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AR 타르>를 중심으로
예술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다. 바로 ‘권력’이다.
나는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다. 뭐 대단한 꿈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음악이 너무 좋았고,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아라는 게 형성될 무렵 음악을 전공하기로 결심했고, 무작정 이 판에 뛰어들었다. 처음 마주한 장벽은 ‘나에게 음악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었다. 주변에 음악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환경에 있었던 나는 학원에 아무나 붙잡고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부탁’을 하였고, 다행히 그 ‘부탁’은 내가 타고난 한 줌의 알량한 재능을 보여줌으로 인해 성사되었다.
클래식을 들으면 심장이 뛰고 눈물이 차오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벅차오름이 느껴져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계기가 얼마나 지나치게 순수하기만 했는지 알게 되는 건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떤 클래스에서, 누구에게 사사받았고, 어느 학교에서 어떤 사람들과 학사를 마쳤으며, 또 이어지는 독일 유학이니, 미국 유학이니, 그 중에서도 최우등 성적을 거뒀느니, 어떤 악단에 소속되었고 어느 규모의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느니 하는 것들로 – 소위 말해 ‘타이틀’이라는 것들로 사람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사회였다. 앞서 말했듯, 지나치게 순수한 의도로 클래식을 시작했던 나는 나의 재능과 환경과 한계를 직감했고 재빨리 다른 세계로 핸들을 꺾었다.
졸업한 지 수 년이 지나자 끝끝내 그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의 한숨 섞인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떤 오케스트라는 단원을 출신대학 순으로 앉힌다더라,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세계적인 작곡가에게 밉보여서 배척당할 위기에 처했다더라, 돈이 없어서 교수 임용이 불발되었다더라 하는. 급기야 가장 재능있었던 친구가 음악을 포기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까지. 암울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비단 음악계의 일 뿐만은 아니지만, 가장 탈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예술 분야에서 기성세대의 꼰대문화로 인해 젊은이들의 꿈이 좌절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겉과 속이 다름’에서 오는 ‘속물적임’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이러한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바로 ‘TAR 타르’이다. 케이트 블란쳇의 호연으로 아카데미 수상이 점쳐지면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접했을 때 왜 영문명과 한글을 연달아 표기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두 시간 반이나 되는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앞부분에는 지나치게 긴 테이크에 졸음이 쏟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극중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가 토크쇼에 소개되고, 또 대학교 강단에서 ‘바흐의 도덕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학생’을 공개처형하는 씬이 그러했는데, 이 두 장면은 이 영화에서 리디아 타르의 권력이 정점에 있음을 영화의 시작부분부터 관객에게 설득시키고 시작하기 위해 꼭 필요한 씬이었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이 영화는 시작 부분에 크레딧이 올라가고 동양적인 선율의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길게 깔리는데, 두시간 반이 지나 이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이 부분이 영화의 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권력의 정점(시작)에서 권력의 나락(끝)으로 떨어지는 한 인물 (리디아 타르)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하강 서사의 힌트를 ‘크레딧을 앞에 배치함’으로써 구현해 내는 감독의 센스가 돋보였다.
케이트 블란쳇의 호연은 말할 것도 없었고, 특히나 ‘레즈비언’의 특징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에서 영화 <캐롤>에 이어 배우가 가진 특유의 매력을 힘껏 발산하기 충분했다. 이러한 설정이 소위 말해 ‘음악계 꼰대’이자 ‘속물’이자 ‘권력의 정점에서 가스라이팅을 하는’ 인물을 새롭게 그려내는 장치가 되었다. 기존 미디어와 사회에서 주로 목격했던 이러한 특징의 인물들은 주로 기성세대 중년 남성이었는데, 그 설정을 케이트 블란쳇을 통해 비틀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묘하게 ‘특유의 불쾌감’을 중화시켰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영화관 사운드로 ‘말러’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기 전까지, ‘말러’는 잘 알 수 없었던 작곡가였는데, 전공을 하면서 ‘교향곡(심포니)의 끝은 말러’라는 것을 악보 분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말러 심포니는 편성과 분량과 서사와 세계관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클래식 애호가 중에서도 ‘말러’에 빠진 사람은 말러 음악을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고집스럽게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중 케이트 블란쳇이 ‘말러 5번’을 공연에 올리기 위해 리허설을 하며 지휘를 하는 장면은 클래식 전공생으로서 만족이 되다 못해 흡족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케이트 블란쳇이 분한 ‘리디아 타르’의 손짓과 표정과 팔근육과 떨림, 그리고 몸짓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러를 정말이지 온몸으로 표현해내었다.
이러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영화는 후반부로 향할수록 미간을 자극했는데, ‘권력의 무너짐’을 정말 예술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기존 미디어에서 주로 그려냈던대로, 권력 하강의 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선굵은 사건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믿었던 사람이 하나둘씩 선을 긋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언론플레이를 하며, 또 불운에 불운이 겹쳐 일상의 미묘한 것들이 하나 둘씩 제 뜻대로 안되기 시작할 때, 사람은 미쳐간다. 헛되기 짝이없는 그 ‘권력’이란 것이, 또 얼마나 ‘힘’이 없이 무너져가는지 이 영화는 잔인하게도 세세히 그려낸다. 연인이 떠나가고, 후배가 외면하고,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고, 동료들마저 뒷담화를 하며, 딸을 빼앗기고, 가족조차 품어주지 않아, 결국 고국을 떠나는 리디아 타르의 삶은, 발가벗은 채로 태어나 한 줌 권력에 도취되었다가 다시 발가벗은 채로 삶을 살아나가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엔딩은 이 영화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오리엔탈리즘’이, 독일 베를린을 벗어나 소위 말해 ‘망한’ 마에스트로의 비극을 구현해내는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 조금 거슬렸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클래식이 처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직시하라고 해도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은, 그렇게 ‘팩트’라고 선굵게 폭력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건 오리엔탈리즘을 살아내는 인간들의 삶과 그 안의 예술들이 지금도 살아숨쉬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적어도 내가 본 가장 황당한 엔딩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TAR 타르. 적당하면 도움이 되나 과하면 유해물질이 되는, 권력의 속성과 맞닿아 있는 아이템이었다. 또한 TAR이라는 알파벳의 재배치가, 예술을 뜻하는 ART가 되기도, 또 권력에 도취되어버린 쥐(RAT)가 되기도 하니, 영화의 제목에서 TAR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제작사의 고민이 느껴진다. 예술영화일 줄 알고 감상했으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권력의 기억들을 곱씹어 보게 만든 영화. 수많은 예술, 또는 그 무엇을 사랑한 이들이 그것들을 껴안았다가 독성에 다쳤던 기억을 떠올리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음악평론가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