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감정, 긍정적인 표현
나는 몇 해 전 세 번째로 회사를 관뒀다. 이런저런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내가 배우지 못한 것들 때문이었구나라고 돌아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평균은 되는 가방끈으로 취학 전 기간까지 따지면 근 20년을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한 것. 나도 몰랐던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이야기다.
웃으면서 거절하는 법, 유쾌한 No~Thanks
외국생활을 하면서 당황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꼽는다면 상대가 웃으면서 나의 호의를 거절할 때였다. 그 당황스러움은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밴 우리네 습관에서 온 것이 아닐까? 어른이 주는 것은 원치 않더라도 "어른이 주시는데 뭐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야지"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며 자라왔다. 싫다고 말해도 몇 번이나 권하는 문화다 보니 결국 송구스럽고 민망해서라도 억지로 받아 들어야 했던 기억이 결국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구나 싶었다. 더불어 나도 상대가 싫다는데 재차 권하며 끝끝내 거절하면 서운해하기도 하더라. 유쾌한 거절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익숙해진다면 억지로 받아 든 호의가 스트레스가 되는 일은 없을 텐데. 결국 유쾌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란 나는, 대부분의 싫은 호의는 참아내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싫은 호의에만 정색하며 거절하게 되었다.
웃으면서 화내는 법, 제 때 제대로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는 나는, 한 번 화를 낼 때는 거칠고 사납다. 꾹 참고 참았다가 한 번에 몰아쉬는 숨처럼 화를 터뜨리곤 한다. 나름 몇 번의 기회를 주고 참아주었다고 하더라도 격한 화에 상대는 아연실색하기 마련이다. 평소의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한다. 화를 내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평소 화를 내지 않도록 누른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끝장을 보아야 하는 화는 기실 제 때에 적절하게 화를 낼 줄 몰라 속에 차곡차곡 쌓아 묵힌 것이 더 큰 이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쌓아두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화를 내야 할 순간에 적절한 강도로 화를 내고,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데 언제 화를 내야 하는지,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못 배워 참는 것으로 그 상황을 모면할 뿐이었다. 함께 그 상황을 모면한 상대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하던 대로 행동하다가 벼락같은 화를 마주하게 되니 얼마나 어리둥절할까? 결국 나의 폭주에 관계는 망가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되곤 했다. 그래... 나는 제 때, 제대로 화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웃으면서 반대하는 법, 즐거운 논쟁
일할 때의 나는 꽤나 전투적인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고, 그만큼 책임감도 강했기에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문제는 늘 나의 강경하고 직접적인 표현방법이었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던 거라고 변명해보고도 싶다. 누군가와 반대되는 의견을 전달할 때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매우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 상대가 공격이라고 느낄 만큼 대응했다. 그래도 조금 변명을 하자면 방송국에서 일할 때 자극적이고 강한 표현으로 아이템 회의를 했던 것이 몸에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반대의견을 말하는 세련된 방법, 효율적인 방법에 무지했다. 강경하고 직접적인 단어와 문장 선택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고, 당황한 상대방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직장상사의 꼰대 근성까지 합해져 나이나 직위가 거론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일파만파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러니 즐거운 논쟁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농담을 섞어 웃고 떠들듯이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 알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즐겁게 반대의견을 이야기하고 듣는 방법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한 채 논쟁과 맞닥뜨린 무지렁이였다.
부정적인 감정, 긍정적인 표현
웃으면서 싫다고 말하고, 제 때 화를 내고, 세련되게 반대의견을 말하는 것은 결국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왜 배우지 못했던 걸까? 아니 왜 상상하지 못했을까?
싫다고 말하면 안 되고, 화내면 안 되고,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강압하는 사회, 강요하는 사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싫다고 어떻게 말해야 하고, 화는 어떻게 내야 하고, 반대의견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저 안 되는 것을 안된다고만 배워왔으니 참고 참다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터지거나, 정당한 의사표현마저도 격한 방법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겠지. 더불어 수많은 오해들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진작 배웠더라면 달라졌을 것들, 이제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들
작년 5월, 나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끓어오르는 분노 사이를 오갔고, 늦은 밤 홀로 깨어 지난 시간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메일 한 통, 문자 하나로 쫓겨난 집에서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한 건, 내가 배우지 못한 것들 때문이었다.
함께 지내며 나는 거절해야 할 것을 유쾌하게 거절하지 못했고, 화가 날 때 제 때 화내지 못했다. 더불어 반대 의견이 있을 때도 지나간 시간 겪었던 충돌과 같은 상황을 원치 않았기에 오히려 의견을 내지 않는 것으로 갈음했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끝'을 맞았다. 상대가 말한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방식, 그마저도 그럴 수 있지 않나 이해하려던 내가 분노로 들끓었던 건 상대가 했던 거짓말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부터 였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화 낼 기회조차도 얻지 못한 채, 분노만을 쌓아왔으니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게다.
달라졌을 것이다. 진작 배웠더라면 그래서 거절과 화와 반대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 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더불어,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선명하다.
지금도 배워가고 있다. 배워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지나간 시간보다 잘 해내겠지. 고작 2달 전만 해도 심장이 내려앉을 거 같은 심정으로 마주쳤던 상대를 본다면 이젠 웃으며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 있기를! 거기서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