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성 으리는 접어 둬, Like a Movie #3
"버스는 안 탄다고요?"
"아주 어릴 때 탔던 기억은 있는데.... 너무 오래돼서."
"그렇다고 매번 어떻게 택시를 타요?"
"그게 참.... 난 택시가 편해."
연애 시작을 인지하기도 전에 강제로 시작한 연애는 이해불가의 연속이었다. 첫 데이트를 부모님 집에서 과식으로 치러내고 두 번째 데이트. 아르바이트가 끝나기를 기다려 날 데리러 온 그와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자는 나와, 버스는 못 탄다는 그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처음부터 주도권을 뺏겨도 너무 뺏겼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처음처럼 또 달랑 들어 택시에 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멀지 감치 떨어져 꽥꽥 대니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더라. 결국
"그래 타자 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렇게 버스를 타고 싶다니 타자."
"진짜요? 거봐 거봐 한 번 타기 시작하면 나름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좋아요."
그러나, 버스에 올라탄 나는 5분이 채 못되어 후회하기 시작했다. 키 190센티미터 108 킬로그램의 그에게 버스도 작은 차라는 걸 몰랐던 나의 실수였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괜한 걸 우겼구나 싶었다. 어느 날부터 버스를 타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매번 택시를 타고 다니는 사실만 가지고 타박을 했으니. 퇴근 시간 전이라 버스에 자리가 많은데도 그는 앉을 수 없었다. 긴 다리 덕분에 버스 좌석 앞 뒤 간 폭이 너무 좁기도 했고, 그래도 앉으려면 쩍벌남이 돼도 아주 민폐 쩍벌남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한 가지 더, 그의 강인하고 건장한 외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옆에 서 있는 내가 불편할 정도로 사람들이 할끔대며 훔쳐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무표정할 때 그의 길고 쌍꺼풀 없는 눈매는 차가움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었으니까. 한 마디로 어둠의 세계에서 한 자리할 거 같은 기운이 온몸에 좔좔 흘렀다.
"오빠, 내려요."
"왜? 아직 몇 정거장 남지 않았어?"
"그냥 쫌 내려요."
팔을 잡고 버스 출입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내렸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미안할 거 없어.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괜찮다. 다시는 버스 타자고 못할 테니."
미안하다는 말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인지 다 안다는 듯 왜 미안해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럼 지하철은?"
"음... 한 번은 타 주지."
지하철은 버스보다 크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똑같겠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으면 내 앞에 아무도 못서, 이상하게 내 옆에도 아무도 안 앉아. 나 정도 덩치는 대중교통 안 타는 게 여러 사람 도와주는 거야."
이로써 그와의 연애 기간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택시 이용 횟수를 기록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덩치는 여러모로 생각지 못한 효과를 갖고 있었다. 주말 종로나 강남, 혹은 홍대나 이화여대 앞 저녁이 되면 사람들로 꽉 차는 그 길들이 그와 함께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홍해 갈라지 듯이 앞길이 쫙 열렸으니까. 사람들은 무표정한 그를 무서워하는 건지 덩치를 무서워하는 건지 알아서들 길을 비켜주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간격이 되면 뒤를 돌아보고 길을 비켜주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물론 길을 비켜주면서 그의 옆에 있는 나를 아래 위로 한 번 할끔 대는 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시선에도 무감 해질 즈음 사건이 터졌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가던 날 밤이었다. 연휴가 전야라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그와 함께 택시에서 내려 약속 장소로 걸어가던 길 어떤 남자가 취한 건지 나와 심하게 부딪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부딪힐 거 같아 몸을 피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향으로 상대가 방향을 갑자기 바꾸는 탓에 거의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옆에 선 그가 날 재빠르게 당기지 않았으면 이마 박치기라도 할 판이었다. 나는 버릇대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부딪혀 비틀대던 남자는 고개를 휙 돌려
"뭐야!! 똑바로 보고 안다녀? 어디 여자가 밤중에 돌아다니고 지랄이랴 지랄이. 다니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다니 란 말이야"
눈알을 부라리며 성질을 부렸다. 그리고는 제갈길을 가려는 듯 몸을 돌리는데 커다란 손이 행인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팔힘은 또 어찌나 센지 뒷덜미가 붙잡힌 행인은 뿌리치지도 못하고 거의 매달려 있는 지경이 되었다.
"이봐,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새낀 또 뭐....... 야?"
"지금 한 말 다시 한번 해봐."
"아니.... 그게....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흠흠."
행인은 그의 기세에 눌려 목소리가 점점 모기만 해지고 있었다.
"오빠 왜 이래요! 그냥 좀 부딪힌 걸 가지고.. 그냥 가요."
"넌 가만있어. 내가 부딪힌 걸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 이 친구가 지금 그쪽 길 비켜주려다가 부딪힌 거잖아. 어디서 막말이야. 지랄?"
"아니 그게 저......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이 친구한테 사과하쇼."
"아, 네네. 죄송합니다."
잡았던 뒷덜미를 확 놓았다. 행인은 파랗게 질려서는 거의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서서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정작 나한테는 눈 한 번 제대로 못 뜨는 인간이, 아저씨 그렇게 살지 맙시다. 오늘 이 친구 옆에 있었던 게 천만다행인 줄 아쇼. 나랑 부딪히고 그렇게 욕했으면 당신 오늘 죽었을 테니"
그는 내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와 달리 나는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오랫동안 놀란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볍지 않았다. 정말 내가 옆에 없었더라면 행인은 흠씬 두드려 맞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의 에피소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조금의 불의, 또는 흔한 말로 싹수없음을 보아 넘기질 못했다. 그의 친구들 말로는 그나마 내 앞에서는 덜한 거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으리~ 김보성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었으니까.
한 번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가게 근처 시장에 군것질을 하러 가자고 졸랐다. 시장에서 파는 분식류가 유난히 땡기는 날이었다. 복잡하고 좁은 길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내가 먹고 싶다고 하니 결국 따라나섰다. 아무리 싫어도 한 번쯤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는 그가 고마워서 기분 좋게 걷고 있었다. 시장 초입, 앞에 걷고 있던 아저씨가 노점 할머니가 곱게 쌓아놓은 상추를 발로 찼다. 순간 속으로 외쳤다.
'아저씨 제발 사과하세요!!!'
그러나 그 아저씨는 힐끔 쳐다보더니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아니 이래 놓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해~"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는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아저씨, 남의 물건을 발로 찼으면 사과를 하고 가야지."
뭔가 잘못한 사람에게는 높임말을 쓰는 법이 없었다. 일단 반말시전.
"아니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디서 반말 지껄이야!!"
"아니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을 하시던가!"
"넌 애미 애비도 없냐? 그리고 니일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이봐 내가 보기엔 당신이 애미 애비가 없는 거 같은데? 지금 자기 어머님 뻘 되시는 분이 장사하느라 길에 나와서 힘들게 일하시는데, 그걸 발로 차 놓고도 그냥 가는 사람 부모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잡수신 거야?"
"이이 이런~ 호로새끼를 봤나!"
호.로.새.끼..... 아 아저씨 왜 그러셨어요.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때 그가 솥뚜껑 만한 손으로 아저씨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여기서 한 스텝만 딱 나가면 바닥에 내동댕이 치기 직전, 난 딱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하나 둘 구경꾼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정작 나는 달달 떨고만 있었다.
"이 봐 총각, 그만해 그만. 응? 이러다가 경찰서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래. 그냥 내려놔 이 할매가 부탁할게. 응?"
그의 눈에서 일던 불꽃이 사그라드나 싶더니,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노점 할머니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그에게 다가가 등을 툭툭 등을 두드렸다.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나 보다. 그는 아저씨를 내려놓았다. 나도 턱 막혔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며 안도했다.
"할머니 여기 있는 상추 다 얼마예요?"
"응? 그건 왜?"
"이봐요 아저씨. 당신이 할머니 장사 마쳤으니까 이거 다 사. 안 그럼 경찰서를 가든 말든 내가 오늘 병원에 입원시켜 드릴라니까."
"아이고 총각 안 그래도 돼. 상추 상하지도 않았어."
"할머니, 남이 발로 찬 상추를 누가 사가고 싶겠어요? 그냥 가만 계세요."
그는 고개를 들어 그 아저씨를 무섭게 째려봤다. 그의 말에는 늘 힘이 있었다. 뱉은 말은 하고야 만다는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발길질 아재는 결국 우물쭈물 지갑을 열어 상추를 몽땅 사갔다. 작은 노점 장사라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발길질 한 번으로 몇 날 며칠을 먹어도 남을 것 같은 상추에 마누라 잔소리까지 덤으로 잔뜩 사간 꼴이 되었다.
이 날 나는 그에게서 의외의 점을 발견했다. 할머니들에게 유독 약하다는 점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경찰서라는 단어에 꽤나 민감하다는 것. 이 대목에서 독자는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전과자인가? 다행히 그는 전과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건 나중에 알려주마!
여하튼 그와의 데이트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택시를 타고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한 번에 이동, 무슨 일이 일어날 기회를 차단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가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웬만해서는 바꾸지 않는다는 점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돌이키기 힘들고 그만큼 협의나 합의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내 의견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한 번은 해주고 자기가 왜 그걸 싫어하는지 안 하려 드는지를 명확히 하려는 것아 나름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한 번 해준다는 말은 의외의 장점이 발견돼도 두 번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그와의 만남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산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그런 계산에 익숙하다기보다 끌려다니는 쪽을 택했다는 것, 그게 오히려 마음은 편했으니까. 그는 그런 내가 무척이나 편했을 거다.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일은 빨리 포기하고 우기지 않았고, 싸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괜한 시비를 걸거나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나조차도 절대 그를 따라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다른 건 순순히 따라주면서도 담배를 끊기 전까지는 절대 키스를 할 수 없다고 버티는 데다가 키스가 안되니 당연히 다음 단계도 철벽 방어를 했다. 힘 꽤나 쓰는 그였지만 나름 철학이 있어서 여자와 아이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고, 무리하게 신체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그는 점점 안달이 났다. 그때는 정말 마음이 동하지 않아 철벽 방어를 했던 것인데, 뒤늦게 알았다. 여자의 거절은 때론 엄청난 권력이 된다는 것. 물론 적당히 해야 하지만 말이다.
결국 그는 담배를 끊었다. 허리 부상으로 국가 대표 상비군을 포기한 후 배우게 된 늦담배였다. 하루에 한 갑은 피던 그였다. 결국 담배를 끊고 한 달을 채웠을 때, 그에게 기회는 왔다. 그때 난 또 하나를 배운다.
한 번의 키스 만으로도 누군가를 그토록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