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한 시간째 해파랑길을 걷고 있다. 산책로라 하여 평평한 길을 생각하고 온 건데, 이게 웬걸 시작부터 여긴 내가 생각한 '그런 곳'이 아님을 직감한다. 첫 출발지였던 이기대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산책로란 말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 말에 속아 갑분등산을 제 발로 하고 있다니, 헛웃음이 났다.
어제도 이랬다. 달맞이고개 너머에 20분 남짓한 산책로가 있다 하여 간 산책로는 명칭만 산책로일 뿐 등산로가 틀림없었고, 이미 그곳에 발을 들인 우리는 이제 평지가 나오겠지, 란 생각으로 2분을 더, 이젠 진짜 나오겠지, 란 생각으로 2분을 더, 이만하면 이젠 나오겠지, 란 생각으로 2분을 더 기어 들어갔다. 그렇게 잘못된 기대와 헛된 희망을 품은 채 6분을 더 깊숙이 들어갔지만, 우리가 끝끝내 마주한 건 이러한 길을 14분 더 가야만 한다는 비루한 현실뿐이었다.
그렇게 좁고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1/3 지점에 겨우 도달해서야 이곳은 평지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란 걸 그제 알아차렸지만, 이제 와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뒤로도 못 가고 그렇다고 앞으로도 못 간 채, 진퇴양난 속에 이도 저도 못하다가, 여기 이대로 갇힐 수는 없단 생각 하나로 어쩔 수 없이 결국은 앞으로 가는 걸 택했고,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산책 아닌 산책을 끝냈던 게 바로 어제였다.
여기 누가 가자고 그랬니? 아, 나였지, 참. 여러분,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심지어 이곳의 문제는 그게 다면 그나마 다행일 만큼 놀랍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 아니 여기 해안산책로라 해서 일부러 왔는데 해안은 한 1분 보았을까? 부산인 지 서울인 지 분간조차 안 가는, 우리 집 뒷산이라 해도 믿겠는, 그런 길들만 잔뜩 걷다 나왔으니 팀원들 볼 낯이 없었다. 당시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꼭 등산때문만은 아녔던 것 같다. 20분이 2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신비를 난생처음 경험했다.
그런데 어제의 그 갑갑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게 무슨 데자뷔인 지 귀신의 농락인 지 똑같은 불상사가 오늘 또 발생한 것이다. 가는 곳마다 왜 다 이런 것일까. 한국에 평지로만 이루어진 산책로는 정녕 없는 것인가. 맞다, 예전에 따릉이 타고 출퇴근할 때 보니 평지라고 생각한 곳도 다 미묘하게 오르막이던데, 한국은 오르막의 나라인 건가.. 그냥 그렇다고 인정하면 편하려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급경사는 아니지 않나... 산책로??!!! 산책로라고요???!!!!! 이 곳을 과소평가한 게 틀림없다. 여기에 산책로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붙인 사람에게 직무유기죄를 구형하노라.....
산책할 생각에 숄더백 하나 대충 메고 나왔는데, 나만 빼고 다들 등산가방에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이다. 이 구역의 바보는 나뿐인 것 같다. 5초에 한 번꼴로 흘러내리는 가방을 걷어 올리며 걸어간다. 몇 보 걸을 때마다 가방끈을 추스르려니 것도 일이다. 무슨 박자 타는 것도 아니고... 발 운동만도 힘든데 동시에 팔 운동까지 수백 세트를 하려니 땀이 여기저기서 줄줄 샌다. 4월까지 고집하던 히트텍을 드디어 벗어젖힌다. 사람은 하루하루 발전해야 한다던데, 어째 어제보다 나아진 게 하나 없다.
내가 꿈에 그렸던 해파랑길은 이게 아니었다. 당연히 아니었다. 내 머릿속의 해파랑길은 해안가 곁에 쾌적하게 조성된 데크를 편히 걷는 그런 코스였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유유자적 말이다. 옆 쪽으론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몇 있어 걷다가 힘들면 아무 카페나 눈 돌려 들어갔다 쉬다 나와서 다시 걷고, 이런 길을 생각했다.
근데 막상 내 눈 앞에 놓인 길은 내 예상을 실컷 비웃는 듯, 좁고 가팔랐다. 카페를 유치할 공간은커녕 내 한 몸 가기도 빠듯했다. 내가 꿈꾸던 길은 상상 속의 동물 같은 건가요... 내가 너무 큰 꿈을 꾼 건가요... 가슴속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려온다.
자고로 산책이란 가벼운 마음으로 쉬엄쉬엄 하는 거 아닌가? 사색 같은 것도 하면서 말이다. 근데 지금 내겐 사색이 끼어들 요만큼의 틈도 없다. 아니, 설사 한 두 개 있다 해도 모두 다 걸어 잠그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을 가다듬는 것도 어느 정도 마음과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인데, 난 마음도 상황도 사색에 가닿을 수 없을 만치 멀어져 있다. 이 순간만큼은 내게 사색은 허영이다.
아, 그래도 한 가지 생각은 아까부터 계속하고 있다. 여길 탈출하고 싶다는..!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일관성 있고... 진심을 다해... 이제 그만 나가고 싶은데... 근데... 출구가 어딘 지 모르겠다... 걷다 지도를 보니 방금 하나 있던 출구를 지났다고 한다. 진심?... 그렇게 하나를 또 지난다. 진심?...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한 시간을 더 걸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주여...
해운대 암소갈비에서 체력을 복원한다. 운동 끝에 먹는 밥은 역시 꿀맛이다. 아깐 눈 앞의 고된 육체활동이 언제 끝날 지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풍경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풍광이 좋긴 좋았다. 모든 건 끝나고 나면 어떻게든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진짜 멋있긴 했다.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만 있다면 또 가고 싶다. (이 말인즉슨 영영 안 가겠다는 말이다.)
어제 갔던 카페를 오늘도 이어 간다. 카페를 나와선 철길따라 해운대까지 또 걸어간다. 낮에 본 해운대는 어젯밤에 본 해운대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고,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해운대와도 느낌이 달랐다. 광안리와는 달리 야경이랄 게 따로 없어 어젯밤엔 새까만 도화지로만 보이던 밤바다가 어둠이 걷히니 선명한 민낯이 드러났다. 해운대는 넓고 깨끗했다. 해변엔 으리으리한 규모의 세련된 건물들이 예전보다 많이도 생겨났고,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곳들도 더러 있었다. 이날 날씨가 좋아 해변가엔 사람이 많았는데, 멀리서 온 관광객뿐 아니라 부산 토박이들도 많아 보였다. 날 좋을 때 밖으로 나가 봄햇살을 받고 싶은 사람 심리는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동백섬으로 오늘의 대미를 장식한다. 종일 여기저기 많이 걸어 보았지만, 그 중 최고점은 동백섬에게 주고 싶다. 전에도 와봤던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길이지만 나의 산책로 이상향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숙소에 돌아와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준다. 부산은 근 십 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의 변하지 않은 듯 변한, 익숙한 듯 낯선 모습들에 편안함과 설렘이 함께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