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를 보고 : 하나의 빛깔에 관하여

by 이예진

내가 정말 좋아했던 국내 뮤지션이 있다. 그의 앨범들은 마치 거대한 취향 모음집 같았다. 흔히 프로듀서형 가수들이 그렇듯 가창은 본인이 하지 않고 주로 작곡에만 가담했는데, 그의 트랙들에서 팻 메스니를, 데이비드 포스터를, 사카모토 류이치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저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어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를 먼저 알게 된 후 자연스레 그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귀가 끌렸으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후 그 뮤지션의 표절 논란이 제기됐다. 인터넷 곳곳에는 그의 음악과 그 뮤지션들의 곡들을 나란히 붙여놓은 영상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 영상들을 보며 나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이르렀다. 이 때 깨달은 것은, 조금 지루하고 진부하고 자기복제적이더라도, 한 사람이 진실하게 내놓은 작품들은 응당 ‘하나의 빛깔’을 띤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의심해 보아야 한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를 보며 문득 이러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전시장 곳곳을 수놓은 작품들이 서로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제를 수십 년간 천착하는 몰입형 예술가라기보다, 이 주제 저 주제를 두루 탐닉해 온 인상이랄까. 알록달록 원형으로, 또 두터운 덧바름으로 표현한 비주얼 캔디 회화와, 다이아몬드가 알알히 박힌 해골 작품, 그 양쪽에 우뚝 선 조각상, 그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포름알데히드와 함께 박제된 상어와 소 머리, 그리고 벚꽃 연작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묶인다기보다 백화점처럼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 / 사진: 이예진 (c) Damien Hirst, MMCA


삶과 죽음에 대한 강박, 그것을 담은 벽면의 문구들은 관람객이 눈 닿는 족족 사진을 찍어갈 만큼 시선을 끌었다. 대중이, 미술계가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한 작가 같았다. 수천억 원의 자산, 생존 작가 중 가장 부유하다는 수식어, 해골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를 자신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고 속인 이력, 동물 학대 논란까지. 여러 모로 석연치 않은 작가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세가 곧 권력인 시대에 데미미언 허스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들은 석연치 않은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욕망을 밝히면서도 곳곳에 산 채로 박제한 흔적들은 말 그대로 기괴하다. 작품 제목들도 과하게 심오하다. 상어 작품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과, 소 머리가 썩어가는 설치 작품 ‘천 년’(1990)을 보면서도 괜찮았던 내가 불쾌감을 느낀 건, 정작 그의 작업 공간 속 유리 박스 안에 박제된 토끼였다.


사진: 컬처램프 (c) Damien Hirst, MMCA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라는 전시명 문구가 묘한 결말처럼 남는다. 볼 때는 작품들에 끌리지만, 다 보고 나서는 상업적인 가짜 회화 판매 사이트 스크롤을 줄창 내린 기분에 휩싸인다.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끝내 알 수 없는 채로.


플로와 협업해 전시장 한 켠에 QR로 마련해둔 플레이리스트는 비틀즈와 에미넴, 에이펙스 트윈을 뒤섞어 놓은, 두서 없는 음악들의 모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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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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