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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자적 May 14. 2019

타이베이의 셋째 날-스펀과 지우펀

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기차역을 빠져나올 때부터 거리는 이미 인산인해다. 이곳도 허우통과 같은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허우통의 고즈넉함과 여유로움은 이곳에선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여긴 기찻길과 천등,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 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펀은 천등으로 유명하다. 천등은 이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거의 유일무이한 관광 요소이다. 스펀역 주변으로는 기찻길이 쭉 이어지고, 그 기찻길을 따라 옆으로 난 좁고 긴 골목, 그게 전부다. 방향은 하나. 길도 하나. 스펀역에서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지도를 볼 필요도 없다. 남들 따라 앞으로 직진만 하면 된다.


 기찻길 옆 비좁은 이 골목만이 유일한 통로라 그런 지 인구 밀집도가 꽤나 심하다. 보폭이 크고 걸음이 빠른 나는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어 답답해진다. 빈틈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싶지만 또 금세 막혀 버린다. 장애물을 뚫으면 다음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이내 마음을 비우고 속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생전 처음 보는 그들과 대열을 맞춰 앞으로 걸어간다. 주변을 살펴보니, 여느 관광지나 마찬가지로 그 길을 따라 각종 먹거리 가게, 기념품샵들이 발달해 있다. 그런 가게들을 지나쳐 몇 미터만 더 가면 천등을 체험할 수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고, 좀만 더 가면 내가 서 있는 이 지점부터 시야가 닿는 저쪽 끝 지점까지, 거리가 죄다 천등 가게가 된다. 이제 이쯤에서 천등을 하면 될 거 같은데 이 많은 데 중 어디를 들어가야 하나, 하며 네게 말을 건다.


-이 집에서 천등 할까?

-천등? 천등이 뭐야?

-.......................  저거..... 사람들이 지금 날리고 있는 거...............

-아, 저거 하고 싶어?

-응............. 우리 저거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 많은 사람들도 다 저거 하려고 여기 온 거고............

-아, 그런 거야? 그래, 하자!!!


 그래도 스펀까지 오면서 여기가 뭐하는 데인 지쯤은 알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기찻길에서 천등 날리는 여행사진 한 번도 안 보고 여태 뭐하고 살았나,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까지 걸어오면서는 대체 어딜 쳐다보며 걸은 거야, 등등의 생각으로 순간 한 마디 하려다가 휴, 그냥 말기로 한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 다른 걸 어쩌겠냐며 이해와 존중, 긍정력을 십분 발휘한 결과다. 아니 그냥, 아까까진 천등이 뭔 지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선 또 신나서 얼른 하자는 저 순수한 얼굴 때문 같기도 하고. 상한 마음도 이제 다 풀렸으니 어디서 천등을 할 지나 빨리 고르기로 하자.


 천등 업체가 너무 많아 어디를 들어갈지 고민하기조차 싫어진다. 너무 많은 옵션은 오히려 선택자를 괴롭혀 물건 구매율을 떨어뜨린다고 심리학 시간에 배웠다. 난 어쨌든 천등 경험을 구매해야 되고, 괴롭힘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그냥 지금 이 순간 지나가는 옆의 가게를 선택하겠다. 원래부터 들어갈 내 운명이었거늘 하며 당차게 주사위를 던진다!


 가게 입장! 우리의 첫 번째 할 일은 천등의 색을 정하는 것이다. 천등은 네 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각의 면에 소원을 쓸 수 있다. 소원은 크게 재물, 행복, 건강, 사업 등의 분야로 나뉘어 있고 그 기원하는 복에 따라 상징하는 색이 각기 다르다. 따라서 천등에 새길 소원 분야를 우선 정해야지만 그에 맞는 색깔의 맞춤형 천등이 준비될 수 있다.


 우리는 빨강(건강), 노랑(재물), 녹색(번창), 선홍(인연)의 천등을 선택한다. 한 사람당 각각 두 면씩 맡아 쓰기로 하고서 나는 빨강과 녹색을 담당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옆에 있는 붓을 이용해 천등을 채워 나가면 된다. 다 채우면 직원이 드라이기를 이용해 글씨가 번지지 않도록 말려주고, 다 마르면 다음 면을 이어 채우면 된다. 다 쓰고 보니 내 손에만 잉크가 여기저기 묻어 있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화장실에 가 손을 깨끗이 씻고서 마지막 면이 다 마르기까지 경건한 맘으로 기다린다.


 빨강(건강) 면은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금방 주제가 정해졌다. 내가 쓴 글을 본 너는 놀리 듯 한 마디 한다.


-이십 년? 이십 년이면 되겠어? 어머니 이십 년만 딱 사시라고? 너무한 거 아냐?

 난 실실 웃고 만다. 작년 우리 가족에겐 큰일이 있었다. 이 큰일이 무엇인 지 말하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일부터가  큰일이라 그저 큰일이라고만 얼버무리고 싶다. 그때 알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좌절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부터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것을. 그동안 막연한 불안 혹은 우울이 몰려올 때면 난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위로를 구하곤 했다. 근데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입을 꾹 다물게 되었었다. 그때 느꼈다. 그간 내가 살아오면서 아픔이라 일컬었던 것들이 어쩌면 복에 겨워 부린 엄살이자 핑계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다 실수로 종이에 손이 살짝 베인 날 그걸 잠깐 못 참고 죽을 것 같다고 투정 부린 게 내가 말해온 아픔들은 아녔을까. 물론 당시의 내게 아픔은 실재했고 이를 참기 버거운 맘에 타인에게 감정을 분출했던 거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난 살 만했던 거였다. 내 어려운 부분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위로를 얻을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맞닥뜨린 고통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전하려면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해야 한다면 그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는데, 그 단어의 무게가 당시 너무 크게 느껴져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는 어떠한 여지가 끼어들 틈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어쨌든 "맞다/아니다"로 도출되고 마는 단답형의 말들을 할 수밖에 없고, 그건 모든 가능성을 베재한 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만 남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난 말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의 상황을 뚜렷이 직시하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냥 다 무서웠다.


 몇 주동안 잘 웃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았다.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멍하니 지냈다. 최악을 생각했다가, 최선을 생각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날뛰었다. 비관과 낙관이 줏대 없이 오락가락했다. 평상시 내가 드릴 일 년 치 기도를 몰아 드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내가 기도했던 내용은 다 낫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을 한 번만 원래대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소중한 줄 모르고 막연히 흘려보냈던,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일상이 몹시 그리웠다. 왜 우린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그 시간들을 낭비했을까.


 감정의 자연스러운 침전과 인위적인 비상을 반복하며 울고불고했던 거에 비해 다행히 검사 결과가 좋았다. 수술도 무사히 잘 끝났다. 우리에게 주어질 뻔한 수많은 미래 중 가장 최선의 결과였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잠시 꿈을 꾼 듯 한바탕 해프닝처럼 스쳐 지나갔다. 현재는 그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다. 거실에 앉아 다 같이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으며 각자의 하루를 나누고, 주말엔 근처 카페에 가 여유를 즐기고, 구름이랑 다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한다. 내가 지난날 너무도 소원했던 일상들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 일에서 파생되었던 다짐들, 이를테면 엄마에게 잘해야겠다, 란 것들은 초심의 빛을 다하였지만, 그럼에도 달라진 점은 앞서 말한 일상들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정말 매일 매 순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요즘, 난 참 행복하다. 하나같이 사소한 순간들인데 마치 엄청난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런 선물들을 난 매일 받고 있다. 이만하면 참 충만한 삶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상을 한 번만 더 허락해달라 한 것은 너무도 소박하고, 기도의 힘을 다소 과소평가한 감도 없지 않은 듯하여 더 크게 욕심을 냈어야 했던 거 같기도 하다.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이렇게 다릅니다. "한 번 더"를 살고 있는 현재의 나는 "이십 년만 더"라고 또 욕심을 내본다. 물론 그때 가면 난 또 "이십 년만 더"라 하겠지만.


 그리고 여전히 아니 계속 아기 같을 구름이. 보고 싶단 감정이 무엇인 지, 누구를 염려하는 감정이 무엇인 지 처음 알게 해 준 아이다. 구름이의 순수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지만서도, 동시에 언젠가 올 이별의 순간이 몹시 걱정될 때가 있다. 그 슬픔이 얼마만 치의 타격으로 다가올지 겁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구름이를 아는 인생이 훨씬 더 좋다. 우리 옆에 구름이가 있어 참 다행이다. 구름이가 지금 모습 그대로 최대한 오래 건강하면 좋겠다.

 녹색(번창, 뜻하는 대로 되는 것)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살기를, 또한 그들 각자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예전에는 나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었는데 요샌 내 주변 사람들이 진심으로 행복하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한다.


 너는 노랑에는 로또 일등 당첨이라는 국민 염원을 담았고, 선홍에는 "아무리 화나도 헤어지진 말자, 내가 더 잘할게"라는 염원인 지, 내게 하는 권유이자 부탁인 지, 협박인 지, 우리의 합의인 지, 자기반성인 지, 의도가 불분명한 바람을 적었다.


 이제 드디어 기찻길에서 천등을 날린다. 직원은 급성으로 배운 몇 가지 짧은 한국말들로 우리를 노련하게 이끌어 준다. 우리 각자의 위치와 시선 처리까지 하나하나 일러주며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준다. 그의 말들 사이에는 어떠한 텀도 없다. 일련의 순서에 맞춰 기계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가 생활의 달인처럼 느껴진다.


-네. 좋아요. 이제 천등 놓으세요.


 손을 놓자 천등이 하늘 위로 부드럽게 솟구친다.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천등이 위로 뜨자 그는 빠르게 작별을 고하며 다음 손님에게로 향해 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히 투철한 직업 정신이다. 그 손님에게도 똑같은 말들을, 똑같은 순서와 억양과 템포로 말하겠지. 그 영혼 없는 표정으로.


 천등이 손톱만한 사이즈의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참을 좇다가 이내 시선을 거둔다. 허우통 고양이들에게 정신을 쏙 빼앗겼던 바람에 스펀에선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기찻길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서 오늘 핑시선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 지우펀으로 곧바로 향한다.

 지우펀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져있었다. 지우펀은 어차피 야경 속 홍등 분위기에 취하려고 가는 곳이니 괜찮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지옥펀으로 불린다 하여 걱정하였으나, 우려했던 것보다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이미 스펀을 거쳐와 이 정도 인파에는 익숙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빠듯한 일정에 조금 지친 우리는 무슨 과업을 달성하듯이 두어 군데의 포토스팟을 찾아 재빨리 인증샷을 찍는다.


 그렇게 할 일을 다 하고선 주린 배도 채우고 좀 쉴 겸 한 중식당에 들어간다. 메뉴판을 보다가 가장 무난할 것 같은 것들로 주문을 한다. 오늘 저녁은 볶음 돼지고기와 볶음밥, 그리고 타이완 맥주이다. 한 입 먹은 우리는 아까보다 동그랗고 커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지금까지 먹은 음식 중 단연 최고다. 먹는 내내 맛있다는 감탄사를 열 번은 넘게 내뱉는다. 이 저녁식사 한 끼가 오늘 하루의 마지막 2%를 채워주는 듯하다. 지친 몸에 차가운 맥주가 들어가니 기분 좋게 노곤해진다. 하루 종일 고된 일정 속 서로 예민해졌던 순간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이로써 또 오늘 하루를 뿌듯하게,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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