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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Nov 14. 2022

네 며느리의 여행

시집살이. 어쩐지 구식 같지만, 다른 말을 떠오려보려고 하니 더 강한 어감들이 떠올라 그냥 이 단어를 쓰기로 한다.

'적어도 경력 20년은 돼야지!' 이것도 경력이라면 경력인 걸까. 전쟁터에서 훈장 받은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광화문 은행나무길은 꼭 밟아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시댁 큰댁 형님들께서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천안에 사시는 작은 형님, 용인에 사시는 큰 형님, 김포에 사는 나. 너무 부담되지 않게 마침 여행지로 잡은 곳이 광화문쪽이다. 호텔을 잡고 하루 실컷 놀기로 한다. 올해 가을 은행나무길은 형님들과 함께 걷게 되는군.


쾌재를 부르지 못했던 건, 그 좋은 호캉스 얘기에 고구마 까지는 아니고 삶은 계란 한 개 삼킨 기분이 들었던 건, 잠은 자지 말까 살짝 고민까지 했던 건 형님들과의 정서적 거리감 때문이었다.

큰 형님은 나와 동갑이지만 살림 수준이 어머니 세대급이라 큰 형님 앞에 서면 나는, 늘 뭘 잘 모르는 새댁같이 느껴져 작아졌다. 둘째 형님은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원췌 성격이 꼬장꼬장해 보였고, 결혼 후 첫 만남에서 "내가 한 살 어려도 손위니까 말 놓을게."하고 서열정리를 확실히 해두신 분이다. 두 분의 카리스마는 남달라 보였다.

그런데 명절 때만 만나다 보니, 만날 때마다 어색함과 무언의 거리감이 흐르는 관계였다. 게다가 둘은 친동서지간이고 자녀들 연령도 비슷해 소울메이트처럼 가까웠다. 그 틈에 겨우 끼어있는 듯 나는 늘 손님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여행, 동침까지 한다!

좀 부담이 되었으나, 기꺼이 여행을 마련하고 내게도 제의해주신 것이 놀랍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이것은 분명 감사함이 커야 하는 상황이라고 나를 세뇌시키며 반가움에 흠뻑 취한 듯 제안에 응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고 여행날이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부담감. 결국 나는 핑계를 찾아냈다. 마침 여행 다음날 남편이 차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차를 가져가고, 다음날 남편이 차를 써야 하니 저는 새벽녘에 귀가해야 할 것 같아요."

사이다를 마신 듯 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는데,

형님들 왈, "차 없어도 괜찮아. 대중교통으로 다니자!"

결국 나는 "네"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싸며 생각하니,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셋 다 또래가 아닌가. 분명 공통 지점이 많을 것 같았다. 또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성격이 안 맞는 경우 보면, 심보가 고약한 사람들과는 멀리 하는 편이 낫지만 대부분의 선한 마음을 깔고 있는 사람들과는 큰 무리 없이 지낼 수가 있다. 뭐 형님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고 심보 고약한 짓을 하는 분들은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하다 보니, 괜한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느낀 것이 형님들께 죄송해진다. 입장 바꿔 누가 나를 불편해면 내가 뭘 어쨌다고 하며 유쾌하지 않을 텐데, 난 마음속에서 형님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니.

이렇게 결혼 20년 만에 셋의 첫 여행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꼬였다. 여의도 63 빌딩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 5시, 난 서울역에 있었다. 평소 지하철을 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 복잡한 노선들 속에서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9호선을 타야 하는데 공항철도를 타버렸다.

결국 형님들 먼저 식사하고 5시 반에 도착한 바보 나. 우려와 달리, 지하철 노선도도 잘 못 보는 나의 촌스러움을 재밌어해 주셨다. 그리고 서로의 촌스러움에 대해 얘기가 오가며 서로 웃으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 후 들른 한강고수부지. 버스킹 음악을 들으며 유유하고 잔잔히 흐르는 한강과 노랗게 떠오른 둥근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저 편안해진다. 형님들이 그저 동갑내기 친구들처럼 느껴진다. 친구와 만나 속내를 나누듯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간다. 깔깔깔 웃다가, 아이들 얘기를 나누며 엄마인 우리의 삶을 나누다가, 서로 학창 시절 얘기도 나누고 각자의 추억을 소환해 공유하기도 하는 사이 마음의 장막은 어느새 걷어져 있었다.


이제 을지로 3가로 간다. 드디어 나의 친동서인 막내동서가 투입될 시간이다. 막내동서는 아이가 어려 못 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가 있으니 오겠다고 한다. 이렇게 넷으로 완전체를 이룬 며느리 군단은 을지로 3가 골뱅이 골목을 누빈다.

여자 넷이 일렬로 걸으니, 여고시절 길을 꽉 채우며 걷는다고 어르신들께 '길 비좁다. 흩어져라'며 핀잔 듣던 기억이 떠올라 재미지기도 하다.

우리는 핫플레이스인 맥주집에 들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피맥을 하고(젊은이들이 있는 배경에 꽤나 잘 어우러진 듯 한건 나만의 착각인가), 쭉 원조라는 간판을 달고 늘어선 가게들을 주시하며 나름 예리한 분석력을 발휘해 한 집을 픽하여 그 유명한 을지로 골뱅이를 포장해 호텔로 향한다.

셋다 술을 잘 못 마시기에 맛있는 술들, 깔라만시 소주, 몰디브 소주, 데미소다 맛이 나 소주 비스름한 뭐시기, 맥주, 과자, 과일, 라면, 아이스크림을 잔뜩 산다. 편의점 쇼핑에서 5만 원이 나오기는 처음. 알고 보니 이렇게 많은 안주를 사게 된 건, 셋 다 손에 들고 있던 골뱅이와 뚱뚱 계란말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 하물며 뒤돌아선 정도가 아니라 한참을 걸었으니, 형님 손에 검정 봉다리는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

하나하나 재미난 추억들이 쌓여간다. 추억은 거창하기보다 소소한 편이 낫다. 거창한 것들은 기억을 채우지만, 소소한 추억은 마음에 남는다.


호텔 방을 세팅해 술상을 차린 우리 넷의 대화는 새벽 5시 반까지 장장 7시간 동안 쉼 없이 이어진다. 쉼 없이 이어지던 대화는 내일 마저 하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막을 내렸다. 역시나 한 마디만 던져도 척 알아들을 수 있는 공감대가 있었다. 예민하고 일방적인 시어머니들에게 상처받은 일화들, 남편이 주식으로 재산 날린 얘기, 공감력은 무에 가까운 무심한 남편 얘기, 남편의 외도 얘기, 한때 우울증까지 겪을 만큼 힘들었던 사연들, 친정부모님 얘기, 그리고 우리 삶의 중심과 혼돈. 주제를 넘나드는 얘기들을 안주삼아 울고 웃으며 밤은 깊어갔지만, 둥근달은 우리를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의 거리감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데는 두 시어머니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어떻게 한다더라는 내 시어머님의 얘기들이 큰어머님을 자극하고, 두 형님은 비교되기도 하고 내가 부럽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들은 며늘년, 나는 며느님인 줄 아셨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추석 처음으로 세 며느리끼리만 카페를 찾았던 적이 있는데, 나의 속사정을 얘기하니 내심 놀라시기도 했지만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드셔서 같이 여행이 가고 싶어지셨다고 한다.

늘 상 차리고 치우고 또 상 차리고 치우고 어른들 눈치 보며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가,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서로 벽을 허물고 나눈 얘기가 무언의 오해 상황들, 무려 20년의 오해 상황들이 풀리고 우리의 첫 여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나를 보는 너를 본다.

나는 너의 관점에서 네가 보는 나를 본다.

나는 너를 보는 나를 보고 있는 너를 본다.


이 묘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상대가 보는 나를 보고, 내 안에서 만들어진 상대를 보고, 그러한 상대를 가진 나를 보는 상대를 또 본다. 관계는 이렇게 점점 나선형으로 확장되어 가며 정립된다.

서로에 대한 이해, 더 큰 이해를 위한 되돌아봄 사이에 오해라는 작은 구멍이 생기면 그 관계는 나선형 확장, 성장 진행이 정지 또는 퇴보된다. 네 며느리는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아쉬움과 불편함을 가진 채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우리 시어머님들이 이런 되돌아봄의 눈치를 좀 가져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너를 보는 나를 본다.

나는 나의 관점에서 내가 보는 너를 본다.

이것이 시어머님들의 관점이 아녔을까. 참 좋으신 분들도 많지만, 우리 넷의 시어머님들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에 해당된다.


어쨌든 20년 만에 며느리 넷은 완전체를 자발적으로 이루었다. 길고 긴 회포를 풀었다. 이제는 오해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무서울 것이 없는 기분이다. 혹시 집 나갈 일이 있어도 갈 수 있는 곳이 늘었다.

우리는 매달 여행계를 붓기로 한다. 첫 여행일을 기념해 며느리 날로 지정한 11월 11일.

매년 11월 11일 며느리 넷은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제부터는 빼빼로 데이에 나는 여행가방을 들고 집을 나설 예정이다.


한 줄 요약 :

20년 만에 완전체 이룬 며느리 넷의 11월 11일 며느리 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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