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쌈 아닌 보쌈 같은 이런 시작, Like a Movie #2
"제정신이에요?"
이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넘도록 말 한마디 섞지 않다가 탈탈 털어 오분이 채 안 되는 대화를 하고 사귀기로 결정 낸 남자, 데이트 한 번 없이 자신의 집으로 여자를 데리고 가는 남자가 제정신일 거라 생각하긴 쉽지 않다. 머리 위로 포대자루 하나 덮어 씌우면 조선시대의 보쌈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 남자 뭐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행동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하는 이 남자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 등짝만 바라보며 숨죽여 질질 짜는 연애를 몇 년이나 했던 나에게 그의 넘치는 박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의 집 앞에서 악다구니를 치고 화를 내기보다는 손목을 휘감은 커다란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까닭이다.
"어머 반가워, 네가 주영이구나?"
"어서 와라, 반갑다 나 연우 아빠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또 정신이 빠질 것 같았다. 그의 부모님이 현관에 서서 며느리감 인사 오는 걸 기다린 듯 말을 건넬 줄은 어찌 아냔 말이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한볶까지 차려 입고 계셨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큰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멀리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 네, 안녕하세요."
어색하고 혼이 나간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쭉 늘어선 떡 벌어진 한 상이 놓여있었다. 지방 붙이고 초라도 켜면 이대로 제사를 지내도 될 판이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
"네, 잘 먹겠습니다."
'차린 게 없다니요. 제 평생 이런 큰 상 받아본 적이 없는 걸요. 그런데 이걸 어찌 먹나요. 아니 넘어갈 거 같지 않아요.'
입은 바짝바짝 타고, 숨은 턱턱 막히는데 엄마의 끊임없는 잔소리로 다져진 예의가 날 꽉 붙들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복 먹을 줄 아니? 먹으면 탈 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 네"
그의 아버지가 팔을 쭉 뻗어 밥그릇 위에 조림 전복을 올려놓으셨다. 이쯤 되면 수저를 들지 않을 수 없어진다. 아 딱 죽겠다는 심정으로 입안에 전복을 넣는데, 눈이 번쩍 떠졌다. 전복이 이런 맛이었어?
그의 어머니는 한식, 일식, 양식, 중식까지 자격증을 두루 소지한 요리 고수였다. 그에게 제빵을 권유한 것도 어머니였더라. 쭈뼛쭈뼛 그리고 점점 변죽도 좋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감탄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 가서 이런 상을 또 받아보겠어 싶은 마음도 들고, 아이고 얄팍하기가 종잇장보다 더 하지 않은가? 그때 알았다. 내가 그다지 심지 굳은 인간은 아니라는 걸.
"집은 어디니? 양친 부모님은 다 계시고?"
"엄마! 질문 금지. 애가 밥을 못 먹잖아."
"아유 얘는~ 내가 뭘 얼마나 물어봤다고, 요것도 못 물어봐"
"주영아 대답할 필요 없다. 너 어디 살든, 양친 부모님이 돌아가셨든 살아계시든 난 상관없으니까. 밥이나 맛있게 먹어."
어라? 이 남자 좀 괜찮네. 싶어 졌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어 오지랖이 발동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연히 궁금하실 수 있죠. 금천구 시흥동 살고요, 부모님은 두 분 다 계시고요."
"어머~~ 너 말 이쁘게 한다. 부담스럽게 했음 엄마가 미안해. 요것도 먹어봐."
어머니는 천생 여자, 나이를 잊은 듯한 애교가 철철 흘러넘쳤다. 아들이 꽤나 당황스럽게 굴었음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로 대응하는 모습이 생경했다. 작은 몸집의 어머니에게도 지금까지 본적 없는 고수의 아우라가 보였다. 뭔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문화 충격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상 뒷정리를 도우려고 하자 늘 그랬다는 듯 그와 동생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나는 그의 방으로 보내졌다. 뒷정리가 끝날 때까지 방안에 혼자 남겨져 호랑이 굴에 끌려다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을 되뇌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누군가의 집을 호랑이 굴에 빗대어 정신을 다잡는 내 상황이 우스워 너털웃음이 났다. 미친년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그가 들어왔다.
"자, 이제 궁금한 거 물어봐."
매우 자연스럽게, 그는 미리 생각해 놓은 순서대로 매끄럽게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뒤늦은 당황과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상황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에 물음을 시작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좋아하니까."
두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대답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지만 정신을 다잡고 질문을 이어갔다.
"저에 대해 잘 모르시잖아요. 도대체 왜? 뭘 보고?"
"한 달이면 충분히 본거 같은데?"
그는 한 달 동안 지켜본다. 출근 시간 15분 전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보는 사람마다 환하게 인사할 줄 아는, 보는 사람이 없어도 뭔가 끊임없이 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단골손님들의 소소한 취향을 꼼꼼히 챙기는 곰살맞음이 좋았단다. 책임감과 다정함을 갖춘 자신의 이상형, 저 여자가 내 여자면 좋겠다 생각했다고 말을 이었다.
"나 나쁜 사람 아니다. 한 번 믿어봐라. 후회 안 할 거다."
"아니 그래도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보고 다짜고짜 집부터 데리고 오는 게 어딨어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허락받으려고 한 건 아니다. 내가 누굴 만난다면 궁금해하실 거고 불필요한 추측이나 상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게 무슨, 오기 전에 말이라도 했어야죠!"
"미리 말했음 순순히 왔을 거고? 오려고도 안 했을 테고, 온다고 해도 옷이며 머리며 부자연스럽게 잔뜩 갖추고 신경 썼을 거 아냐. 그냥 평소 모습 보여 주여 주고 싶었어. 시작이 편하면 앞으로도 그다지 꾸밀 필요 없을 거고, 너와의 관계를 길게 보면 여러모로 좋을 거라 생각했다. 불편했다면 미안하다."
"제가 깽판 쳤음 어쩌려고....?"
"한 달 동안 지켜본 너는 그럴 사람 아니었으니까. 내 생각이 옳았네. 고맙다."
꾹꾹 눌러 말하는 그의 대답들에 이끌려 당황함도 분노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불안함도 마음 한편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생경한 것을 보았을 때 자꾸 보게 되는 것처럼 그를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 저 어느 즈음에서는 그래도 돼?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이성이 감정을 흔들어댔다. 고작 몇 개의 질문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뭔가 복잡한 얼굴을 한 나에게 그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왜? 못 믿겠어? 널 믿지 말고, 나를 믿어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이걸로 게임은 끝났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시작 게임에서 완벽히 승리했다.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손 만 잡을게, 우리 만난 지 1일이니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