마철이 되니 목포에는 태풍이 와서 학교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내 인생 첫 휴교령었다. 서울 학교들은 태풍의 영향이 적어 살면서 휴교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휴교령이라니! 창밖으로 비가 퍼붓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매섭게 들려왔다. 오전인데도 사방이 어두웠고, 창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오. 나는 몹시 흥분하며 빌라 입구로 태풍을 직접 보기 위해 잠옷차림에 버선발로 뛰쳐나섰다. 당시 나는 유기견 임시보호 중이었는데, (그렇다, 지독한 강아지 러버) 간짜장은 내 품에 쏙 안겨있었다. (남자친구가 주둥이만 까만 믹스견인 특징을 꼽아서 붙여주었다.) 간짜장과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빌라 입구에서 태풍을 생애 처음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 10평도 안되는 원룸에서는 참 많은 추억이 있었다. 서울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다시 가을에 원룸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 정도 학교 생활도 자취생활도 익숙해있었다. 주말에는 집근처 이마트에서 장을 봐와서 새로운 요리들을 도전해보거나, 직접 가구들을 조립해서 인테리어에 도전해보는 일상이 생겼다. 주말 일상 중 제일 기대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다. 코로나19는 교사로 새 커리어를 시작한 내게 큰 타격을 입히지 않았지만, 남자친구에게는 인생의 위기를 가져오게 했다. 나는 남자친구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여행가이드로 일을 하며 만났다. 그는 나보다 1-2년 일찍 와있던 선배였다. 여행과 답사, 역사와 예술, 문화와 이야기를 사랑했지만 소극적, 내성적 성향의 나는 그 일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을 꼬박 채운 뒤 나는 교육대학원 진학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자친구는 그 일을 사랑했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넉살이 좋고 유머러스해 동료들과도, 새로운 손님들과도 잘 지냈기에 계속 그 일을 해왔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여행업계가 비상이 걸리며 처음에는 잠시 휴지기라던 그의 회사가 기한을 알 수 없는 무급휴가상태로 전환되었고, 더이상 해외에서 생활비만 축낼 수 없다던 그는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가 학교에 잘 적응하며 다닐 즈음 그가 귀국하였고, 그는 대학에서 전공을 살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내일배움카드로 제과제빵학원과 바리스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평일 내내 제빵학원에 출석한 그는 금요일 밤이 되면 부산에서 목포까지 직행노선이 없는 불편함도 무릎쓰고 자기가 만든 빵을 바리바리 싸오곤 했다. 그때 별의별 빵을 다 먹어본 것 같다. 마들렌, 휘낭시에, 다쿠아즈 등 구움과자 종류부터 페이스트리류, 도넛류, 케이크, 식빵 같은 기본 빵 종류도 섭렵했다. 나중엔 질려서 남자친구에겐 잘 먹겠다고 고맙다고 해놓곤 냉동고에 쳐박아둔 뒤 서울 집에 갈 때 아빠에게 드린 적도 몇번 있다. (아빠, 미안.)
금요일 퇴근하고 원룸방을 깨끗하게 정돈하곤 저녁 여덟시, 아홉시 즈음 15분 정도 떨어진 시외버스터미널로 그를 종종 마중나갔다. 겨울에 눈이 엄청 내리던 날, 우산을 쓰고 그를 마중나간 적이 있다. 만들면서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크림빵처럼 둥글넙적해진 얼굴의 남자친구가 공포의 빵다발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나도 따라웃었다. 겨울에 목포는 눈이 참 청순하고 단아하게 내린다. 눈이 소복히 쌓이는데 서로 두 손을 호호 불면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인 칼국수 집을 갈까, 콩나물국밥집을 갈까 망설이다가 들깨가루를 무자비하게 넣어주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오늘 같이 눈내리는 날엔 제격이라며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는 뉴스 소리가 들려오고 밖으로는 눈이 쌓이고, 우리 둘은 한 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의 근황을 털어놓았다. 소박하고, 예쁜 순간들이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