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냥 이대로 뒤돌아가는가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何如歌)>

by 이예진

십 대 시절. 내가 분노했던 두 가지 사건을 떠올려 본다.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학교에 백만 원을 낸 사건과, 중학교 시절, 가위로 머리를 잘렸던 사건이다.


어떤 대단한 야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친구들과 선생님의 등에 떠밀려 한번 같이 해볼까 하고 출마했던 전교 부회장직에 당선됐다는 이유로, 엄마가 나도 모르는 사이 학교에 불려 가 교무부장과 교장, 전교 회장 엄마라는 세 명의 압박에 못 이겨 학교에 돈을 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정말 분노했었다. 사립고등학교의 병폐랄까. 나는 그 후로 학교에 대한 정이 떨어졌었고, 재수, 삼수를 거듭하며 학교에 성적표를 수령하러 가는 이십 대 초반까지도 내가 가장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의 이면을 목격한 것에 대해 분이 풀리지 않아 썩 유쾌하게 기억되지 않는다. 늘 웃으며 따랐던 지긋하신 화학 선생님이 엄마에게 학교에 돈을 내라고 했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낸 균열은 꽤 오래갔다. 당시 자기 딸이 불이익받을까 봐 조용히 돈을 냈다던 엄마를 탓하던 못난 딸이었다. 어린 마음에 훗날 언론인이 되어 이걸 파헤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 다짐의 잔여물이 이런 글이 되어 남아 있다.


중학교 때는 약간의 충격에 가까웠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 아니 어쩌면 전국구 단위로 가장 엄하기로 소문난 학교의 규정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1학년이라 교칙을 정확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발머리로 자르고 등교했는데, 선생님은 자를 꺼내 머리를 쟀다. 몇 센티 근소하게 오버됐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머리 한쪽을 가위로 뎅겅 잘랐다. 본보기였다. 그것도 한쪽만. 타의로 머리를 잘렸던 경험은 당시 사춘기였던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가 조금 이상했는데, 나는 오히려 더 짧은 커트 머리로 자르고 만족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과의 스코어는, 훗날 그 선생님이 기습적으로 낸 영어 시험에서 청산했다. 교과서 장문의 글을 통째로 쓰라는 백지 시험이었는데, 미리 예습하며 외운 덕에 유일하게 다 써냈다. 어린 마음에,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불가항력적으로 무엇인가를 겪게 되었을 때는, 마음에 분노가 인다. 그걸 사회에서 처음 경험하게 됐던 때가 십 대였던 것 같다. 요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지만. 그 갈 곳 잃은 분노들은 나를 좀먹게 하거나, 혹은 사회를 탓하게 하거나. 건강하게는 나를 이 악물게 하는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 분노의 소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다면, 그것은 메탈일 것이다.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RATM)의 'Killing in the name'를 지금까지도 간혹 찾아 듣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강렬한 에너지를 함축한 기타 리프를 따라 내적 헤드뱅잉을 하다 보면 무언가 분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감정이 해소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나 타인이나 사회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노래가 1992년 11월 발매, 그리고 이듬해, 하여가가 대한민국 음악사에 놓인다. 다만 RATM의 분노가 바깥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라면, 하여가의 분노는 방향을 잃은 쪽에 가깝다. 공공의 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갈 곳 없는 에너지가 음악의 형태로 터져 나온 것이다.


하여가(何如歌). 하여가와 단심가의 그것을 가져온 것부터 어떤 민족과 시간을 관통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내포하는데, 당시의 에너지에 관한 배경적 서술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훗날 <응답하라 1994>에 이 음악의 인트로가 로고와 함께 쓰이면서 후대에는 199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한 차례 더 각인되었다.

그게 이 곡에서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무대 (1993)

에너지는 상당하다. 트로트에서 십 대들이 열광하는 가요로의 전환, 전복이 일어나는 분기점. 김수희의 '애모'와 서태지의 '하여가'가 1위를 나눠 갖던 해.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와 '난 그냥 이대로 날 잊어버리나'가 공존하던 해. 30년 간의 군사정권이 마침표를 찍고 문민정부로 전환하던 때. 공공의 적, 혹은 분노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방향을 잃은 '갈 곳 없는 분노'가 서태지의 음악을 타고 공명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음악.


이 곡은 당대의 파급력만큼이나 시대를 소환하는 방식으로 현재와 연결된다. 지금 세대의 분노가 이 곡과 연결되느냐는 질문에 있어서는 물음표가 그려진다. 현세대의 분노는 사회를 탓하기보다 개인의 자책으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대표적으로 파란노을(Parannoul)의 음악. 기타를 연주하는 발끝, 내면을 응시하며 부유하는 형태의 슈게이즈 사운드. 메탈, '하여가'의 발산과는 에너지의 방향이 다르다. 그렇기에 이 곡은 타임캡슐처럼 봉인된 형태로 1990년대 라벨링을 부착하고 있다.


사운드 역시 그러하다. 전주 부분의 확실한 종지(라-솔-레-미), 레게 장르에서 기인한 빠른 랩은 이후 1990년대 가요들의 시그니처가 되어 '옛날 노래'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특유의 '마.음.이'라며 강조점을 불어넣는 호흡은 이 곡이 시발점이었으나, 이후 유사한 곡들이 쏟아지면서 후대에는 오히려 '옛 가요'의 클리셰처럼 들리게 되었다. 스크래치 사운드, 마이너 메탈. 한번 유행하고 돌아오지 않은 사운드들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유효한 사운드라고 확언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태평소는 지금도 현대적으로 들린다. 메탈, 힙합, 국악. 이 삼위일체의 완성 지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e 마이너의 조성에 e 메이저로 흘러가는 능게 가락(경기민요)을 얹어 분노가 쾌지나 칭칭으로 치환, 승화되는 듯한 고양감을 주는 것이 포인트이다. 이는 앞선 메탈 사운드의 강렬한 파워코드와 함께 치닫다가, 갑자기 솔#, 그러니까 e 메이저 코드의 소리로 태평소가 연주를 시작하면서 밝은 에너지의 축제 분위기로 전환하는 듯한 느낌이 '이질적 충돌’을 강화한다.


메탈과 힙합이 당대의 사운드로 소비된 반면, 태평소가 여전히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그 이후에 국악을 가미하는 스타일이 지금껏 시대의 소리로까지 확산될 정도로 안착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국악기와 양악기는 음계 자체가 다를뿐더러, 잘못 사용하면 '촌스럽다’라는 인식이 일정 부분 유효했기에, 너도나도 이 방식을 차용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에너지는 아직 터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팽창된 채로 있다. 언제 다시 공명할지는 모를 일이다.


다시 돌아와, 십 대의 나는 이 곡과 끝내 만나지 못했다. 서태지가 하여가를 발표했을 때 나는 그 분노의 주파수를 수신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 시절 서태지는 내게 휴지기였고, 내가 그의 음악에 닿은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하여가의 '난 그냥 이대로 뒤돌아가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솔직히 말하면 그냥 뒤돌아간 쪽이었다. 머리카락을 한쪽만 잘렸다고 인권 운동을 할 위인도, 사립학교의 위선을 발견했다고 대자보를 붙일 그릇도 되지 못했다. 그냥, 더 짧게 자르고, 시험을 외우고,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내 키만큼의 방식으로 버텼다.


나의 분노와 이 곡이 진짜로 맞닿은 건 십 대가 아니었다. 이십 대 중반, 마지막 관문에서 떨어진 입사 시험이 있었다. '당했다’라는 감각이 십 대보다 훨씬 선명했고, 갈 곳이 없었다. 태평소 소리처럼 갑자기 조성이 바뀌는 반전도 없었다. 그냥 마이너였다.


그런데도 이 곡은 청쾌하다. 하여가가 타임캡슐처럼 봉인되어 있다면, 나의 그 순간들도 어딘가에 그렇게 봉인되어 있다. 이 글이 그 봉인을 잠깐 열었다 닫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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