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자존심, 마지막 기회 (4화)

by 잇쭌


다음 날 아침, 최유나는 약속이나 한 듯 다시 가게에 나타났다. 어제의 격분과 오늘의 침묵 사이, 강만수는 꼬박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의 가게는 이제 막 항복을 선언한 패장의 성채처럼 공허했다. 주방의 모든 기물들은 그의 30년 영광을 함께한 충신들이었으나, 이제는 패배의 증인처럼 을씨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앉으시죠.”


최유나는 테이블의 먼지를 손으로 슥 닦아내고는 아이패드를 올려놓았다. 그 작은 동작 하나에도 ‘나는 당신의 감정이 아니라 문제 해결에만 관심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강만수는 마주 앉는 대신, 주방과 홀의 경계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패장일지언정, 성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해결책이라는 게 뭐요?”


그의 목소리는 밤새 삭아버린 숯처럼 거칠었다.


최유나는 서론을 생략했다. 그녀는 아이패드 화면을 돌려 그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모던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식당 사진 몇 장이 떠 있었다. 뉴욕의 어느 펍 같기도 했고, 성수동의 힙한 비스트로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의 테이블마다 놓인 음식은, 둥그런 피자가 아니었다.


“이제 둥그런 피자는 그만 구우셔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수술 집도를 알리는 외과 의사처럼 냉정했다.


“대신, 네모난 조각 피자와 맥주를 파는 겁니다.”


강만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뭐라고…?”


“사장님의 비즈니스 모델을 ‘가족 외식’에서 ‘개인 경험 소비’로 전환해야 합니다. 주력 상품은 피자가 아니라, 피자를 곁들인 ‘주류’가 될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배달앱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길 건너 ‘솔로 피자’나, 동네 치킨집, 그리고 퇴근길 직장인들의 발길을 붙잡는 모든 술집입니다.”


순간, 강만수는 실소를 터뜨렸다. 분노를 넘어선 허탈감이었다.


“허, 내 평생을 바친 이 피자를… 조각내서 팔라고? 고작 술안주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피자는 예술이오. 시작과 끝이 없는 완벽한 원(圓)이란 말이오! 당신은 다비드상을 팔다리 잘라서 기념품으로 팔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사장님.” 최유나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훌륭한 다비드상은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 지하 창고에 있습니다. 저는 그 위대한 작품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광장으로 꺼내자는 겁니다. 설령 팔다리를 잘라서라도요. 죽은 예술보다는 살아있는 상업이 낫습니다.”


“궤변!” 강만수가 소리쳤다. “여기는 피자집이지, 술장사하는 곳이 아니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곳이란 말이오!”


“그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저 길 건너 가게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사장님.”


최유나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의 심장에 박혔다. 그녀는 다시 아이패드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원가 구조 분석표였다.


“사장님의 피자는 원가율이 40%에 육박합니다. 하지만 생맥주 한 잔의 원가율은 25% 미만입니다. 수제 맥주는 더 낮출 수도 있죠. 손님 한 명이 피자 한 조각(판매가 7천 원 예상)에 맥주 두 잔(잔당 8천 원)만 마셔도 객단가는 23,000원입니다. 피자 한 판(32,000원)을 파는 것보다 객단가는 낮지만, 이익률은 월등히 높아집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피자 먹을까?’보다 ‘맥주 한잔할까?’라는 결정이 훨씬 쉽고, 훨씬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녀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만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업 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 그의 철학, 그의 자부심을 자신의 손으로 부정해야 하는, 일종의 ‘사상 전향’을 강요받는 것과 같았다.


“싫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손으로 내 자식 같은 피자를 토막 낼 순 없소. 차라리 여기서 장사를 접고 말지.”


그의 완고한 저항에 최유나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처음으로 그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듯했다.


“사장님. 제가 아는 어떤 유명한 스시 장인이 계십니다. 그는 평생 최고의 참치 뱃살만 고집했죠. 하지만 어느 날부터 손님들이 참치보다 저렴한 연어 초밥을 더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분노했고, 연어 따위는 자신의 주방에 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가게는 망하기 직전까지 갔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느 날 그가 저에게 그러더군요.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은 손님을 위한 최고의 맛이었나, 아니면 손님은 상관없는 나만의 자존심이었나.’ 그는 다음 날부터 메뉴에 연어 초밥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연어 초밥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지금 그의 가게는 참치 뱃살과 연어 초밥이 모두 유명한,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


“사장님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둥그런 피자라는 ‘형식’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손맛이 담긴 ‘최고의 맛’이라는 본질입니까?”


강만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신념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가게 문을 열고 혜진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우편함에 꽂혀 있던 대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봉투 앞면에는 붉은 글씨로 ‘최후 통고’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보증금마저 월세로 모두 소진되었으니, 일주일 안에 가게를 비우라는 내용증명이었다.


혜진은 말없이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아빠….”


혜진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떨려왔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아빠 자존심, 아빠 철학, 그거 다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미안해…. 근데 아빠, 나… 아빠가 평생을 바친 이 가게가 이렇게 사라지는 거,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혜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맑은 눈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툭, 툭 떨어졌다.


강만수는 딸의 굽은 등을, 그녀의 눈물이 적신 내용증명을,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최유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둥그런 세상이, 완벽했던 그의 원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강만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는 최유나를 보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낡은 간판을 보고 있었다.


<강만수의 둥그런 피자>


“대신… 만약 이것마저 실패하면… 그때는 깨끗하게 내 손으로 이 문을 닫을 거요.”


그것은 항복 선언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조각이었다. 최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승자의 예의가 아닌, 한 장인의 무거운 결정을 지켜본 자의 조용한 경의였다.



5화에서 계속......




Today's Management Insight: 비즈니스 모델 피벗 (The Business Model Pivot)


최유나의 제안은 단순히 메뉴를 바꾸는 것이 아닌, 비즈니스의 근간을 바꾸는 ‘피벗(Pivot)’입니다. ①타겟 고객을 ‘가족’에서 ‘1인 고객/주류 고객’으로, ②가치 제안을 ‘식사’에서 ‘경험/안주’로, ③수익 구조를 ‘높은 객단가’에서 ‘높은 마진율(주류)’로 바꾸는 전략입니다. 핵심 역량(피자 맛)은 지키되,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비즈니스 모델)을 시장에 맞게 전면 교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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