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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Nov 16. 2023

밥만 잘 먹더라

사랑이 떠나가고 가슴에 멍이 들어도 한순간뿐이더라.
밥만 잘 먹더라.
죽는 것도 아니더라.


사랑이 떠나가도 진짜 밥도 잘 먹고 죽지도 않았다. 입맛이 조금 없는 것도 며칠 지나면 금방 예전처럼 돌아왔다. 밥은 늘 사랑보다 힘이 셌다. 그러니 그렇게 먹고 이렇게 찌고 잘만 살았다.


결혼 11년 차에는 사람만 늙는 게 아니었다. 세탁기가 안 돌았고, 소파가 낡았고, 에어컨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날 전기밥솥이 멈췄다. 이 결혼은 여기 까지라는 신호라 느꼈지만 자식 둘은 밥 달라며 숟가락을 들고 앉아 있었다. 이제는 자식같은 남편도 배고프다며 밥을 찾았다. 그러니까 이 결혼을 끝내려면 자식 둘과 자식 같은 남편이 눈에 밟혔다. 굶고 있는 저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전기밥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비싸다. 좀 작은 걸 사면되겠지 했지만 그것도 비싸다. 이제 어쩌나? 굶고 있는 자식들에게 밥솥이 비싸서 밥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밥이 없으면 안 되는데. 사랑이 떠나가도 밥만 잘 먹는데 전기밥솥이 떠났다고 밥을 못 먹는다는 건 너무 억울하지 싶었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솥밥은 어떨까? 압력밥솥은 소리가 너무 커서 분명 둘째가 싫어할 테니 안 될 노릇이었다. 그냥 솥. 진짜 솥에서 지은 밥을 하기로 했다. 코팅 냄비에 해본 첫 번째 솥밥은 성공이었다. 유리 냄비에 해본 두 번째는 탄 내가 많이 났다. 다른 도구가 필요했다. 밥을 할 만 게 없나 찾기 시작했다. 스텐 가마솥이라는 게 있다. 여기다 밥을 하면 누룽지도 맛있다니 귀가 솔깃했다. 그렇다면 너로 정했다. 스텐 가마솥은 주문한 지 하루 만에 문 앞 배송되었다. 세 번째 솥밥은 대! 성! 공!

누룽지마저 색이 곱고 아름답다. 내일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은 저 누룽지를 삶아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식탁으로 와서 앉았더니 자식들이 밥을 다 먹었다. 그들은 이런 밥이라면 김치만 있어도 다 먹을 수 있다며 밥을 찬양하고 추앙했다. 자식 같은 남편은 쌀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며 고봉밥을 금세 다 먹고 일어났다. 진짜 자식들은 밥 더 먹고 싶은데 없으니까 과자 먹을 거라고 했다.


밥만 잘 먹고사는 결혼 11년 차.

솥밥까지 해 먹는 나를 보며 11년 후에는 고추장 된장도 담아 먹어야 하나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머니표 고추장, 된장 하며 상표 등록을 하고 판매를 하고 유명해지고...... 아, 너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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