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사유화, BTS의 공유화

공공 공간은 누구의 것인가

by 이예진

3천만 원. 하이브가 광화문 광장을 7일 동안 사용하고 낸 돈.

1만 명 이상. 공연을 위해 동원된 공적 안전 인력.

33시간. 세종대로를 양방향 전면 통제한 시간.

17개. 무정차 통과하거나 출입구가 폐쇄된 지하철역 수.

31개. 출입이 통제된 주변 빌딩 수.

최초. 공연장에 재난 위기 경보 ‘주의’가 발령된 것.

190개국. 넷플릭스 생중계 국가 수.


그리고 인파. 관계 당국이 위험관리 기준으로 상정했던 최대 예상치는 26만 명이었다. 실제 집계는 서울시 기준 4만~4만 2천 명, 하이브 추산 10만 4천 명으로 크게 갈렸다. 어느 수치를 기준으로 삼든, 통제의 규모와 실제 인파 사이에는 현격한 간극이 있었다.


광화문은 어떤 공간인가. 민주주의와 촛불, 인권 운동의 상징이라는 정치·사회적 맥락을 차치하고도, 세종문화회관과 주변 상인들, 근처 호텔에서 누군가의 예식이 진행되기도 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서울의 한복판이다.


3월 20일 밤 9시부터 22일 새벽까지 그곳이 통제된 결과, 세종문화회관의 공연들이 취소됐다. 다른 문화예술인들은 관객을 만나지 못했다. 하객은 경찰버스에 실려 이동했다. 미리 발주를 넣었던 상인들은 손해를 봤다. 피해의 당사자들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통보됐고, 통제됐고,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서울시가 3조 원 안팎의 경제 파급효과를 강조했다. 그 숫자가 공익과 동일시되는 순간, 숫자 안에 포함되지 않은 삶들은 자동으로 사소해졌다. 신부의 예식도, 상인의 발주도, 예술인의 무대도. 보이지 않는 낙수효과를 위해 눈에 보이는 일상이 정지됐다. 이것을 공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공연 직후 사과문을 낸 건 BTS 멤버들뿐이었다. 하이브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서울시는 ‘안전하게 마무리됐다’라는 성과 메시지를 냈다. 사과가 아니라 성과였다.


공공의 것이 사유화되고, 사유의 것이 공유화됐다. 광화문이라는 공공 공간은 하이브의 컴백쇼를 위해 사유화됐고, 하이브라는 사기업의 아이돌은 국가 브랜드라는 공유재로 귀속됐다. 같은 사태의 양면이다.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하나다. 국가 권력의 개입.


사기업의 아이돌 상품이 국익 수준의 파급력을 가지게 됐을 때, 국가는 그것을 국가 브랜드로 귀속시키려 한다. 그 순간 광화문 사유화는 정당화된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각 행위자는 저마다의 셈법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 하이브는 연이은 내홍과 소송으로 실추된 신뢰도의 리셋이 필요했다. 넷플릭스는 공연 전 미디어 브리핑에서 이번 공연이 넷플릭스 공연 이벤트 중 가장 큰 라이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공연은 77개국 넷플릭스 1위를 기록했고, 100억 원대 제작비가 투입됐다. 서울시는 경제 효과 숫자를 내걸었다. 각자의 이해가 교차한 자리에서 공통으로 도달한 답이 ‘아리랑’이었다. 그 선택과 동시에 BTS는 공유재가 됐다.


국가는 장소를 내줬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광화문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이 BTS에 얹히는 순간, 컴백쇼는 국가 행사의 문법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국가가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장소 자체가 프레임이 된다.


서울시의 문제는 승인의 기준이다. 공무원이 동원됐고, 경찰이 투입됐고, 실무는 행정이 감당했다. 공공 공간을 사기업 행사에 이 규모로 내줄 때, 허가의 근거가 경제 효과 환산 숫자였다면 질문은 거기서 시작된다. 공공성의 기준이 수익 환산 가능한 것으로만 설정될 때, 광화문은 누구의 공간인가.


이 기획의 책임 구조는 처음부터 흐릿하게 설계됐다. 하이브는 기획했고, 서울시는 허가했고, 국가는 프레임을 제공했다. 각자는 자기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역할들이 모여 하나의 구조가 됐을 때, 구조 전체에 책임을 묻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K 브랜드’라는 명분이 클수록 개별 주체의 책임은 더 빠르게 희석된다. 책임은 아티스트가 지고, 과실은 흩어진다. 공연 직후 사과를 한 주체가 BTS였다는 사실이, 그 구조를 가장 정확하게 증명한다.


아리랑은 원래 고통과 이별의 노래다. K브랜드로 가겠다는 선언처럼 읽히는 제목 아래, 실제 가사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린 그냥 사람 일곱인데’,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화합을 상징하는 요소들을 심어두고, 음악은 피로를 호소했다.


퍼포먼스는 거짓말을 못 한다. BTS 공연의 역사적 강점은 에너지와 밀도였다. 음악 방송 출연조차 어려웠던 중소 기획사, 주류가 외면했던 음악. 무시당하면서도 버텨온 결기가 가사에 있었고, 일곱 명이 하나가 되는 서사가 무대에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을 이입했다.


이번 앨범은 처음부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They Don’t Know ‘Bout Us’는 ‘영웅스러운 존재, too hard to break’이라는 외부의 수식을 가사 안에 직접 인용한 뒤 ‘We can’t relate / 그냥 사람 일곱인데’로 부정한다. 앨범 전반의 멜로디 밀도는 현저히 낮고, 에너지보다 정적이 지배하는 설계였다. 듣는 음악이었지 광장을 채우는 음악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너지가 아니라 피로감이 흘렀다. 앨범이 피로를 말하고 있었는데, 무대가 그것을 증명해 버렸다.


연출도 그 간극을 드러냈다. ‘Body to Body’에서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복 차림의 국악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BTS 멤버들은 앵글 밖을 벗어나 있었다. 국악 공연자들이 광화문 앞에 따로 세워졌다. 함께 무언가를 만든 게 아니라 전환하여 이어 붙인 구조였다. 이날 넷플릭스를 통해 BTS를 접하는 시청자들이 190개국에 있었다.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미’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팬덤 바깥의 언어는 없었다. K를 팔려 했지만, 팬덤의 언어가 곧 K의 언어는 아니다.


공연은 ‘Dynamite’로 끝났다. “BTS 2.0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라고 선언한 자리에서, 과거의 곡으로 마무리됐다. 새 챕터를 열겠다는 선언과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는 마무리. 역설적으로 공연이 살아난 건 ‘Butter’, ‘MIC Drop’, ‘Dynamite’. 모두 기존 곡이었다. 그 사이의 간극이, 이 공연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해줬다.


표상과 얼굴은 BTS다. 그러니 사과도 그들이 했다. 그런데 그 짐을 설계한 주체는 침묵했다. 아티스트가 이 구조에 동의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구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책임이 흐려지는 만큼 무게는 아티스트에게 쌓인다.


신부가, 상인이, 반차를 낸 직장인이, 목소리를 낼 공간을 잃은 사람들이 BTS라는 이름과 함께 이 공연을 기억하게 됐다. 새로운 적을 만든 게 아니라, 잠재적 지지자를 잃었다. 그 피로감은 고스란히 아티스트에게 돌아갔다. 무대에서 그대로 보였다.


BTS가 한국 대중에게 특별했던 건 국가 브랜드 때문만이 아니다. 무시당하면서도 버텨온 결기, 자기만의 언어로 쌓아온 것들. 그런데 이번 광화문에서 본 건 BTS가 주도하는 무대가 아니라, 세상이 BTS를 쓰고 있는 장면이었다.


광화문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가 잃어버린 ‘공공성’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광장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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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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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projectjinji@gmail.com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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