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갑자기 부모님과 부산여행을 가게 되었다. 우리 여행 갑시다,라고 누군가 말을 꺼내도 이 날짜는 누가 이래서 안 되고 저 날짜는 누가 저래서 안 된다며 애초에 날짜 잡기도 힘든 게 가족여행일뿐더러, 설사 날짜가 정해진다 해도 당일까지 천재지변은 고사하고 감기에 걸렸다든가 일말의 심경 변화라도 생겼다든가 하는 잎새에 이는 희미한 바람조차 없어야 떠날 수 있는 것이 가족여행인 것을, 이번에 어찌 된 일인 지 저 멀리 간식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용케 듣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구름이보다도 잽싸게, 목욕하잔 말에 침대 밑 구석으로 줄행랑치는 구름이보다도 재빠르게 여행이 성사되었다. 불과 이틀 정도를 앞두고서 말이다. 이것은 구름이가 치킨이나 삼겹살을 거부하고 풀떼기나 과일에 환장하는 베지테리언이 되는 것만큼이나 무척 황당스럽고, 이 태생적 쫄보가 산책 중 만난 다른 강아지들에게 먼저 다가가 쿨하게 아는 척하는 것만큼이나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진짜 우리 이번 주 부산 가는 거야? 믿기 어렵지만 이제 믿어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기차표를 예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급히 코레일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다. 역시 자리는 대부분 차있었다. 세 자리 이상 나 있는 원하는 시간대 기차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둘, 하나 찢어 타는 걸로 각기 예약을 하고 혹시 그 사이에 취소하는 표가 생길 수 있으니 예약대기를 걸어 놓기로 한다. 별 기대는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루 전날 좌석이 풀려, 비록 세 칸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최소한 같은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인과관계조차 매끄럽지 못한 채 우리의 1박 2일 부산여행이 시작되었다. 이게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스토리의 개연성이 약하다고 지적받았을 게다. 그러나 가끔씩 우리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게 꼭 다이내믹하거나 블록버스터급은 아니더라도, 코 끝을 간질일 살랑바람 정도로 소소하게는 영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요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각자의 상황들이 신기하게도 착착 맞아떨어진 고마운 결과였다.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부산은 오랜만이었다. 부산의 첫인상은 시기도, 동행도, 추억도, 모두에게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었겠지만, 이번 우리가 함께하는 부산은 셋에게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겪게 될 부산은 어떤 모습일까.
한껏 기대감을 안고 부산에 도착한다. 몇 년 만에 스치는 부산 냄새.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살짝 베인 그것은 서울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더 짙고 오묘했다. 모든 감각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가 있는 이 곳이 부산임을 의식한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매 순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광안리와 해운대는 십 년 전과 비교해 더욱 세련되고 멋스럽게 변해 있었다. 예전에도 충분히 좋았던 부산이지만, 해운대를 걷고 또 걸으며 그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진 부산을 눈에 새로 담는다.
우리 모두 진즉 안 해 본 게 어떤 게 있을까 하다 퍼뜩 요트가 생각났다. 요트 업체를 검색하니 저녁 5시 30분 선셋 요트라 이름 박힌 상품이 하나 있다. 노을이 지는 시각, 해운대 앞바다 한복판에서 요트에 몸을 맡긴 채 불그스름하게 적셔오는 부산을 감상한다면 뭔가 엄청 쿨하고 로맨틱할 것 같다. 그렇게 오늘의 할 일이 하나 추가됐다.
숙소에서 나와 해운대에서 요트장까지 슬슬 걸어간다. 가는 길에 몇 년 전부터 핫플레이스로 거듭난 더베이 101을 지난다. 이미 대중에게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우리 가족에겐 모두 첫 방문이었다. 과연 부산의 상향 변신이 눈부시게 돋보이던 장소 중 하나였다. 건물 주변으로는 외부 테라스가 넓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 자체보다는 그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맞은편 풍경에 답이 있다. 바닷물을 사이에 둔 채 맞은편에는 초고층 빌딩,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빼곡했는데, 하늘을 찌를 기세의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그 만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리액션의 여왕 엄마도 옆에서 끊이지 않는 감탄 중이다. 부산에 이런 데가 있었냐며, 마치 외국 같다며, 이젠 해외여행 갈 필요가 없다며, 부산 진짜 멋있어졌다며, 감탄사가 쉬지 않고 새어 나온다. 과장을 보태, 9년 전 가족여행으로 갔던 호주 브리즈번 어느 해변가의 추억이 살짝 되살아 나기도 했다. 아직은 좀 쌀쌀하고, 좀 더 밤공기가 따스해졌을 때 이곳에서 저곳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 마시면 진짜 좋을 것 같긴 하다. 서늘한 여름밤 여기서 맥주잔 부딪히며 밤새 이야기 나눌 알지도 못 할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그렇게 십 분을 더 걸어 요트 선착장에 도착한다. 영화에서만 보던 하얀 요트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 이렇게 수많은 요트를 한 자리에서 보는 것도 난생처음, 그 물체를 실제로 타는 것도 난생처음이라 설렘과 긴장이 함께 몰려온다. 이게 뭐라고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는데,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엄청 복합적이다.
요트는 1시간 정도 해운대 근처를 도는 심플한 코스였다. 함께 탄 사람들은 중년 여성 4명 무리와 두 커플들로, 우리까지 합하면 총 11명이었다. 요트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는 보통 사이즈에, 나름 최신형인 지 고급스럽고 세련되고 깨끗해 보였다. 요트는 바깥과 안쪽에 좌석이 모두 나 있었고, 돛대가 있는 앞쪽 코 부분까지도 자유롭게 바닥에 앉거나 누울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외부 ㄷ자형 좌석에 자리를 잡는다. 그 좌석 가운데로는 테이블이 하나 있고, 그 위엔 웰컴 푸드와 음료 등 다양한 주전부리와 음료, 맥주가 놓여 있었다. 요트가 천천히 출발하고, 때마침 맥주를 하나 딴다. 크, 시원하다. 바닷물을 가르며 달리는 요트 안에서 맥주라니, 성공한 인생처럼 느껴진다.
요트의 속도가 붙으며 물결이 종전보다 세진다. 세진 파도만큼, 세진 바람만큼, 육지도 그만큼씩 점점 멀어진다. 조각조각 보이던 해운대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 유난히 맥주가 달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사진 찍는 데 삼매경이다.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서히 멀어지는 곳(해운대)을 배경 삼아 찍다 너무 멀어지면 이젠 가까워지는 곳(광안대교)을 배경 삼아 찍는다. 이전엔 육지에서 바다만 보는 게 다였는데, 지금은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고 있다. 부산을 조명하는 이 새로운 각도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어느덧 외부 테이블엔 우리뿐이다. 모두들 진작에 앞쪽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이젠 우리도 슬슬 자리를 옮기려 하는데, 바로 여기부터가 험난한 여정의 서막이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는 시점이다. 그게 뭐냐 하면, 앞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요트 옆면의 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통로 폭이 발 한 짝 겨우 디딜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심지어 가장자리엔 난간도 없고 안팎이 다 뚫려 있다. 그저 기다란 봉 손잡이 하나만 믿고 건너가야 하는데 이거 뭐 실수로 까딱 발만 헛디뎌도 그냥 바로 다이빙이다. 구명조끼가 필수 규정이 아니라는 걸 봐선 위험할 게 하나 없다는 거겠지만 그 사실도 날 안심시키긴 부족했다. 설령 바다에 빠진다 해도 죽진 않겠지만, 물론 그걸 알지만, 그래도 난 무서웠다. 물에 빠지는 게 그냥 싫다. 빠질 수 있다는 그 1%의 가능성도 그냥 다 싫단 말이다...
아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기까지 간 거야... 확실히 앞 쪽 풍경이 더 멋있긴 할 것 같은데...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어떨까?... 저기까진 가봐야 진정한 요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호기심이 곁든 갈망은 꽤 강렬한 감정이다. 그것은 항상 공포를 이긴다. 이번에도 역시 갈망이 이겼다. 한 발 한 발 떼며 앞으로 조심히 나아간다. 두 손은 간절한 마음을 가득 품은 채 난간에 꼭 붙어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손과 발을 언제 떼고 언제 붙들지 그 타이밍에 집중한다. 내 집중력이 이 정도인 지 처음 알았다. 고3 때보다도 더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요트 전방에 무사히 도착한다.
내가 확실히 보통 사람들보단 겁이 많은 것 같다. 엄살이 아니다. 가만 생각하면, 난 어떤 거엔 이상할 만치 강하고 어떤 거엔 이상할 만치 겁내곤 한다. 그 어떤 게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쓰고 보니 뻔한 사주팔자 풀이 같기도 하고. 당신은 소심하기도 하지만 때론 누구보다 활발합니다. 당신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나 때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은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어떨 땐 단호한 결단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사람이 바로 나란 사람입니다...
각설하고, 요트 앞에서 보는 바다는 또 달랐다. 아무래도 사방이 다 트여 있고 돛대까지 펄럭이고 있으니 요트 분위기가 훨씬 살아났다. 아까도 분명 좋았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판타스틱하다. 급이 다르다. 자유롭고 낭만적이고 모든 게 완벽한 느낌이다. 저 먼 타국의 휴양지에 온 것처럼 감동스럽다.
요트에 비스듬히 누워 내 사방으로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시선을 위로 조금만 올리면 하늘이 곧바로 이어진다. 모두가 시야가 닿지 않는 공간까지 뻗쳐져 있다. 한계도, 경계도 없어 보인다. 무한해 보인다. 막혔던 체증이 뚫린다. 답답하고 더부룩하고 고장 났던 마음들이 건강했던 원래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요트에 몸을 던진 채 가만 누워 나를 둘러싼 것들을 천천히 감상한다. 여유롭기 그지없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좋다. 멍 때리기 최적의 조건이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행복과 설렘이 밀물처럼 몰아친다. 속세의 걱정과 근심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아, 이 맛에 요트 타는가 보다.
이제 해가 조금씩 진다. 해가 지평선과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붉은빛도 그 감도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노을녘 불그스레한 부산의 모습은 참 황홀하고 로맨틱했다.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잊을세라 눈에 한껏 담아둔 그 날 그 시각 부산의 정경이 선하다.
이렇게만 쓰면 내가 아무런 심리적 동요 없이 요트 위에서 마냥 유유자적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일희일비하고 있었다. 파도가 거세지면 일비, 파도가 잠잠해지면 일희...
아까부터 가슴이 계속 울렁거리는데 이게 감동하여 그런 건지 긴장하여 그런 건지 헷갈린다. 눈앞의 감격은 감격이고, 그것과는 별개로 긴장과 불안 역시 실존한다. 속세의 하찮은 고민들은 잊은 대신 생사의 고민이 한가득이다. 이렇다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한 일이라곤 숨쉬기가 전부였음에도 몸의 에너지가 서서히 방전되어 가는 게 느껴진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내 속은 지금 말이 아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외로운 싸움 중이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요트 안은 요트 자체를 즐기는 겁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 아니 나 빼고 전부다. 아니 나랑 엄마 빼고. 그들은 까딱 실수하면 바깥으로 튕겨나갈 코너까지 걸어가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기도 하고, 구멍이 송송 뚫린 그물망을 건너가 돛대를 잡고서도 포즈를 취한다. 난 그들을 보는 것조차 무섭고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나와는 다른 부류임을 실감한다. 대단하다.
앞에 도달한 순간부터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내 엉덩이는 한 번도 내가 처음 앉은 바닥에서 떼지 질 않았다. 요트 벽면과 바닥면에 최대한 많은 체면적을 붙인 채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고 앉아 있었다. 처절히 살고 싶었다. 왜 나라고 저기 돛대 앞에서 찍고 싶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다.
엄마도 저기까진 절대 못 간다고 하다가 내가 하도 옆에서 난리를 치니 부모로서 솔선수범하겠다며 저기까지 가보겠단다. 난 그런 엄마를 극구 말린다. 굳이 할 필요 없어... 위험하게 저기까지 왜 가... 가지 마... 제발... 옷을 끌어당기며 가겠다는 사람 못 가게 막는다.
다른 사람들은 로맨스, 일상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나만 재난 영화다.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냥 코믹 가족 시트콤이었을까.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 난 정말 무서웠으니까. 배에서 참 많은 화살기도를 날렸다. 요트에서 하차할 때쯤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요트가 선착장으로 다시 들어선다.
요트는 부산에서 우리가 했던 것 중에 단연 최고였다. 중간중간 무서운 순간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인생을 살며 한 번은 무조건 꼭 타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요트 한 번 안 타보고 죽으면 좀 억울하다싶을 정도로 진짜 진짜 좋았다. 왜 부자들이 요트 하나씩은 소유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요트 외에도 부산은 계속해 우리에게 참 좋은 것들을 많이 내어 주었다. 엄마는 가는 곳마다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밝은 웃음 덕분에 여행 내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긍정적인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함께 여행하는 것의 장점이 아닐까. 좋은 것을 보면 함께 나누고 싶은 게 사람의 인지상정인 지라, 혼자 좋은 데를 가고 혼자 좋은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에 선 아쉬움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허나 이번 여행에선 그러지 않아도 된다. 평소 보지 못하던 것들을 함께 보고 평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함께 하고, 그로써 이 행복한 감정을 지금 이 순간 당장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감사했다.
여행이란 짧지만 평생 두고두고 이야기할 보물상자를 하나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물찾기 하듯 가끔씩 추억을 되뇌며 그때의 여운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아닐까. 살다보면 그런 게 필요한 날이 오기도 하니깐. 좋은 보물 하나 얻었으니 이제 잘 간직할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