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음악에 대하여 — 샤이니, View

공명이란 그런 것이다

by 이예진
SHINee 'View' MV 스틸 컷. (c) SM Entertainment, 2015

소리굽쇠 두 개가 나란히 고정되어 있다. 막대기를 들어 하나를 ‘댕—‘하고 친다. 그 순간, 옆에 있는 소리굽쇠는 어떻게 될까.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따라서 울린다. 같은 주파수에 반응하는 현상. 이것을 우리는 ‘공명’이라고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쏟아지는 수많은 영상 속 유독 어떤 영상은 조회수가 높고, 또 어떤 영상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우리는 콘텐츠를 통해 우리 안의 주파수와 맞닿는 그 무엇을 찾으려고 한다. 그 안에는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무언가와 공명함으로써 혼자가 아님을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진 후 집에 가는 길, 우리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금까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데, 혼자가 된 나를 달래려는 행위. 이러한 공명은 자연발생적이며, 인위적이지 않고, 존재만으로 울린다는 특성이 있다. ‘관계’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그러나 시절 인연, 시절 상황에 의해 누군가와 엮인다. 감정이 부푼다. 그 안에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또 부대낀다. 이러한 행위에는 의지가 필요하고, 맞춰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상대의 의중과 마음을 살펴야 한다. 유독 어떤 관계가 편안하다면, 이러한 수고를 덜 요하는 나와 ‘비슷한’ 사람에 가까운 것이지, 완전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없다.


관계와 공명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것이 음악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은 한 시절 우리에게 나타나 ‘유행가’로 불리며 반응하게 만든다. 팬덤이 강한 아이돌 음악의 경우, 사실 ‘음악’은 매개일 뿐, 같은 시대를 향유함으로써 결속되는 소속감의 측면 또한 작용한다. 이 음악들은 관계의 영역에 가깝다.


그러나 관계와 공명은 반드시 분리되어 있지 않다. 팬덤이 입구가 되어 음악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악에 먼저 공명한 뒤 그것을 함께 나누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관계를 통해 공명으로 깊어지는 경우, 공명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경우 —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음악 앞에서 무언가 ‘울렸는가’이다.


반면 어떤 음악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그저 듣기만 해도 내 안의 나와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시대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당대의 유행만을 따르지는 않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음악들은 ‘세련되다’라는 느낌을 준다. 반면 앞선 텔미(Tell Me)처럼 음악 자체가 내포한 힘이 유행을 선도한 경우, 그 음악은 시대를 강하게 흡수한다. 그런 음악들은 시간이 흘러 나중에 들어도 그 시대를 선명하게 머금고 있지만, 동시에 다소 ‘촌스럽다’라는 소모된 음악으로서의 흔적 또한 갖게 된다. 한때 부풀었던 것들의 현주소다.



지금 틀어놓고 읽어도 좋다. 처음부터. SHINee 'View' Official MV (c) SM Ent.

‘View’는 어디에 해당할까. 기본적으로 이 음악은 세련되다. 십여 년이 흘러서도 여전히 이 음악이 세련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음악의 장르에 있다. 딥 하우스. 4분의 4박자의 정박을 때리는 하우스 비트, 베이스, 그리고 미니멀한 신시사이저. 꼭 필요한 뼈대만 남긴 이 장르의 음악들은 이 책이 쓰이는 2026년에도 여전히 아이돌과의 조합으로 차트 상위권을 장식하고 있다. 딥 하우스를 K팝과 접목하여 성공시킨 첫 사례가 바로 ‘View’다.


K팝에서 이 시도는 낯선 선택이었다. 2012년 디스클로저(Disclosure)를 중심으로 하우스 열풍이 불던 때, 영국의 전자음악 프로듀서 런던노이즈(LDN Noise)와 작업한 SM은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은 ‘View’를 필두로 f(x)의 ‘4 Walls’를 비롯해 2026년 신인 걸그룹 키키(KiiiKiii)의 ‘404(New Era)’에 이르기까지 하우스 장르로 K팝의 척추를 곤두세우고 있다. 하우스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미니멀해서만이 아니다. 인간의 심장박동보다 약간 빠른, 어떤 고양감을 가지면서 심장과 공명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사운드를 꽉 채우거나 억지로 감정을 따라가게 하는 수고 없이, 그저 뼈대만 남기고 존재한다. 그렇기에 하우스는 시간의 바깥에 있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시카고에서 출발한 이 장르의 기원인 미스터 핑거스(Mr. Fingers)의 ‘Can You Feel It’을 들어본다. 1986년도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40년이 넘는 시간이 덜 느껴진다. 킥 사운드, 808비트, 베이스가 전부다. 아무것도 부풀지 않고 구태여 넣지 않은 채 비워뒀기 때문에, 한 마디로 과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운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우스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케리 챈들러(Kerri Chandler)의 ‘Atmosphere’도 마찬가지다. 1998년 작으로, 처음에는 오직 하우스 비트 하나만 정박에 올리는 과감함을 택한다. 그러다 하이햇 사운드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30초 경의 일이다. 이후 비트가 하나둘씩 서서히 추가되고 마침내 베이스와 신시사이저가 미니멀하게 더해지며 사운드를 완성해 나간다. 아니, 처음부터 이미 완성이었다. 비트 하나만으로.


이 모든 곡을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들어도 어색하지 않다. 자극이 아니라 공명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우스는 소진되는 음악이 아니다. 유행은 빌려온 것이고, 빌린 건 반드시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절 인연과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그렇듯이.



클래식 음악에는 ‘리덕션(Reduc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오케스트라 총보를 피아노 두 손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핵심만 추려내는 작업이다. 어떤 곡이든 리덕션을 거치면 그 곡의 뼈대만 남는다. 장식과 색채를 걷어낸 자리에 남는 것, 그것이 그 음악의 진짜 구조다.


‘View’를 리덕션한다면 딱 세 개의 화음 왕복으로 설명이 끝난다. 곡은 처음부터 이 코드들의 왕복으로 시작된다. 살짝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경로가 조금 달라도 도달점은 언제나 같다. 그 반복이 주는 것이 안도감이다. 나머지 — 비트, 리듬, 신시사이저의 레이어 — 는 이 뼈대 위에 얹히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더 확장하지 않아도, 구태여 구구절절하지 않아도 이미 완성이다.


길을 가다가 만약 도입부의 코드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지 like you’라며 전개를 시작할 것이다. 이 곡은 후렴부터 흥얼거리는 사람보다 도입부부터 부르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건 이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야 완성되는 유기적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조각만 발췌하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곡은 처음의 코드로 이미 끝난 것이고, 나머지는 필연적인 전개이자 여정이다.



보통 우리가 클라이맥스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어떤 조건들이 있다. 소리 레이어가 풍성해짐으로써 볼륨이 커지고, 높은 음역대의 음을 내지름으로써 이목을 끌거나, 강렬한 비트로 어떤 비워지는 공간 없이 빼곡하게 쾌감을 더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곡은 그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1절에서 펼쳐지며 흩어지는 것들이 일순간 하나의 목소리와 베이스라인으로 응집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에너지를 느끼게 만든다. 펼쳐 보이지 않는 것. 소리들이 볼륨감을 키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워서 안으로 공간감을 넓히는 방식. 팽창이 아니라 함몰. 그런데 그 함몰이 해방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하우스의 매력이고, 이 곡이 해방감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이 곡의 아름다운 ‘View’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곡을 들으며 시각이 청각으로, 청각이 촉각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공감각적인 느낌을 받는다. ‘달콤히 찍어 문 빛의 퐁듀’, ‘보이기 시작한 음의 색’, ‘바다를 병에 담는 시간’, ‘별빛의 향과 맛’, ‘향기의 무게’, ‘소리의 색과 모양’까지. 단순히 아름다운 표현을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다.


이 곡을 듣는 순간만큼은 렌즈를 달리 끼는 것이다. 만화경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조각들이 — 이미 우리 안에 있던 감각들이 — 다른 각도로 배열되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 곡이 만들어내는 ‘View’가 그렇다. 기존에 우리가 알던 소리와 향기가 무게와 모양이라는 다른 지표로 환산될 때, 그것들이 어떠한 형태와 감각으로 다르게 다가오는가. 그렇게 쏟아지는 색다른 빛. 이 곡의 신시사이저 질감이 그 빛과 정확히 맞닿는다. 투명하고 선명하게.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 반복이 주는 안도감 속에서, 딱 한 번 ‘브릿지에서’ 그 흐름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발을 뗀다.


‘지루함에 익숙해져 / 이제 천천히 고개를 들어줘 / 내 두 눈에 입 맞춰.’ 그 순간 서광이 비치는 것 같은 코드가 등장한다. 그리고 곧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존재. 원래 있던 대로. 빌려오지 않고. 그 한 번의 이탈이 곡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을 만든다. 반팔 티에 청바지로 빈티지한 매력을 낸 것처럼, 뼈대만 남긴 전략이 클래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스물다섯이었던 종현은 이 딥 하우스를 택했다. 아이돌임에도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자기 언어로 말하고, 과장하지 않으며 뼈대로 존재하려 했던 아티스트였다. 그러한 선택이 이 곡을 가능케 했다.


샤이니의 ‘View’가 K팝 역사에서 빛나는 이유는 관계인 동시에 공명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한때의 팬덤이 시간을 지나 더 단단하게 응집된 것처럼, 이 음악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선명해진다. 샤이니가 현재형인 이유, 그리고 ‘View’가 현재형인 이유는 같다. 이 음악이 관계를 넘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곡을 듣는 동안 우리는 구태여 뛰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다운 다운 다운’하고 움직이는 입과 함께. 그런 것들은 우리를 긴장하거나 고양시키지 않는다. 그저 본연의 선명한 나로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공명하는 음악을 좋은 음악이라 느낀다. 내 안에 있던 것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음악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관계가 아니어도, 그저 나 자체와 공명하는 음악이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나를 알기에 괜찮을 수 있다. 억지 감동으로 신파를 쓰기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천천히 확인시켜주고 이름을 붙여보는 것. 그렇게 비로소 선명해지는 나를 느끼고 싶다면 ‘View’의 청취를 권한다. 처음부터.


공명이란 그런 것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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