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깃] 후배 직원에게
후배가 찾아온다. 눈빛부터 심상치 않다. 뭔가를 안고 왔다. 난제(難題)를 들고 왔다. 순간 속으로 외친다. ‘아. 제발 말 걸지 마..’ 최대한 인상을 쓴다. ‘내 얼굴 보고 돌아가라고!” 그러나 어김없이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부장님, 이 건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
이게 어디 간단한 문제겠는가. 협력업체 세 군데가 엉켜 있고, 상무님 의중은 오락가락하며, 고객은 "빨리 좀" 재촉하는 상황. 순간의 결정으로 의외의 파급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영역도 있다.
순간 머리 속에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 나도 모르는 건데 어떻게 대답하지. 둘째, 저 건 잘못 건드렸다가 내 책임이 될 수도 있겠는데. 셋째, 지금 나 점심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이건 공식 비밀).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해야 한다. 연륜의 무게를 발산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즉답도 주지 않으면서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이런 난국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말이 있다.
"같이 고민해 봅시다."
이 문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동시에 해낸다. 후배는 위로받고, 당신은 시간을 벌고, 책임 소재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판단을 보류하되, 무능해 보이지 않는 마법이다. 오히려 짐짓 고상(高尙)하고 신중한 리더의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우선, '같이'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이 단어는 상대에게 "너와 나는 같은 편"임을 암시한다. 우리 둘 다 이 문제 앞에선 동지라는 것이다. 협상이나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대 구도를 허물어뜨리고, 공동의 이익을 설계하는 프레임이다. “같이 고민해봅시다”와 “좀 더 고민해봐요”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주어는 “우리”이고 후자의 주어는 “당신”이다. 실제로 실무를 후배직원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떤 상사는 “같이 고민해보자”고 제안하며, 모든 것을 품어줄 듯한 풍모를 연출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007 영화의 스파이로 내몰린 지 오래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면 넌 그때부터 혼자다. 사회는 냉정하다. 아파도 웃어라. 아무도 믿지 마라. 남의 말을 옮기지 마라. 꼬리를 밟히지 말고, 뒷통수를 조심하라.
이런 각박한 사회에서 "고민은 너 혼자 열심히 해보고, 깐깐한 날 설득시켜라"라는 상사들이 많다. '알아서 잘 해봐요', 혹여나 책임이 넘어올까 걱정하는 보신주의 상사들 틈 속에서 "자네 고민이 있나? 어서 와, 나와 함께 고민해 보자"라는 말은, 강호의 도덕적 기준이 모두 무너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바람직한 직업 윤리를 함께 세워가자고 손을 내미는 올곧은 악수의 표징으로 평가받아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다음. '고민해 봅시다'라는 표현. 사실 "고민해봅시다"는 현실 직장 속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괴리감이 있는 표현도 아니다. 쓰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도리어 고급스러운 이미지까지 내포되어 있다.
고민하는 자의 이미지가 무엇인가. 커피 한 잔이 놓인 책상 위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는 모습에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는 떨어진 주식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빡세다'라는 저급 표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우수(憂愁)어린 가을형 인간을 대표하는 표현이 바로 '고민'이다. "고민하고 있다"는 말은, '나 역시 한낱 왜소한 인간일 뿐이요' 고통 속 세상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가 되는 순간이다.
또한 '고민'이라는 것은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파일 제목을 어떻게 표시해서 전달할까, 이메일의 첫인사를 어떻게 시작할까. 이런 사소할 수도 있는 일에 잠시 멈춰 고민한 적 있는 사람은 세심하다. 마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왔다 간지도 모르는 산타클로스나 도둑처럼, 섬세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 대인배다. "나의 선행을 알리지 말라." 상대의 마음 상태까지 고려하는 치밀함은 업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상대는 '오늘 답 듣고 싶어 안달났다, 지금 당장 결판을 내고 싶다'는 속내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함께 고민"을 선언하는 순간, 그 초조함은 반으로 쪼개진다. 상대도 '같이 고민하는 주체'가 되어버리고, 혼자 고민하던 판이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 함께 결정 미루기'로 전환된다. (집단 파업은 아니다.)
이 구문은 결론적으로 일을 잠시 보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자 이미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 둘 다 생각이 필요한 어려운 문제네요"라는 프레임으로, 우리를 숙고하는 지성인으로 승격시킨다.
그 사이에 당신은 시간을 벌고, 정보를 모으고, 타이밍을 조율해서 최적해를 찾아낸다. 상대에게는 집단 지성(集團知性)을 끌어모으는 고급 전략가의 제안처럼 들린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책임감 있어 보인다는 것, 이게 이 문장의 힘이다.
최 대리: 부장님, 이번에 신규 거래처 B사 조건을 어떻게 잡을까요? 저희 쪽에서 먼저 제안서를 보내야 하는데, 가격을 얼마로 써야 할지...
나: (속마음: 아 이거 잘못 썼다가 나중에 "부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요" 소리 듣는 거잖아. 이건 내가 단독으로 대답하면 안 되는 유형이야.)
(끄덕끄덕) B사 최근 발주량이나 결제 조건은 파악이 됐어요?
최 대리: 아, 그건 좀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나: (잠깐 일부러 뜸 들이기) "그럼 함께 고민해봅시다. 가격 먼저 쓰면 나중에 우리가 불리해질 수 있어요."
최 대리: 아... 그렇군요? (역시 부장님 신중하시다.)
나: B사 작년 매출 규모 먼저 조회해보고, 비슷한 조건 거래처 단가 비교표 만들어봐요. 그거 들고 다시 와요. 그때 같이 보면서 잡읍시다.
최 대리: (기꺼이) 네! 알겠습니다.
나: (속마음: 최 대리야. 니가 고민하는건데, 뭔가 대인배가 된 이 기분은 뭐지. 능구렁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최 대리: 부장님, 이번 신제품 라인에 환경인증 추가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규제 쪽이 애매해서요.
나: (고혈압 모드 ON 직전 — 나도 모르거든요) 오, 그래요. 참 좋은 질문이야.
(몇 초 후 표정관리 완료. 근엄체 장착)
환경인증 쪽은 요즘 변수가 많아서... 좋은 질문인데요. 잠깐 같이 생각해 봅시다.
최 대리: 감사합니다! 제가 조사 자료 먼저 뽑아볼까요?
나: 그렇게 해봐요. (끄덕끄덕)
최 대리: (역시 부장님은 다르다는 표정으로 퇴장)
나: (쑉~! 좋아. 조사는 최 대리가 한다. 나는 그 자료 보고 판단만 하면 된다. 작금(昨今)의 효율적 업무 분배라고 사료(思料)되는 바... 됐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최 대리: 부장님, 점심 메뉴 뭐로 할까요? 짜장이요, 짬뽕이요?
나: (근엄하게 안경 고쳐 쓰며) "같이 고민해 봅시다. 단순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요."
최 대리: (??? 부장님 요즘 많이 힘드신가...)
나: 일단 11시에 팀원 소집해서 메뉴 선정 회의 잡아요.
최 대리: (정신 나갔나봐.)
→ 사소한 질문에 중후한 구문을 얹으면 신뢰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이 구문은 '무게감 있는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만 꺼내야 한다. 짜장 vs 짬뽕에 쓰는 순간, 팀 전체가 '부장님 메뉴 선택도 혼자 못 하시네'로 읽는다.
(공장에서 전화가 온다. 생산 라인에 문제가 생겼다. 납기를 맞추려면 당장 해결해야 한다)
현장 팀장: 부장님!! 지금 불량이 터졌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 (표정관리) 같이... 고민해 봅시다.
현장 팀장: (지금 불이 난 상황인데 고민을요?!)
→"같이 고민해 봅시다"는 시간이 있을 때만 작동하는 말이다. 위기(危機)의 시간은 유예가 아니라 결단(決斷)을 요구한다. 결단을 미루면, 능구렁이가 아니라 그냥 무능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잘 구분하자.
최 대리: 부장님, 지난주에 같이 고민해 보기로 했던 A사 건, 어떻게 됐나요?
나: (아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표정관리) 음... 좀 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요.
최 대리: 고객이 오늘까지 답 달라는데요...
나: 더 같이 고민해 봅시다. 최 대리: (이분 완전히 없는 사람이다...)
→ "같이 고민해 봅시다" 이후에 후속 액션 없이 잠수를 타면, 이건 전략이 아니라 그냥 도주다. '고민 선언' 이후 반드시 기한을 박아야 한다. "내일 오전 10시에 다시 앉읍시다" 혹은 "금요일까지 자료 취합 후 결정하죠"라는 안전핀을 꽂아야, 무책임이 아닌 '치밀함'으로 해석된다.
상황에 따른 변주 3가지
급한 척 여유 부리기: "지금 바로 답하기엔 좀 복잡하네요. 같이 짚어봅시다." — 즉답을 회피하면서도 '복잡성 인식자'의 이미지를 얻는다.
팀 미팅으로 넘기기: "이 부분은 팀 안에서 같이 고민해 봅시다." — 소수의 문제를 팀 이슈로 확장해서 혼자 짊어지지 않는다.
시간을 끊는 버전: "오늘 오후에 같이 한번 봅시다." — '같이'는 유지하면서 시간을 확보한다. 그 사이 나는 열나게 공부한다. 이건 비밀.
"함께 고민해 봅시다" → (그리고 영원히 잠수) 하면 그냥 도망친 거다. “같이 고민해봅시다” 이후에는 반드시 후속 피드백을 하라. "같이 고민해 봅시다" 한 마디만 던지고 끝내면 후배는 빈손으로 자리로 돌아간다. 이게 두세 번 반복되면 그 후배는 다음번엔 상사의 자리에 오지 않는다. 스스로 결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 결국 나는 팀에서 정보의 흐름 밖으로 밀려난다. 그건 진짜 무능이다. "같이 고민해 봅시다 + 언제 다시 봅시다/누구누구 불러봅시다"가 세트다.
표정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갸우뚱하거나, 굳이 안경을 고쳐 쓰거나, 펜을 귀에 꽂거나 혹은 잠깐 내려놓아야 한다. 이 작은 행동들이 "나는 이미 큰 그림을 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떤 에이스는 이 멘트를 사용하기 위해 안경을 새롭게 맞추었다는 전설도 있다. 장비가 부족하다면 이마에 인상을 쓰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 구문을 응용해서 후배직원이 아닌 동료급 이상에게 사용할 경우, 안 통할 때가 있을 것이다. 결과만 원하는 불도저형 동료. "같이 고민해 봅시다" 하면 "지금 바로 말해요"라고 나온다. 이럴 때는 변형을 써라. "일단 제 쪽에서 오늘 오후까지 결론 여부를 파악해서 바로 말씀드릴게요"로 전환한다. 핵심은 '기한을 주면서 내가 챙기겠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게 능구렁이의 속임수이자 진짜 실력이다. (두 가지가 같은 말이다.)
오늘의 문장 “같이 고민해 봅시다”. 첫째, 성급한 단독 결정을 막아준다. 둘째, 책임을 분산하면서 신중한 리더 이미지를 선물한다. 셋째, 후배와의 관계를 '지시-복종'이 아닌 '공동 문제 해결'로 업그레이드한다.
실전 미션 - 동료가 어떤 질문을 갖고 오면 바로 답하지 말고 "같이 고민해 봅시다"를 한 번만 써보자. 안경은 반드시 고쳐써야 하며, 펜이 있다면 귀에 꽂아보자.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다음 미팅 시간을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