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권력은 사각형이고, 소통은 원형이다

망한 가게에는 중력이 없다

by 잇쭌


회의 시간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면, 직원 탓을 하지 마라. 범인은 '테이블'이다. 가장 높은 상석, 그리고 끝도 없이 긴 직사각형 테이블.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은 '참여자'가 아니라 '관객'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


검은색 세단이 육중한 철문을 통과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숨이 막혔다.


잘 다듬어진 소나무, 티끌 하나 없는 잔디밭, 그리고 압도적인 크기의 푸른 기와지붕.


나는 차에서 내려 본관을 올려다보았다.


[위압감], [침묵], [단절].


이곳의 중력은 사람을 편안하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만드는 '짓누르는 중력'이었다.


"차이현 씨,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 마중을 나왔다. 김 수석비서관.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의전을 담당하는 실세였다.


"바로 현장으로 가시죠. VIP께서 고민이 많으십니다."


우리는 긴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김 수석이 안내한 곳은 '대회의실'.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리는 곳이었다.


"들어가 보시죠."


육중한 문이 열렸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헛웃음을 삼켰다.


"이러니까 아무도 말을 안 하죠."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길이는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끝, 창을 등진 자리에 '가장 높고 화려한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대통령의 자리였다.


나머지 의자들은 그 긴 테이블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김 수석이 물었다.


"이건 회의실이 아닙니다. '재판정'이죠."


나는 대통령의 의자 맞은편, 가장 끝자리에 가서 앉았다.


"수석님. 여기 앉아보세요. 그리고 저 끝에 있는 의자를 보십시오. 거리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글쎄요... 7~8미터쯤?"


"물리적 거리는 8미터지만, '심리적 거리'는 800미터입니다. 여기서 저 끝에 앉은 사람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려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러니 입을 다물게 되는 겁니다."


나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리고 이 테이블, 너무 넓어요. 맞은편 사람과의 거리가 너무 머니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습니다. 눈을 못 마주치니 교감이 안 되고, 교감이 안 되니 보고서만 읽는 겁니다. 이건 소통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시'를 위한 공간입니다."


김 수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VIP께서도 그걸 느끼신 모양입니다. 최근 들어 '왜 회의 때 나만 떠드느냐'고 화를 자주 내십니다. 참모들이 주눅이 들어서 아이디어를 내지 않는다고요."


"공간이 사람을 쫄게 만드는데, 아이디어가 나오겠습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방, 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여긴 역사가 있는 공간이고, 의전 서열이라는 게 있는데..."


"역사요? 서열이요?"


나는 대통령의 의자를 가리켰다.


"저 의자가 이 방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국민이 주인입니까? VIP께서 원하시는 게 '왕'이 되는 겁니까, '리더'가 되는 겁니까?"


김 수석은 말문이 막혔다.


"결정하십시오. 권위를 지킬 건지, 소통을 얻을 건지. 둘 다 가질 순 없습니다."




[D-Day: 리모델링 완료]


일주일 뒤.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김 수석은 떨리는 마음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그 웅장하던 10미터짜리 직사각형 테이블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거대한 '타원형(Oval)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의자'였다.


높은 등받이, 금장 장식, 푹신한 가죽으로 된 대통령 전용 '상석'이 사라졌다.


모든 참석자가 똑같은 높이, 똑같은 디자인의 의자에 앉게 되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참석한 비서관들이 웅성거렸다. "VIP 자리가 어디야?", "내가 어디 앉아야 해?"


서열이 파괴되자 혼란이 온 것이다.


그때, 대통령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모두 기립해서 각 잡고 서 있었겠지만, 원형 테이블 구조상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자세들이 되었다.


대통령은 잠시 멈칫하더니, 테이블의 한쪽(꼭짓점이 없는 타원형이라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에 털썩 앉았다.


"어... 자리가 좁아졌군."


대통령의 첫마디였다.


나(차이현)는 구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셌다.


'3, 2, 1... 마법 시작.'


회의가 시작되었다.


놀라운 변화는 5분 만에 일어났다.


직사각형 테이블에서는 대통령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비틀어야 했다. 하지만 타원형 테이블에서는 고개만 살짝 들면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대통령과 말단 비서관의 물리적 거리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각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젊은 행정관이 무의식적으로 툭 내뱉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말대꾸'였다.


행정관은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화를 내는 대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테이블이 좁아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자세다.)


"그래?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자세히 말해봐."


"아... 그게, 현장 반응은 데이터와 좀 달라서요."


대화가 이어졌다. 핑퐁(Ping-Pong).


보고서를 읽는 낭독회가 아니라, 진짜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의 시선이 좌우로 부드럽게 흘러갔다. 상석에서 내려다보는 '감시의 눈'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동료의 눈'이 되었다.


회의는 예정된 시간을 1시간이나 넘겨서 끝났다.


웃음소리가 들렸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살아있는 회의였다.


대통령이 나가면서 나를 불렀다.


"차이현 씨라고 했나?"


"네, 각하."


"자네가 내 의자를 뺏어갔더군. 허리가 좀 불편하긴 했어."


그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귀는 뚫리더군. 시원했네. 고맙소."


그는 내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김 수석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놀랍습니다. 가구 배치 하나 바꿨다고 조직 문화가 이렇게 바뀝니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니까요. 이제야 청와대에 진짜 '민주주의의 중력'이 생겼네요."


나는 텅 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동그란 테이블.


저기엔 시작도 끝도 없다. 오직 '우리'만 있을 뿐.




[새로운 위기: 성수동의 불]


청와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는 다시 '차이현'의 자리로 돌아왔다.


서은 씨와 함께 국밥집 2호점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서울의 밤공기가 시원했다.


"이사님. 이제 진짜 다 이루신 거 아니에요? 국밥집, 쇼핑몰, 청와대까지. 이제 더 올라갈 곳도 없잖아요."


서은 씨가 웃으며 물었다.


"올라가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지키는 게 목표지."


"지켜요? 뭘요?"


"우리가 만든 이 공간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그때였다.


내 핸드폰과 서은 씨의 핸드폰이 동시에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난 문자가 아니었다.


SNS 알림 폭탄이었다.


[속보] 성수동 '성수 아틀리에' 골목 화재 발생!


[SNS 실시간] 핫플 성수동 지금 불바다... 소방차 진입 불가


"......!"


내 손에서 맥주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성수동. 내가 상인회장님과 약속했던 그곳.


'소방차 진입 불가'라는 단어가 내 심장을 찔렀다.


골목이 너무 좁다.


내가 '낡음의 미학'이라며 보존했던 그 좁은 골목길이, 지금은 소방차를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은 씨, 가야 해요."


"지금요? 위험해요!"


"내가 설계를 잘못했을 수도 있어. 확인해야 해."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성수동으로 달렸다.


창밖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강민석인가?'


아니, 그는 이미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럼 단순 사고?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 성수동이 가장 핫해지고,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이 시점에.


현장에 도착했다.


매캐한 연기 냄새. 소방관들의 고함 소리.


그리고 불길 속에 휩싸인 낡은 염색 공장. 내가 조명으로 비췄던 그 아름다운 벽돌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상인회장 김 씨 할아버지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차 선생... 내 공장이... 우리 추억이 다 타버렸어..."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소방 통제선 너머, 검은 모자를 쓴 남자.


강민석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점퍼의 로고가 불빛에 반짝였다.


[KJ 건설].


강 회장의 그룹사 중 하나인 건설사.


퍼즐이 맞춰졌다.


강 회장은 나에게 드림시티를 맡기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는 철저한 사업가다.


내가 성수동을 핫플레이스로 띄워놓자, 이제는 '재개발의 명분'이 필요해진 것이다.


낡은 골목은 화재에 취약하다는 명분.


그래서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을 명분.


'나를... 이용했어.'


내가 만든 중력이, 오히려 이 골목을 죽이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불타는 성수동 앞에서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공간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재생 건축의 아름다움? 추억?


불타버리면 끝이다.


이제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투사가 되어야 한다.





[차이현의 경영 인사이트]


Q. 회의가 지루한 건 사장님 탓이 아니라 '테이블' 탓이다? (회의실 배치법)

회의의 목적에 따라 테이블 배치를 바꿔야 합니다. 당신의 사무실은 어떤 구조인가요?


1. 직사각형 (Rectangular) - 권위와 보고


가장 흔한 구조지만, 소통에는 최악입니다. 상석(Head)에 앉은 리더에게 시선이 집중되며, 리더와 멀리 앉은 사람은 소외감을 느낍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이 배치는 피하세요. 다만, 빠른 지시와 보고가 필요한 위기 상황에는 효율적입니다.


2. 원형/타원형 (Round/Oval) - 평등과 아이디어


킹 아서의 원탁처럼, 상석이 없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대화 참여도가 높아집니다. 브레인스토밍이나 수평적인 토론이 필요할 때 가장 이상적인 구조입니다.


3. 스타인저 효과 (Steinzor Effect)


회의에서 사람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 말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논쟁을 붙이고 싶다면? 라이벌을 맞은편에 앉히세요.

협력을 유도하고 싶다면? 같은 편을 옆자리에 앉히세요. (옆 사람과는 싸우기 힘듭니다.)



"공간을 바꾸지 않고 문화를 바꾸겠다는 건, 물속에서 숨을 쉬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6화15화. 서울의 밤을 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