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부모총회가 있는 날이다. 부장님 발표할 PPT를 만들고, 학교 교정에 붙일 안내 포스터를 제작한다. 한참 일하고 있으면, 동료 선생님이 옆에 와있다.
진이샘, 상장 있어요?
아, 예.
하던 일을 멈추고 수납장에 달려가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한다. 다른 학교에서는 비품이 필요하면 본인들이 수납장에 가서 가져가곤 했는데, 이 학교는 신기하게 비품 담당자가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 물론 비품 담당자는 나다. 가끔 비품이 없으면 열쇠를 챙겨서 공용창고에서 직접 꺼내줘야한다. 2월 졸업식에 상장을 다 써서 수납장에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열쇠를 챙겨서 일어난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공용창고에 가서 물품을 찾아 챙겨주곤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PPT와 다시 씨름을 한다. 옆을 슬쩍 보니 국어선생님은 교과연구를 하는 중인 것 같다. 부럽다. 나도 내 과목 교과 연구 하고 싶다. 몰랐다, 수업 할 때가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가끔 행정직원인지, 교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같은 시대에 그저 아침에 눈뜨면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옆으로 인기척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진이샘! 상장 커버도!
?
1초 표정을 못 숨겼다. 아까 그 선생님이다. 아니, 한번에 말하지. 상장 커버를 가지러 가려면 공용 창고에 또 다녀와야 한다. 하, 조용히 열쇠를 챙겨서 교무실을 나선다. 뒤따르는 선생님이 민망한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점심시간에는 부장님과 함께 풀, 가위, 입간판을 챙겨서 학교 교정을 돌아다니며 학부모총회 안내를 붙이며 돌아다닌다. 눈치없이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지. 며칠 전 주문한 교무실 비품들이 택배함에 쌓여있다. 박스테이프, 철끈, 흑표지, 오겹칠판 지우개, 노끈 등등. 박스테이프는 두 박스나 시켜버렸다. 끙끙, 혼자서 2층 공용 창고로 옮기고 있는데 창문밖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랑이며 즐거운지 크게 웃으며 지나가는 동료 선생님들이 보인다. 예쁘다. 부럽다.
학부모총회 리허설을 체육관에서 했다. 부장이 강단에서 설명을 하고 내가 그때 그때 PPT를 넘겼다. 부장이 적은 시나리오와 PPT가 맞지 않아 곤욕스러운데, 교감이 자꾸 내 이름을 부른다. 요즘 교감이 내 이름을 부르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뭐가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부른다. 다목적실의 마이크가 안된다고. 다목적실은 내 담당이 아닌데? 엊그제 1차 학성위 때에도 대뜸 내 이름을 부르며 정보 교과의 평가계획서가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부합하는지 재확인을 하라는 것이다. 그건 내가 확인할 짬이 아닌데? 나중에 교과부장이 자기 일이라고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반복되는 호명에 의아하다. 왜 내 이름을 자꾸 부르지? 내가 뭘 안다고. 난 이 학교 온지 만 1년도 안되었는걸. 교감은 모든 행동에 뚜렷한 의도나 목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냥 불렀을리가 결코 없다. 지켜보고 있다는건가.
나는 교감에게 트라우마가 있다. 작년 7월 이 학교에 왔을때부터 내내 모두가 내게 재계약이 될 거라고 했다. 교장은 나와 따로 면담을 가지며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고 오래 동안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난 정말 열심히 일했었기에 알아줘서 감사했고, 내년에 잠시나마 구직활동을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정이 든 동료 선생님들을 내년에 또 볼 수 있고, 정든 내 자리 짐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괜히 울컥했다. 작은 선인장이라도 키워볼까도 생각했다. 일년 이상 내 자리가 생긴다면 꼭해보고 싶던 일이었다. 부모님도 소식을 듣고 반가워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다.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 교감이 개인 면담을 요청했다. 별 걱정 하지 않았다. 앞서 계약직 선생님들이 교감과 면담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형식적인 절차거니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교감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만료된 계약서를 넘기며 재계약이 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때 그 교감선생님의 그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이후 결정이 번복되어 나는 다시 이 학교에서 일년 연장 근무를 하게되었지만, 나를 부를 때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 표정이 오버랩 된다. 결정 이외에 일절 감정이 개입되지 않던 사무적이던 태도. 오직 그곳에는 매뉴얼과 절차만 있을 뿐이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많은 선생님들이 반겨주었다. 교감도 다시 일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지만 그것 역시 매뉴얼과 절차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익숙해져야 하는데. 사회에서 인간이 아니라 오직 매뉴얼만 있다는 것을.
어느새 체육관에는 학부모들로 가득찼다. 부장이 교장을 소개하고 나는 해당하는 PPT를 넘겼다. 명문학교로 발돋움을 원하는 교장선생님의 포부 가득한 연설이 이어진다. 시나리오에는 없던 내용이다. 잔뜩 긴장하며 해당 PPT 화면을 켜야할 일이 있는지 듣고 있었다.
얼마 전 ○ 학교 이야기 들으셨죠? 한 학년 대부분의 교사가 기간제 교사인 것! 기간제 선생님은 일년 뒤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저희 학교는 책임감 강한, 실력 있는 정교사 선생님의 대부분이 담임을 자처하십니다. 이번에도 경쟁이 치열했죠.
갑작스러운 교장의 기간제 샤라웃에 정신이 번뜩인다. 교감의 내이름 샤라웃에 이어서 다시금, 강단 아래 의자에 앉아 PPT를 넘기는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진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그런 내 자신을 부끄럽게 느껴야하는 걸까. 한 선생님은 지난번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얘들이 평등한 사회를 말하는데, 애초에 말이 되냐고.
인간사회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거야. 학교에도 계급이 있는거라고.
그 뒤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나는 밑계급이라는 것을.
며칠 전 수업 시간, 진로로 교사를 희망하는 학생에게 나와서 해당 교과목을 직접 설명해보며 교사 체험을 진행해본 적이 있다. 짐짓 흥분한 학생이 나와서 설명하다 말을 더듬자 앉아있던 한 명이 외쳤다.
너 계약직이냐?
우하하하.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좋다고 웃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멍청한 표정으로 뒤에서 서있었다. 집에서도 종종 아빠는 밥먹는 식탁에서 '그래봤자 기간제인데, 에휴' 자주 이야기하신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나는 죄책감과 위축을 느껴야 하는 걸까.
이곳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두눈이 뽑히고, 뒤통수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생겼다. 오늘처럼 갑자기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지면 즉각적으로 병세가 생긴다.
집에가는 지하철에서 끙끙 앓으며 집에 도착한 나는 김망치를 잠시 안아주곤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다섯시 반에 기상해서 기계처럼, 노예처럼 다시 출근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금요일이라는 거. 거울에 비친 모습이 꾀죄죄하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교정에 봄바람이 살랑인다. 미세먼지가 꼈지만 곧 벚꽃 천지일 것이다. 선생님들 옷차림이 산뜻하고 가벼워졌다. 하얀색 캉캉치마, 핑크색 셔링 셔츠가 눈에 띈다. 난 아직도 패딩차림이다. 주말에는 봄옷 좀 꺼내놔야겟다고 생각한다. 봄옷이 있긴 하던가. 쇼핑이라도 해야하나. 김망치랑 집에 가서 주말 내내 놀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래도 기쁘다.
그 전에 퇴근 길 남자친구를 만나서 맵싸한 떡볶이를 먹을거다. 맵찌찔이지만, 자극적인 맛의 떡볶이를 배불리 먹고 난 뒤, 달달한 케이크와 아이스아메리카노로 해장을 할 것이다. 하, 봄바람. 다시 교무실로 들어가기 싫다. 다시 떠나고 싶다. 멀리 멀리.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곳으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벼운 등짐을 챙겨서 이국의 언어가 울려퍼지는 곳으로 가고 싶다. 2015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