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진용 작가, 『샘플링 팝송, 추억을 소환하다』를 읽고
좋은 멜로디는 사라지지 않는다. 외투를 바꿔 입고 돌아올 뿐이다. 염진용 작가의 『샘플링 팝송, 추억을 소환하다』는 그 ‘돌아옴’의 계보를 추적하는 책이다. 부제는 ‘우리가 듣던 멜로디의 시작을 찾아서’. 책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팝송들은 어디서 왔는가.
책을 손에 쥐면 종이 질감이 먼저 느껴진다. 넘기는 맛이 있는 종이이고, 제목 글자는 엠보싱으로 부드럽게 올라와 있다. 내용을 읽기 전에 이미 공들인 책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구성은 알리야(Aaliyah)부터 윌리 넬슨(Willie Nelson)까지, 알파벳순으로 50명 내외의 아티스트를 다룬다. 각 챕터는 ‘샘플링하다’와 ‘샘플링되다’ 두 파트로 나뉘고, 원곡은 붉은 글씨, 샘플링 곡은 초록 글씨로 인쇄되어 앨범 커버와 나란히 놓인다. 읽다 보면 어느새 플레이리스트를 따라가고 있다. 텍스트를 넘어 음악을 건네는 구성이다.
선정 기준도 눈에 띈다. 알리야, 다이도, 스위트박스, 팔코 같은 이름들이 있다. 흔히 명반 리스트에서 마주하는 음악들만 모은 것이 아니다. 제니퍼 로페즈 챕터의 부제가 ‘음악보다 존재감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셀러브리티’인 것처럼, 대중적인 히트와 음악적 독창성을 골고루 고려한 선택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이 ‘위대한 음악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들어온 음악의 역사’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저자는 샘플링을 196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하나의 작곡 방식이자 문화로 바라본다. 셰어와 아마래(Amarrae)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찰리 XCX가 한 쌍을 이루어 다가올 때, 멜로디가 시간을 건너 수명을 이어간다. 좋은 멜로디는 다시 불린다.
스위트박스 챕터가 그 논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샘플링한 곡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책에서 앨범별로 정리된 샘플링 목록을 마주했을 때는 달랐다. 1집의 알비노니, 3집의 포레, 베토벤, 마스카니, 라벨, 4집의 파헬벨, 모차르트, 엘가, 6집의 비발디, 바흐, 8집의 차이코프스키, 그리그까지. 앨범 전체가, 저자의 표현처럼 ‘샘플링의 보물창고’였다.
저자는 스위트박스의 대중성이 친숙한 것들의 재배치에서 비롯된다고 쓴다. 클래식은 더 이상 ‘높은 음악’이 아니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고,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지점을 체감하게 된다고.
한쪽에는 바로크 시대의 궁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현대 도시의 이어폰 속 일상이 있다. 샘플링은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리고 샘플링은, 시간을 잘라내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이어 붙이는 예술임을… — 『샘플링 팝송, 추억을 소환하다』中
작가의 말에는 1980년대 후반 캠퍼스가 나온다. 최루탄과 사과탄이 뒤섞이던 시절, 시위 과정에서 옷이 찢기고 몸에 상처가 남았다고 했다. 6.29 선언을 끌어낸 뒤 지쳐버린 몸이 찾은 탈출구가 팝송이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그저 취미로 시작했다기보다는 시대를 버티기 위해 의지해 온 음악이었다. 그 문장이 묵직하게 읽히는 이유는, 이 책 전체가 그 시간의 무게를 등에 지고 쓰였기 때문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10년 이상의 글쓰기를 지속하며 완성해 낸 이 책은, ‘6090 팝 음악의 샘플링 안내서’로만 읽기엔 아깝다. 찰리 XCX와 BTS까지 아우르는 현재와의 접점, 그리고 한 사람이 음악에 기대어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090 팝송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그 멜로디들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사운드트랙이 조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멜로디 하나를 오래 애정해 온 사람, 그 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던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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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projectjinji@gmail.com
*본 리뷰는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