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가게에는 중력이 없다
집(제1의 장소)은 편안하지만 지루하다.
직장(제2의 장소)은 치열하고 피곤하다.
도시인에게는 눈치 보지 않고, 목적 없이 머물 수 있는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이 되는 순간, 건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시민들의 '성지(Sanctuary)'가 된다.
[The High 대표실]
"매각 협상 마감일, 딱 2주 남았어요."
최유라가 태블릿에 띄운 캘린더를 가리켰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D-14]. 그것은 드림시티 쇼핑몰의 사망 선고일이었다.
"인수자는 홍콩계 사모펀드예요. 그들의 목표는 쇼핑몰 운영이 아니라 '부지 개발'이고요. 계약 도장 찍는 순간, 이 건물은 폭파 해체되고 50층짜리 주상복합이 올라갈 거예요."
최유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 건물의 팝업 스토어와 매장들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그것들이 한순간에 먼지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회장님은 이미 마음을 굳히셨어요. 성수동 화재로 여론이 안 좋아지니까, 차라리 쇼핑몰을 비싸게 팔아서 현금을 챙기려는 속셈이죠."
나는 창밖으로 드림시티의 거대한 아트리움(중앙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만든 '검은 박스(침묵의 방)'가 있던 자리. 지금은 철거되어 텅 비어 있었다.
"차이현 씨. 방법이 있을까요? 2주 안에 회장님의 마음을 돌리거나, 인수자가 포기하게 만들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인수자가 이 건물을 사려는 이유가 뭐죠? '돈'이 되니까요. 쇼핑몰보다 아파트가 더 돈이 되니까 부수려는 겁니다."
"그렇죠."
"그럼 반대로 만들면 됩니다. '부수는 것보다 남겨두는 게 더 이득'이게 만들거나, 아니면 '감히 부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거나."
나는 최유라의 책상 위에 있는 펜을 집어 들었다.
"대표님. 쇼핑몰의 정의를 바꿉시다.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저장하는 곳으로."
"시간을 저장한다고요?"
"네. 1층부터 5층까지 뻥 뚫린 저 중앙 보이드(Void) 공간. 저기를 전부 '책'으로 채울 겁니다."
"책이요? 서점을 만들자는 건가요? 요즘 서점 다 망해가는 판국에..."
"서점이 아닙니다. '광장 도서관'입니다. 누구나 무료로 와서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쉴 수 있는 거대한 공공의 거실."
나는 종이 위에 거대한 책장을 스케치했다.
"사람들은 쇼핑몰이 없어지면 '다른 데 가서 사지 뭐' 하고 맙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추억이 담긴 도서관이 없어진다면? 분노합니다. 우리는 이 건물을 시민들의 '공공재'로 만들어버릴 겁니다. 함부로 철거했다가는 전 국민적인 욕을 먹게끔."
최유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비즈니스맨이다. 도서관이 돈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져올 '브랜드 가치'와 '집객 효과'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도 직감했다.
"미쳤군요. 쇼핑몰 금싸라기 땅에 공짜 도서관이라니. 회장님이 알면 뒷목 잡으실 텐데."
"그러니까 회장님 몰래 해야죠. 2주 뒤, 인수자들이 실사(Inspection)를 나오죠? 그때 보여주는 겁니다. 이 건물이 가진 진짜 '중력'을."
[Project: The Great Library (위대한 거실)]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24시간 풀가동 체제에 돌입했다.
최유라가 가진 자금력과 'The High'의 시공팀, 그리고 나의 설계가 합쳐졌다.
우리는 1층 중앙 광장에 있던 팝업 스토어 구조물들을 모두 치웠다.
그리고 벽면을 따라 거대한 구조물을 세웠다.
높이 13미터.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는 초대형 서가(Bookshelf).
"책은 어떻게 구하죠? 새 책으로 다 채우려면 예산이..."
서은 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새 책은 필요 없어요. 시민들에게 기증받을 겁니다. 대신 기증자의 이름을 책장 한 칸에 새겨준다고 하세요."
[당신의 책이 이 도서관의 기둥이 됩니다.]
SNS 공지가 나가자마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성수동과 국밥집을 통해 내 팬이 된 사람들이 트럭을 몰고 와 책을 기증했다.
단 3일 만에 5만 권의 책이 모였다.
책들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밑줄, 누군가의 메모,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역사'였다.
그 책들이 13미터 높이의 서가에 꽂히자, 텅 비어있던 쇼핑몰의 공기가 바뀌었다.
차가운 상업 공간에서, 묵직하고 경건한 '지식의 성전'으로.
그리고 D-Day.
매각 협상을 위한 현장 실사 당일.
강 회장이 홍콩 투자자들을 대동하고 드림시티 정문에 도착했다.
"자, 들어오시죠. 보시다시피 입지는 최고입니다. 건물만 철거하면 바로 착공 가능하고요."
강 회장은 의기양양하게 자동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와 투자자들은 얼어붙었다.
"이게... 대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쇼핑몰이 아니었다.
13미터 높이의 웅장한 책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고, 그 아래 수천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도떼기시장이 아니었다.
고요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책을 읽고, 노트북을 하고,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따뜻한 3000K의 간접 조명이 거대한 서가를 비추고 있었고, 어디선가 은은한 첼로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압도적인 '공간감'.
높은 천장이 주는 숭고함이 사람들을 겸허하게 만들었다.
마치 유럽의 대성당이나 오래된 도서관에 들어온 듯한 느낌. 이것이 바로 '카테드랄 효과(Cathedral Effect)'다.
"Welcome to Dream Library."
내가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보며 그들을 맞이했다.
강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차이현!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저것들 안 치워?"
하지만 홍콩 투자자 중 리더인 '제임스 첸'이 손을 들어 강 회장을 제지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대한 서가를 올려다보았다.
"Amazing..."
제임스 첸이 중얼거렸다.
"이런 공간은... 홍콩에도, 뉴욕에도 없어요. 쇼핑몰 안에 이런 커뮤니티가 있다니."
그는 서가 사이사이에 앉아 행복하게 책을 읽는 아이들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을 보았다.
그곳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삶'을 파는 곳이었다.
"회장님. 저 사람들 좀 보세요."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그들 앞에 섰다.
"이곳에 있는 책 5만 권, 전부 시민들이 기증한 겁니다. 책장마다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죠. 이 건물은 이제 회장님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 시민들의 것입니다."
나는 투자자 제임스 첸을 보며 말했다.
"미스터 첸. 당신들이 이 건물을 부순다고 발표하는 순간, 여기 있는 5만 명의 기증자와 그 가족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겁니다. 당신네 펀드 이미지는 바닥을 칠 거고요."
제임스 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돈을 원하지만, 리스크는 싫어한다. 전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까지 아파트를 짓는 건 부담스럽다.
"반대로, 이 도서관을 유지한다면?"
나는 태블릿을 켜서 데이터를 보여줬다.
"도서관 오픈 3일 만에 쇼핑몰 방문객이 300% 늘었습니다. 체류 시간은 5배가 늘었고요. 책 보러 왔다가 밥 먹고, 옷 사고, 영화 보고 갑니다. 아파트 분양수익? 그보다 이 쇼핑몰의 '운영 수익'이 장기적으로 훨씬 클 겁니다. 무엇보다 당신들은 '문화를 지킨 기업'으로 칭송받겠죠."
제임스 첸이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트래픽. 이것이 바로 '앵커 테넌트'로서의 도서관의 힘이다.
잠시 후, 제임스 첸이 강 회장에게 돌아섰다.
"강 회장. 계획을 수정해야겠소."
"네? 그게 무슨..."
"우리는 건물을 철거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 도서관을 포함한 쇼핑몰 전체 운영권을 인수하고 싶소. 물론, 이 공간을 만든 저 디렉터(차이현)의 고용 승계가 조건이오."
강 회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건물은 팔았다. 하지만 그의 계획대로 '비싸게 팔고 튀기'는 실패했다. 이 공간은 살아남았고, 나는 쫓겨나지 않았다.
최유라가 2층에서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거대한 책장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오래된 종이 냄새, 커피 향,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
자본은 공간을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 공간을 완성하는 건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기억이다.
나는 이 거대한 도서관을 통해 증명했다.
가장 사적인 쇼핑몰이, 가장 공적인 '제3의 장소'가 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을.
Q. 왜 코엑스 한복판에 '별마당 도서관'을 만들었을까? (제3의 장소)
스타필드 코엑스몰의 별마당 도서관은 쇼핑몰의 황금 같은 중앙 공간을 '공짜' 도서관으로 내어주었습니다. 임대료로 따지면 연간 수백억 원의 손해일 텐데, 왜 그랬을까요?
1. 제3의 장소 (The Third Place)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제시한 개념입니다. 집(제1)과 직장(제2)을 떠나, 격식 없이 편안하게 머물며 교류할 수 있는 '제3의 장소'가 인간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카페, 공원, 도서관이 이에 해당합니다. 쇼핑몰을 제3의 장소로 만들면, 고객은 '물건' 때문이 아니라 '힐링'을 위해 그곳을 찾게 됩니다.
2. 집객 효과와 낙수 효과
별마당 도서관이 생긴 후 코엑스몰의 유동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서관 인증샷을 찍으러 왔다가, 주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쇼핑을 합니다. 도서관이라는 '거대한 자석(Anchor)'이 죽어가던 상권 전체를 살려낸 것입니다.
3. 대성당 효과 (Cathedral Effect)
천장이 높은 공간(3m 이상)에 있으면 인간은 추상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반면 천장이 낮은 공간에서는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업무에 집중하게 되죠. 쇼핑몰의 높은 천장은 고객에게 심리적 해방감을 주어, 더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듭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돈을 쓰게 하지 말고 시간을 쓰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