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불은 가장 빠른 철거반이다

망한 가게에는 중력이 없다

by 잇쭌


불타버린 건물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재 위로 쏟아지는 '자본의 위로'다. "위험하니 나가십시오. 저희가 안전한 아파트를 지어드리겠습니다." 그 달콤한 제안 뒤에는, 헐값에 땅을 삼키려는 포식자의 이빨이 숨겨져 있다.



[화재 발생 12시간 후. 성수 아틀리에 골목]


아침이 밝았지만, 골목은 여전히 어두웠다.


매캐한 연기와 검은 그을음이 하늘을 가렸다. 내가 조명으로 비췄던 아름다운 붉은 벽돌벽은 검게 타들어 갔고, 힙하다며 사람들이 줄을 섰던 염색 공장은 앙상한 철골만 남기고 무너져 내렸다.


"아이고... 내 가게... 내 평생 일군 건데..."


상인들은 잿더미가 된 터전 앞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소방관들이 잔불 정리를 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양복 입은 남자들이 하이에나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KJ 건설] 직원들이었다.


"어르신들, 많이 놀라셨죠?"


KJ 건설의 본부장이 상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은 계산기처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제가 뭐랬습니까. 낡은 건물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소방차도 못 들어오고... 인명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는 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회장님께서 특별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갈 곳 잃은 상인분들을 위해, 시세보다 20% 더 쳐서 건물을 매입해 드리라고요. 위로금도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당장 내일 입금됩니다."


'공포 마케팅'이었다.


화재로 인한 트라우마가 가시기도 전에, '안전'을 볼모로 협박하고 '현금'으로 유혹하는 전형적인 알박기 수법.


상인들이 흔들렸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목돈을 준다는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김 씨 할아버지의 손이 떨리며 도장을 꺼내려 했다.


"잠시만요!"


내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본부장이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또 뭐야? 외부인은 빠져."


"외부인 아닙니다. 이 거리 총괄 디렉터, 차이현입니다."


나는 본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시세보다 20% 더? 웃기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지을 아파트 분양가를 생각하면 껌값도 안 되는 돈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검게 그을린 벽을 가리켰다.


"이 불, 원인 규명 아직 안 끝났습니다. 발화 지점이 3곳이나 동시에 나왔다면서요? 그게 자연 발화입니까?"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불이라도 질렀다는 거야? 증거 있어?"


본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증거는 없다. CCTV는 불에 탔거나, 묘하게 사각지대였다.


하지만 정황은 차고 넘친다.


"증거는 없죠. 하지만 '명분'은 당신들이 가져갔군요. 이 골목이 위험하다는 명분."


나는 뒤돌아 상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르신들! 도장 찍지 마세요. 지금 찍으면 평생 후회합니다. 이 땅은 어르신들이 지켜온 역사입니다. 고작 아파트 몇 채 값에 넘길 땅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차 선생... 다 타버렸어. 이제 손님들도 안 올 거고, 복구할 돈도 없어..."


김 회장님이 울먹였다.


그렇다. 현실적인 문제.


잿더미가 된 골목에 누가 오겠는가. 예쁜 카페도, 힙한 포토존도 사라졌다. 남은 건 흉물스러운 폐허뿐.


언론은 이미 '성수동의 몰락', '안전 불감증이 부른 참사'라며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복구... 안 합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네? 그럼 장사를 접자는 건가요?"


"아뇨. 복구(Restoration)가 아니라 '박제(Stuffed)'를 할 겁니다."


나는 검게 탄 기둥을 어루만졌다. 손에 묻어나는 검은 숯 검댕.


이것은 단순한 그을음이 아니다. 자본의 탐욕이 남긴 상처다.


그렇다면 이 상처를 숨길 게 아니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한다.


"서은 씨. 당장 강화유리 업체랑 연락해요. 그리고 조명팀 다시 부르세요."


"이 폐허에요?"


"네. 불탄 흔적, 그을린 벽, 무너진 천장... 하나도 치우지 마세요. 그대로 둡니다."


나는 본부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불태운 이 거리가, 얼마나 무서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지 똑똑히 지켜봐."




[Project: The Burnt (검은 기억)]


공사는 일주일 만에 끝났다.


아니, 공사랄 것도 없었다. 치우지 않았으니까.


대신 우리는 폐허 위에 '유리관'을 씌웠다.


무너진 염색 공장의 잔해 위로 투명한 강화유리 바닥(Skywalk)을 깔았다. 사람들은 발아래로 처참하게 녹아내린 기계와 검게 탄 벽돌을 내려다보며 걷게 된다.


천장은 덮지 않았다. 뻥 뚫린 하늘 아래, 앙상하게 남은 검은 철골 구조물이 거대한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조명이 켜졌다.


이번엔 따뜻한 주황색(3000K)이 아니었다.


[차가운 백색(Cool White, 5000K)]


그리고 [붉은색(Red)].


창백한 하얀 빛이 그을린 벽을 비추고, 기둥 밑에서는 붉은 조명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일렁였다.


아름답지 않았다.


기괴하고, 슬프고, 압도적이었다.


골목 입구의 간판도 바뀌었다.


[Seongsu Atelier] 였던 간판은 반쯤 불탄 채 그대로 걸려 있었고, 그 옆에 새로운 현판이 붙었다.


[Memorial of Greed (탐욕의 추모관)]


- 우리는 202X년 X월 X일의 불을 기억한다 -




재오픈 날.


KJ 건설은 "흉물스러운 폐허를 방치한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고 방해 공작을 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예쁜 사진'을 찍으러 온 커플들이었다면,


이번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예술가들,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웃으며 V자를 그리는 대신, 침묵 속에 골목을 걸었다.


발밑의 폐허를 보며 충격을 받고, 벽에 남은 그을음을 보며 분노했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카페 거리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폭력을 고발하는 거대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성지가 된 것이다.


"와... 분위기 봐. 압도된다."


"이게 진짜 힙한 거지. 억지로 꾸민 게 아니라 진짜 리얼이잖아."


SNS의 반응도 180도 바뀌었다.


#성수동메모리얼 #탐욕을잊지말자 #BurnedButNotDead


부정적인 여론이 긍정적인 '연대'의 여론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잿더미 속에서 끓여주는 '탄 커피(Roasting Coffee)'를 마시며 이 공간을 지지했다.


KJ 건설 본부장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는 이 땅을 '쓰레기'로 만들어 헐값에 사려 했지만, 내가 이 쓰레기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버리자 땅값이 오히려 폭등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여론이 악화되어 강제 철거도 불가능해졌다.


"차이현... 당신, 정말 미친놈이군."


"칭찬으로 듣죠. 아, 그리고 회장님께 전해주세요."


나는 무너진 벽 앞에 섰다.


"불은 가장 빠른 철거반일지 몰라도, 기억까지 태울 순 없다고요."


그때, 군중 속에서 낯선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검은색 정장, 날카로운 눈매. 최유라 대표였다.


그녀는 무너진 공장 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차이현 씨. 인정할게요. 당신의 중력은... 생각보다 무겁네요."


"구경 오셨습니까?"


"아니요. 제안하러 왔어요."


그녀는 내 손에 명함이 아닌, 작은 USB 하나를 쥐여주었다.


"강 회장, 성수동 다음 타깃은 여기예요. 드림시티 쇼핑몰."


"네?"


"쇼핑몰을 매각하고 그 자리에 50층짜리 주상복합을 지을 계획이에요. 나도, 당신도, 거기 입점한 상인들도 다 쫓겨날 거고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죠? 이번엔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할 것 같네요."


드림시티의 매각.


그리고 강 회장의 빅 픽처.


성수동의 불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나는 불탄 폐허 위에서 최유라의 손을 잡았다.


이제 싸움은 골목을 넘어, 마천루의 꼭대기로 향한다.




[차이현의 경영 인사이트]


Q. 왜 사람들은 '체르노빌'과 '서대문 형무소'에 갈까? (다크 투어리즘)

여행이 항상 즐겁고 예쁜 것만 찾는 것은 아닙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 지역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합니다.


1. 부정적 공간의 가치 (Negative Heritage)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뉴욕의 9.11 메모리얼 파크. 이곳들은 슬픈 공간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관광지입니다. 공간이 가진 '비극적 스토리'가 인류 보편의 감정(슬픔, 공포, 연민)을 자극하여 강력한 중력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2. 폐허의 미학 (Ruin Porn)


현대인은 완벽하게 마감된 건물보다, 무너지고 낡은 폐허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콘크리트가 깨지고 철근이 드러난 모습에서 시간의 유한함과 숭고미를 느끼는 것이죠. 카페 '어니언'이나 '앤트러사이트'가 폐공장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3. 위기를 브랜딩하라


가게에 불이 났거나 침수 피해를 보았나요? 그것을 숨기고 완벽하게 복구하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흔적을 일부 남겨두고 "우리는 이겨냈다"는 스토리로 승화시키세요. 고객은 당신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에 감동하여 더 충성스러운 팬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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