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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자적 Jul 03. 2019

타이베이의 넷째 날

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여행은 항상 순식간에 끝난다.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 날엔 아쉬움이 사방에 떠다닌다. 무엇을 어떻게 했든 간에 말이다.


 마지막 날은 카페에서 가만 쉬다 공항으로 돌아가잔 약속을 진작에 수도 없이 했건만,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안 되겠다... 근처에 갈만한 데는 더 없을지 초록창을 켜본다. 아니 사실은 첫날 안 간 화산 1914가 아까부터 계속 생각나던 참이었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네 눈치를 살피며 네게 말을 건다.


 -화산 1914.. 심심한데 거기나 가볼까?


 넌 내가 이럴 줄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이 얇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화산 1914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과거 양조장이었던 폐공장을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예술가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며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수동과 문래동 같은 느낌이랄까. 요새는 과거의 쓰임새와 그 목적을 잃은 건물을 단순히 파괴하여 새 건물을 짓기보다는 이렇게 그 공간을 최대한 살리며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확장하는 곳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해만을 따져 하늘로 치솟을 만큼 높게 지은 건물들만 보다가 도심 한복판 이렇게 넓은 부지에 예쁘게 정돈된 1층짜리 단 건물들을 보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담쟁이덩굴들이 건물에 가득해 마치 캠퍼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건물 안에는 카페, 레스토랑, 상점, 전시장, 팝업스토어 등 예쁘고 재미난 공간들이 가득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전시들이 많아서인 지 주말 11시 정도 되는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단위의 나들이객이 거리에 가득했다.


 특히 마리 끌레르, 스와치, 키티 등의 상점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 그 이상이었다. 빛과 레이저를 이용해 하나의 공간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던 마리 끌레르, 커다란 규모의 그림을 이용해 미술관에 온 듯했던 스와치, 여러 포토존들을 구비해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과 발길을 묶게 했던 키티 등 이들은 상점의 일차적 목적을 뛰어넘어 하나의 유희 공간으로 재탄생해 있었다. 이 곳에서 우린 물건을 사야 하는 고객이 아니라 전시를 구경하러 온 관객으로 전환됨으로써, 모든 압박과 부담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어느 가게든 우리에게 대놓고 구매를 강요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가게라는 외부와 분리된 공간 하며, 들어가자마자 따라붙는 점원 하며, 우린 알게 모르게 물건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에 사로잡힐 때가 분명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제1의 목적으로 두지 않고 부가적, 파생적 목적으로 둘 때(아니 사실 그것이 궁극적 목적이래도 무심한 척 속내만 들키지 않는다면) 비로소 고객은 가벼운 마음으로, 당당히, 가게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요즘의 이런 트렌드는 가게로서는 어쨌든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그 브랜드나 제품에 관심이 없거나, 지금 당장 구매의사가 없는 사람이라도 볼거리에 유인되어 가게에 들어갈 확률은 높아지고,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어쩌다 물건을 사게 될 수도 있다. 또 꼭 무엇을 사지 않더라도 제품 인지도나 호감도라도 상승할 수 있으니 가게로서는 안 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돈 없는 우리도 가게에 발을 들여 이렇게 구경을 하며 인스타에 업로드하며,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홍보를 자발적으로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화산 1914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오르골 가게이다. 가게의 규모가 상당한데, 입장하자마자 그 가게 전부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레일에 우린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각종 이음새와 장치들로 아름답게 연결된 레일 위에서 공들은 하나의 쇼를 보여 주 듯, 현란하게, 그러나 안정감 있게, 계속해 움직이고 있었다. 난 이 완전무결한 시스템을 잠시 동안 넋 놓고 감상했다. 갑자기 찰리의 초콜릿 공장 속으로 굴러 떨어진 느낌이랄까. 예고도 없이 마주한 동화 한가운데에서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색찬란한 수많은 오르골들이 이 넓은 공간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다. 동그란 받침대 위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우리가 흔히 봐온 스타일뿐 아니라 독창적인 디자인을 지닌 여러 가지 모양의 오르골들이 넘쳐났다. 앙증맞고 귀여운 오르골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소유욕을 불러일으켰지만, 아기자기한 외관과는 달리 가격만큼은 너무 사악했으므로 구입은 꿈도 못 꿨다. 내가 부자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 적도 참 오랜만이다. 오르골들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미모를 뽐냈는데, 결론적으로 이들을 모두 쟁취할 수 없는 나로서는 가슴이 무척 아픈 일이었고, 이런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직진하려고 꽤나 노력을 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이곳의 오르골들에 심상치 않게 현혹되어 보였다. 결국 빈손으로 가게를 나오긴 했지만, 이 가게를 구경하는 짧은 시간 동안 뭔가 정신이 개운해지고 순수해진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다.


  마침 배도 출출하겠다, 이곳의 현지 음식에 매번 배신당하기도 질린 우리는 그냥 확실한 길을 선택하기로 했고, 근처에 바로 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평타 치는 식사를 했다. 그 후로도 여전히 약간의 시간이 남았고, 한 번 오면 거의 다신 안 올 타이베이를 마저 둘러보기로 막판에 극적으로 협상에 성공했고, 우린 택시를 타고 보피랴오 역사거리로 향했다. 보피랴오 역사거리는 청 말기의 옛 거리를 그대로 보존한 거리로 흡사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을 준다. 짧은 거리지만 개화기 시대의 건물들을 양 옆에 끼고 걷는 길은 제법 분위기가 괜찮았다. 바로 옆에는 용산사라는 큰 절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 지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고 염원하는 사람들과 알 수 없는 특유의 향냄새가 가득했다.


 시간을 보니 이제 정말 타이베이를 떠나야 할 때다. 이번에도 무사히 여행 잘 끝냈다며 긴장의 끈을 놓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항상 일은 그때 벌어진다.


 공항 가는 버스도 잘 탔고, 막히지도 않았고, 공항에도 한 시간 반 전쯤 여유 있게 도착했다 생각했는데, 문제는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긴 줄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고, 늘 하던 대로 항공권 발권도 잘하고 이제 수화물 체크인만 하면 다 끝날 것을, 이게 웬걸 아저씨가 뭐라 말이 길어진다. 이럴 수가.. 내가 체크인 수화물을 미리 신청하지 않았단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필 이걸 누락했다. 저가항공이다 보니 카운터에서 즉석으로 짐을 부치려고 하면 하나에 6만 원이 넘는단다. 2개면 총 12만 원.. 이건 뭐 너무한 거 아닌가. 비행기 값의 절반 수준이다.


 어떡하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생각해보니 내 캐리어는 20인치라 기내 반입이 가능하긴 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짐 정리를 새로 해 액체류를 한 곳으로 모아 그것만 부치고, 하나는 기내로 가지고 들어가는 게 그나마 경제적인 것 아닌가.


 이런 발상을 해낸 스스로를 기특해 하긴 너무도 일렀다. 이것부터가 우리가 앞으로 주구장창 휘말리게 될 시련의 모든 근원적 시초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린 악의 구렁텅이 초입에 첫 발을 디밀었다.


 구석으로 가 캐리어 정리를 새로 한다. 마음이 바쁘니, 어디로 액체류를 보내고, 어디로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보내야 하는지, 정리를 하다가도 몇 번씩 헷갈린다.


-이거 무거우니까 이건 여기다가 담는 게 맞나? 아닌가? 저 쪽인가...?


 나 바보인가... 아 멘붕이다...


 게다가 짐도 원체 둘 다 꽉 찬 수준이었어서 새로 정리를 하려다 보니 공간이 어째 더 남아나질 않는다. 아깐 잠기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잠길 기미조차 없다. 지금까지 정리한 게 아깝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정리를 시작한다. 이번엔 무게만을 따질 게 아니라 부피까지 감안하며 최적의 조합을 생각해 가며, 짐 정리를 거룩히 속히 한다. 기내로 들고 갈 보조가방은 어차피 무게 상관없으니 웬만한 무겁고 큰 거는 죄다 가방에 처넣기로 한다.


 짐 싸는 게 이렇게 어려운 전략 게임이고 두뇌 게임이었나... 너무 어려워 놀랍다! 짐 싸기의 최고 끝판왕을 영접한 느낌이다.


 우여곡절 끝에 짐 정리가 끝났다. 지퍼가 끝까지 잠기느냐가 문제인데, 캐리어 위로 올라타 내 몸무게로 있는 힘껏 눌렀더니 드디어 잠겼다! 왜 이렇게 기쁘지... 이게 뭐라고... 엄청난 미션을 완수한 듯 뿌듯하다.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 있느라 고생한 다리를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옆에 저거 뭐니...   속옷은 저쪽 복도에 팽개쳐 있는 것인가... 아오.......


 숨을   깊게 쉬며, 잔뜩 뿔난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렵사리  짐을 다시  때의 참담한 심경은 뭐라 말할  없다. 지퍼를 열기가 무섭게 안에서 짜부돼있던 짐들이 막힌 숨을 몰아쉬듯 위로 불쑥 튀어나온다. 이걸 다시 어떻게 구겨 넣는담...


 짐과의 오랜 밀당 끝에 드디어 정리를 끝냈다. 돈이 뭐라고... 6만 원 때문에 이렇게 힘겨운 사투를 하고, 악착같이 매달리고, 갖은 청승을 떨고 앉아 있는 걸까. 남들 눈에까지 힘들고 아프고 불쌍해 보이기까진 싫어 표정 관리에 열을 올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카운터로 직행한다. 이제 드디어 고난의 시간에서 해방되었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아까 껀 애교 수준인, 아까보다 더 큰, 것도 무지막지하게 큰, 이번에는 정신뿐 아니라 체력까지 고갈시킬, 역대급 시험이 몰려왔다.


  이번엔 결제가 문제였다. 우리 항공사의 충성스러운 직원이자 원칙주의자인 승무원이 말하길, 6   1/3 정도는 현금결제가 필수라는 거다.  달의 직원상이 있다면   분을 추천하겠다. 아니 근데 !!!!!!!!!!! 대체 !!!!!


 짐 싸기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장애물이라 생각했는데 하하하하하...


 환전은 딱 맞게 해왔었고, 공항에선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남은 화폐들은 이미 시내에서 다 처리를 한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 ATM기로 가보란다. ATM기 위치를 물어보니 공항 양 끝에 하나씩 있단다. 카운터가 왼편이라 왼쪽 끝에 있는 ATM기로 갔는데 고장이란다. 하... 오늘 무슨 날인가.. 안 좋은 일은 왜 이렇게 한 번에 몰아 일어나는 걸까. 아니면 지금 공항에서 몰래카메라 같은 거 하는 건가. 난 별로 즐겁지가 않은데... 난 웃을 기운이 없는데... 아니 차라리 몰래카메라면 다행인 건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나란 인간은 참으로 속수무책이구나...


 좌절할 새도 없다. 새로운 ATM기를 찾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달려간다. 오른쪽 ATM기는 작동은 되긴 되는데 계속 알 수 없는 오류가 난다. 한 번만 더 오류 나면 이제 못 쓰는데... 아... 우짠다... 중간에 항공사 안내데스크 같은 데에 가서 도움을 청한다. 근데 거기 컴퓨터조차도 시스템 에러가 나고 먹통이 되면서 컴퓨터 재부팅까지 해보았지만 결국은 처리가 안 되었다. 알아서 하란다. 이쯤 되면 오늘 나한테서 무슨 검은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거 아닌가 싶다. 내가 만지고, 내가 가는 곳마다 알 수 없는 고장, 오류, 실수가 난무한다. 우연이라 하기엔 오늘 너무 무섭다. 몸 사려야지......


 거기서만 그렇게 십여분 이상을 허비하고 다시 오른쪽 끝 ATM기로 달려간다.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지만 결국 오류가 3번 났고 이 카드는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다. 급히 오느라 공금 카드 한 장만 덜렁 가져온 탓에 다시 왼쪽 끝 우리 카운터로 뛰어간다.


-다 했어? 이제 들어가면 되나??

-아니. 못했어... 아.... 내 지갑 어딨지??? 내 지갑 좀 빨리 찾아봐!!!!!


 점점 마음이 긴박해진다. 위기상황이 되니 이렇게 사람의 본성이 나오고, 성질머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에게 웃음기와 자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은 이제 출발 시각까지 사십 분밖에 안 남았고, 이러다 진짜 놓칠 수도 있을 것 같단 불안감이 엄습한다. 지갑을 들고 다시 전속력으로 오른쪽 끝으로 달려간다. 내 개인카드를 넣어 본다. 이건 또 잔액이 부족하단다. 아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맘에 안 드는 거지? 하....


 더 이상 쥐어짜 낼 인내력도 바닥났다. 한숨만 수십 번째, 멘붕만 수십 번 째다. 달갑지도 않은데 참말로 거, 너무 찾아오시는 거 아닙니까. 거, 너무한 거 아니요!


 오늘 운 더럽게 없다. 다시 또 공항을 가로질러 왼쪽 끝으로 달려간다. 그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타이베이 공항을 수차례 헤집고 다닌 사람을 보셨다면 그건 분명 저입니다.


-이제 했어?

-아니!!! 너 카드로 해야겠다. 야, 짐 다 끌고 저 쪽으로 같이 가보자!!!


 다시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달려간다. 이번에 캐리어까지 동행하여.....  번째  짓거리를 하는   모르겠다. 땀이  오듯 쏟아지고 있다. 몸의 증상은 둘째치고 점점 다가오는 출국 시각에 정신 또한 제정신이 아니다.


 사람들을 다급하게 뚫으며 ATM기에 가까스로 도달했는데, 이번엔 어떤 사람이 이용을 하고 있다. 시계를 본다. 점점 더 초조해진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네 개인카드를 받아 넣는다. 이젠 손까지 덜덜 떨려온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우리 공항에 갇히는 거 아니지? 우리 돈 없어서 출국 못하는 거 아니야? 한국 못 가는 거 아니야? 아... 그냥 좀 더 여유롭게 올 걸... 좀 더 여유 있게 뽑아둘 걸....


 각종 후회가 밀려온다. 다 내 불찰과 내 자만심이 빚은 오늘날의 결과다. 이번만 도와주시면 착하게 살 거고, 여행도 더 정성 들여하겠다며, 이 기회를 평생의 성찰의 기회로 삼겠다며 반성과 다짐을 거듭한다. 이러면 날 좀 가엾이 여겨 불운의 행보를 끊어줄까 하며.


  카드에도 잔액이 없단다. 너는 그래도 다행히 나보다 제정신이다. 오늘의 28번째 멘붕마중 나가려던 내게 인터넷뱅킹으로 돈만 빨리 이체하면 된다며 나를 안심시킨다.


 올, 천잰데. 사람이 당황하니 정말 아무 생각도 못해지는 것 같다.


 카드를 다시 넣고 네가 나한테 묻는다.


-내 비밀번호가 뭐지? 6자리라는데..

-너 원래 비밀번호 4자리 쳐봐. 그리고서 뒤에 00 붙여봐.


 보통 비밀번호 형식이 이렇다고 들었던 게 생각나 그렇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부디 맞기를.....


 6자리를 다 누르고 완료 버튼을 눌렀다.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비밀번호가 맞기만을 바라는 상황...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이제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가면 정말 답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이 초 되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겠다.


 SUCCESS!!!! 드디어 돈 물꼬가 트였다!!!!! 필요한 금액보다 더 여유 있게 출금을 한다. 지금 여유롭게 뽑아봤자 어디 쓸 데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미 공항에서 아슬아슬한 것들에 탈탈 털린 우리는 한국에서 수수료를 더 떼이며 재환전을 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엔 충분하게 뽑기로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뛰어간다. 우리의 종착지 카운터를 향해.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걸로 뒤통수 때리는 건 아니겠지? 이젠 아무도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아까 그 많던 사람들과 그 길던 줄은 이미 종적을 감췄다. 카운터는 텅 비어있고, 우리가 저쪽에서 뛰어오는 걸 발견한 승무원은 빨리 오라고 소리친다.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스퍼트를 내 도달했고, 이번엔 무탈하게 결제를 하고, 짐을 부쳤다. 드디어!!!!! (드디어라고 말하기도 창피하긴 하지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기진맥진이다. 몇 번씩 공항을 좌우로 활보하며 가쁜 숨을 몰며 옷이 땀에 흠뻑 젖고 나서야,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닌 듯 해지고 나서야, 공항에서의 미친 뜀박질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간다. 태양이 내리쬐는 대만 시내에서도 그리 안 흘린 땀을 냉방이 잘 되는 공항 한복판에서 쏟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찝찝해진 옷을 입은 채로 몇 시간 더 있어야 한다니... 에휴... 이 안에 들어온 게 어디야...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정말 말 그대로 초긴장 상태였다. 최근 이렇게 아드레날린이 펑펑 폭발하듯 분비한 적이 있었나 싶다. 저 멀리 가출했던, 다신 안 올 것 같던 집 나간 정신도 천천히 붙들어 본다. 이런 극한의 공포와 불안을 부둥켜안는 류의 스릴은 다신 겪고 싶지 않다. 네버.... 네버...


 시간은 출국까지 30분 정도 남은 상황. 다행히 자동출입국심사를 미리 신청한 덕에 안에서는 십 분도 안 되어 출국 수속이 끝났다. 자동출입국심사를 안 했으면 엄청나게 긴 줄을 오롯이 다 기다려야 했고, 그렇게 되면 진짜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참 아찔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그간의 긴장이 쫙 풀린다.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을 용케 챙겨 오긴 했지만, 책장을 펼칠 손목의 힘조차 남아있질 않다.


 오늘 공항에서의 하루를 돌아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몰랐다. 이런 운빨 없는 날이 펼쳐질 줄은.


 어떨 땐 공포였고, 어떨 땐 코미디였고, 어떨 땐 드라마였다. 모든 장르를 폭넓게 넘나들며 한 편의 영화를 찍었다. 모든 열정을 불사 질렀더니 졸리다. 잠이나 자야겠다.



 

 역시 일은 방심할 때 일어난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여행지에선 어떠한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뭐든 여유 있게 하는 편이 좋다. 이번 여행은 어쩌면 이런 당연한 여행의 태도를 다시금 일러주는 듯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정도면 됐지, 하며 스스로를 너무 믿고 느슨해진 내게 여행자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실컷 다그쳐 주었다.


 이번 여행의 교훈을 받들인다. 초심자의 마인드로 돌아갈 것.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늘 유쾌하고 편할 수만은 없지만 그게 바로 여행의 숨은 묘미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3월에 했던 대만 여행을 4개월이 지나서야 마칩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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